20화
기사단의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그자들은 이교도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오스칼이 가져온 차용증 조각을 맞추어 들여다보고 있던 마티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용증에 선명하게 새겨진 역오망성(5개의 선분이 교차하는 별 모양을 뒤집은 도형) 문양은 틀림없이 이교도의 상징이었다.
“그자들이 또다시 노예거래를 시작한 건가.”
“그놈들이 내게도 노예가 되고 싶냐고 물은 걸 보니, 릴리안 외에도 피해자들이 더 있을 거야.”
오스칼의 말에 레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노예거래는 레오의 부모님이 왕실 근위대에 있을 당시, 인신매매단의 본거지에 잠입해 피해자들을 구출하고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낸 이후 한동안 일어나지 않던 일이었다.
레오의 턱이 불끈 솟아올랐다. 마티스가 그런 레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수도에서 형편이 좋지 않은 젊은 남녀들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늘었다더군.”
“치안대가 바티스타를 왕실 근위대에 넘겼을 테니, 근위대도 곧 인신매매단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지 않을까?”
오스칼의 기대 섞인 목소리에 마티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요즘 근위대 자식들 정신 상태를 생각해 보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걸. 피해자들은 그저 가난한 일개 평민들이니까.”
“마티스, 일단 네가 말했던 실종신고와 관련된 내용을 조사해 봐. 이교도가 엮여 조직적으로 노예거래를 하고 있다면 우리도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레오의 결연한 음성에 마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간 마티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실종된 청년들의 대부분은 빚을 지고 있거나, 시에나 뒷골목의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구하려 했던 자들이었다.
“아무래도 돈이 궁한 청년들을 꾀어낸 것 같더군. 물론 예상했던 것처럼 아직 근위대가 인신매매의 조사에 나섰다는 소식은 없어.”
기사단원들을 한자리에 모은 마티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조사한 내용을 설명했다.
“오스칼 형님이 했던 것처럼 저희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수상한 놈을 발견하면 한판 붙어볼까요?”
드미트리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걸걸한 목소리를 냈다.
“이럴 게 아니라 그 직업소개소 놈들을 족쳐보죠!”
이에 질세라 폴이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단원들은 이교도들이 약탈에 이어 인신매매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흥분한 청년들의 의견에 마티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턱을 쓰다듬었다.
“너희가 말한 방법은 몸통이 아니라 곁가지만 쳐내는 일이야.”
“마티스 말이 옳다.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야 해.”
레오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음지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놈들의 본거지를 무슨 수로 찾습니까?”
난감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 기욤을 바라보던 오스칼이 눈알을 굴렸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이교도의 본거지에 어떻게 잠입했더라…?
원작을 떠올려 낸 오스칼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있잖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마티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했다. 다른 청년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인신매매범을 잡으려면, 인신매매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지.”
“엥? 그게 무슨…. 음? 너 설마….”
의아함으로 가득했던 마티스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바뀌었다.
“내가 미끼가 될게.”
오스칼이 다부진 표정을 했다.
“안 돼.”
팔짱을 끼고 있던 레오가 더 듣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오스칼이 굽히지 않고 레오를 향해 눈을 또렷하게 떴다.
“하지만 그놈들 본거지를 찾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어. 밖으로 나온 몇 놈을 족쳐봐야 일개미 몇 마리를 죽이는 것밖에 안 된다고. 개미를 박멸하려면 개미 굴로 들어가 여왕개미를 잡아야지.”
“그래도 네가 직접 들어가는 건 안 돼.”
“그럼, 그 외에 다른 좋은 방법이 있어?”
오스칼의 질문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오스칼로선 오스칼 나름대로 이 임무에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무려 이교도의 꼬리를 잡아낼 기회였다.
이교도는 원작 〈오스칼〉에서 루이스터 대공과 함께 반란을 주도하던 세력이 아닌가. 그 세력에 대한 단서가 있다면 어쩌면 칼릭스 가문이 쓴 누명과 관련된 진실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이런 오스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레오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미끼가 될 사람이 너지?”
“우리 단원 중에 인신매매를 당할 사람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있다고 생각해?”
마티스가 청년들을 둘러보았다. 인신매매범들을 한 손으로 때려잡을 것 같은 건장한 녀석들이었다.
“확실히…. 아무도 안 건드릴 것 같긴 한데….”
“내가 미끼가 되어 그들을 따라가면, 너희가 뒤를 밟아서 본거지를 치면 돼.”
“위험부담이 너무 커. 임무 중에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다.”
레오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하다 하다 스스로를 인신매매의 미끼로 삼자고 하다니, 아무래도 오스칼 녀석은 제 속을 뒤집어 놓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음. 하지만 오스칼의 말도 일리가 있어. 이대로 두면 피해자는 계속 늘어날 거야. 거기다 오스칼도 겉보기와는 달리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니니까. 우리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으면 돼.”
오스칼이 제안한 황당한 작전에 이제 마티스까지 동조하기 시작했다. 레오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맞아. 나도 내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어.”
오스칼이 마티스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다른 단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형님이라면, 이교도 놈들을 찜쪄먹고도 남을 분이시지.”
“맞아, 위험한 건 형님이 아니라 형님을 상대할 이교도 놈들 아닐까?”
레오가 오스칼 편으로 기울고 있는 기사단의 분위기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이 작전을 반대하는 건 오직 그뿐인 듯했다.
“하지만 내가 분명 네게 스스로 위험에 빠지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네가 확실하게 날 지켜주면 되잖아.”
레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스칼이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는 그의 눈을 보며 또 방실방실 웃었다.
젠장, 왜 이 녀석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때만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녀석의 얘기에 홀라당 넘어갈 것 같아, 그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단원의 안전을 위협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
***
짙은 어둠 속, 신체 건장한 사내들이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몸을 구긴 채 어두운 골목을 지켜보던 레오는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인신매매단 소탕을 위한 기사단의 회의에서, 오스칼은 연신 그에게 웃어 보였다. 차라리 그 녀석이 떼를 썼다면 달라졌을까.
저를 달래듯 살살 웃는 오스칼의 모습에 레오는 자꾸 말이 꼬였다. 결국, 정신을 차려보니 오스칼을 미끼로 해 인신매매단을 끌어내자는 임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젠장.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레오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 녀석이 엮이면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게 그 녀석 뜻대로 되고 있었다.
덥수룩한 붉은 머리 가발과, 검은 뿔테 안경을 써 순진한 시골 소년 행세를 한 오스칼이 후미진 뒷골목의 직업소개소 앞에서 주뼛거렸다.
만일을 위해 제라드와 시몬이 다른 구직자로 위장해 직업소개소 내부로 따라붙었다.
‘후하 후하. 감정 몰입하자. 나는 돈이 없어 절박한 어수룩한 소년이다. 일자리가 간절하다.’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직업소개소의 문을 연 오스칼의 몸이 금세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주근깨가 잔뜩 난 관리인이 ‘넌 뭐야?’라는 듯한 눈빛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요. 제가 돈도 없고. 가족도. 없답니다. 하. 하. 하.”
제라드와 시몬이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오스칼의 연기에 당황해 아연실색한 표정을 하고 소곤거렸다.
“아니, 형님은 대체 왜 저러시는 겁니까?”
“저러면 납치하려다가도 수상해서 안 하겠다.”
관리인은 소년 같은 모습을 한 오스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체격이 작고 호리호리한 게 구매자의 수요에 알맞아 보였다. 그가 탐욕스러운 눈빛을 했다.
“뭐, 할 줄 아는 건 있고?”
“어. 특별히↘ 없는데요호↗?”
긴장감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미끼가 되겠다고 당당하게 나선 것 치고는 형편없는 연기력이었다.
“근데 당신 말투가 원래 그런가?”
관리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네에?!”
혹시라도 정체를 들켰을까 오스칼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 깜짝이야. 자네 왜 대답할 때 소리를 지르나?”
“괜찮아요? 많이. 놀랬죠? 하. 하. 하. 제가 일자리를 구하는 게 처음이라….”
오스칼이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관리인이 바보 같은 오스칼의 태도에 못마땅한 표정을 했지만 이내 고갯짓으로 자신을 따라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우람한 두 청년, 제라드와 시몬을 향해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자네들한테는 적당한 일자리가 없소. 이제 영업시간도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시게.”
과연 마티스가 조사한 대로, 이곳 소개소의 관리인은 인신매매단의 끄나풀인 모양이었다. 오스칼과 얼른 눈빛을 교환한 제라드와 시몬이 자리를 떠났다.
관리인은 오스칼을 데리고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골목 어귀로 향했다. 그 뒤를 기사단원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낡은 짐마차 앞에서 비쩍 마른 여자 하나가 가방을 들고 긴장한 표정을 한 채 서성이고 있었다. 오스칼과 소개소의 관리인이 마차 앞에 다다르자, 마차에서 험상궂은 남자가 훌쩍 뛰어내렸다.
“두 사람 다 일자리를 구하러 온 거지? 당신네들은 앞으로 부유한 상단주의 저택에서 사용인으로 일할 거요. 봉급도 높고 숙식도 제공되니까 행운인 줄 아쇼.”
‘행운 같은 소리 하네.’
오스칼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일할 사람의 자세한 이력도 물어보지 않고는 솔깃한 조건으로 일을 주겠다고 하다니, 누가 봐도 사기였다.
하지만 옆에 선 비쩍 마른 여자는 일자리가 간절했던 모양인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제안에도 감사한 듯 머리를 조아렸다.
“가, 감사합니다!”
“자, 올라타쇼들.”
남자가 두 사람에게 짐 마차에 올라탈 것을 권했다. 마차를 이용해 인신매매단의 본거지로 갈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마차에 올라타기 전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흘긋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나 잘 쫓아 오고 있는 거 맞지?’
고요한 골목 너머 어딘가 숨어 있을 단원들을 향해 눈짓한 오스칼이 몸을 돌렸다. 오스칼은 낮게 숨을 삼키곤 마차 위로 올랐다.
이교도들의 꼬리를 잡아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