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손수건을 찾아 돌아오겠다는 오스칼이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길이라도 잃은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고 있던 레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온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문득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식당 근처 골목 앞에 웅성대며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가 군중 사이를 비집고 골목 안을 내려다보았다.
적중한 예감에 그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저 무모한 녀석이 또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이미 모르는 남자와 한바탕 난투를 벌인 모습으로, 오스칼이 쓰러진 남자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이야, 이런 결투는 오랜만에 봤어.”
“저 청년 대단한데? 저 아가씨를 구하려고 싸운 거라며?”
레오는 단단히 화가 치밀었다. 왜 화가 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오스칼이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도 아닌데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골목 끝에 선 오스칼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에 몰려든 군중 탓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아 눈을 찡그렸다.
스릉-
익숙한 소리에 레오의 귀가 움찔거렸다. 그의 예민한 청각은 군중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검을 뽑는 위협적인 소리를 잡아냈다.
그가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골목 저편에 서 있던 남자가 칼을 빼 들고 오스칼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레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내 들었다.
“오스칼!”
그가 큰 소리로 오스칼의 이름을 불렀다. 외침과 동시에 날아간 그의 단검은 오스칼에게 덤벼들던 고일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커억.”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고일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꺄악.”
그 모습을 본 릴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고일의 기습에 뒤늦게 검을 뽑아 든 오스칼은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남자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레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검을 뽑느라 놓친 릴리안의 손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고일의 피로 물들었다.
“레오! 너였구….”
오스칼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레오의 가슴에 파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너란 녀석은 대체!”
레오가 쌕쌕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내뱉은 말이 그의 가슴을 타고 오스칼의 귓가에 닿았다. 그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쿵쿵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오스칼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기… 레오.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끝을 흐리던 오스칼의 손에 축축하게 젖은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레오의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비로소 오스칼을 품에서 떼어낸 레오의 귓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갑자기 왜 오스칼을 끌어안았는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 적이 남아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등을 보인다는 건 기사 실격이다.”
그가 머쓱하게 타박하는 말을 하고는 얼른 오스칼의 시선을 피해 쓰러진 남자를 살폈다.
레오가 던진 단도에 급소를 찔린 고일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시민의 신고로 부랴부랴 달려온 치안 대원은 릴리안을 포함한 군중들로부터 상황 설명을 듣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투를 거절하고 등 뒤에서 갑자기 공격했다고요? 거 참, 명예라고는 없는 놈이로구먼.”
라인하트에서 ‘결투’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결투의 결과에는 반드시 승복해야 했다.
따라서 목숨을 건 결투에서 승리한 당사자에게는 살인죄를 묻지 않았다. 물론 레오가 단검을 던져 오스칼을 구한 것은 정당방위로 인정되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젊은 청년이 아가씨를 구하러 나서고, 용감하구먼. 이 자는 왕실 근위대에 넘겨 처리하도록 하겠소.”
중년의 치안 대원이 조서에 자신의 서명을 휘갈겨 넣으며 껄껄 웃었다. 인신매매와 같은 중죄는 치안대가 아닌 왕실 근위대의 소관이었다.
치안 대원은 고일의 시체를 수거하고, 기절한 바티스타를 체포한 뒤 떠나버렸다.
한편, 릴리안은 그새 오스칼에게 반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연신 오스칼을 걱정하는 말을 하며, 치안 대원의 조사가 진행되는 내내 오스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지랖 넓은 군중의 일부는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떠들어 댔다.
“하하하, 아름다운 아가씨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스칼이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었다. 백마 탄 기사 노릇이 꽤 나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레오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다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지.”
레오가 낮은 목소리로 여전히 릴리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오스칼을 재촉했다. 그는 이미 골목을 빠져나와 저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앗! 잠깐만.”
레오를 쫓아가던 오스칼이 다시 허둥지둥 골목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굽혔다. 레오는 오스칼이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시 허리를 들어 올린 오스칼은 자신이 결투를 신청하며 바티스타에게 던졌던 손수건을 주워 레오에게 흔들어 보였다.
“네가 사준 손수건은 챙겨야지!”
오스칼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레오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가를 매만졌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흙 묻은 손수건을 탁탁 털고 곱게 접어 품에 넣은 오스칼이 우다다 뛰어 레오에게 달려왔다. 곧 두 사람은 골목을 벗어나 뤼미에르 가옥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넌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건가.”
“위험에 처한 아가씨를 구했잖아! 손수건도 찾았고. 당연히 신나는 일이지.”
“죽을 뻔하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 네 덕분에 살았어. 그놈이 그렇게 비겁하게 뒤에서 공격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전에도 말했지만, 실전에선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몰라. 규칙이나 정의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거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미숙하지.”
레오의 따끔한 말에 오스칼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시무룩해진 오스칼의 모습에 레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자칫 네가 위험해지는 게 문제란 거다. 그땐 어떻게 할 건가.”
그의 말에 오스칼이 씨익 웃었다.
“네가 구해주면 되지! 오늘처럼.”
천연덕스러운 오스칼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린 레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큼…내가 없을 땐 어쩌려고.”
“그럼 너랑 계속 붙어 있으면 되지!”
오스칼이 레오의 얼굴을 보며 방실방실 웃었다. 그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게 기분 좋았다. 오스칼의 해맑은 음성에 레오가 할 말을 잃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던가.”
레오가 한숨을 한번 쉬고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왠지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
텅 빈 골목 어귀, 반짝이는 금사로 수를 놓은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곁에는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함께였다.
그 초라한 골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분명, 그 마드모아젤이었어….”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의 풍성한 금발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주인님, 보시다시피 여긴 아무도 없습니다만….”
노신사가 자신의 안경을 추켜올리며 품위 있지만 은근한 항의의 어조가 담긴 목소리를 냈다.
“알랭! 분명 아까 마차 안에서 본 뒤통수는 그 마드모아젤이었다고!”
그가 몇 분 전 목격한 장면을 떠올렸다.
최근에서야 몸이 온전히 회복된 그는, 사업 파트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따분한 표정으로 마차 시트에 기대어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그의 눈에 낯익은 갈색의 뒤통수가 들어왔다.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얼기설기 단검으로 베어낸 그 머리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목이 한껏 돌아갔다.
“알랭! 알랭! 당장 마차를 좀 세우게! 아니, 뒤로 돌아가세.”
“여기서요? 여긴 일방통행 길입니다만?”
“그럼 일단 세워! 내려야겠어.”
그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알랭이 다급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나이가 들어 삐걱거리는 알랭의 관절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토록 힘겹게 쫓아 왔건만, 텅 빈 골목을 바라보며 마드모아젤 타령을 하는 금발 남자의 우격다짐에 알랭의 이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여전히 후들거리는 무릎을 참아내며, 그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뒤…통수라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지요.”
정면도 아니고, 고작 뒤통수가 닮았다고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마차까지 세워 이 야단법석을 떨었다고요?
심호흡을 해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가라앉힌 알랭은 골목 근처에서 좌판을 놓고 사과를 팔고 있던 중년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아까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여기서 결투가 있어서 남자 하나가 실려 나갔다우. 청년 둘이 여자 하나를 두고 겨루더구먼요.”
“청년? 분명, 청년들이라 했지?”
“예예, 우락부락한 남자 하나랑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였어요.”
“결투의 원인이었다는 여자는 혹시 귀족이었나?”
“예? 그럴 리가요. 릴리안이라고, 저 근방 빵집에서 일하는 아가씨예요. 아버지가 술주정뱅이 노름꾼이라 했던가….”
여자의 말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알랭이, 제 주인을 향해 의기양양한 눈빛을 했다.
“주인님, 들으셨죠? 여기에 말씀하신 ‘마드모아젤’ 같은 것은 없었답니다.”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주인님, 제가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영애는 없어요. 분명 살롱의 폭발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겁니다.”
알랭은 자신의 주인을 타이르듯 달랬다. 어쩐지 그 목소리에서 진절머리를 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집사 ‘알랭 도비에’는 최근 그의 수십 년 집사 인생에서 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었다. 제 주인께서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롱의 테러 때문에 과다 출혈로 혼절했다 깨어난 이후, 제 주인은 병석에 누워있는 내내 알랭을 들들 볶아댔다. 생명의 은인을 이름도 제대로 묻지 않은 채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있던 귀족 영애의 얼굴을 반드시 기억해 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처음에 알랭은 제 주인이 팔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가 비록 나이가 들긴 했지만, 여전히 기억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날 제 주인 옆에 누군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귀족 영애는 단연코 아니었다. 웬 남루한 청년이라면 몰라도.
알랭이 귀족 영애의 존재에 대해서 조금도 기억해 내지 못하자, 급기야 그의 주인은 수도에 거주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쯤 되는 귀족 영애를 모두 조사하라 지시했다.
특히 그들 중, 최근에 머리가 짧아진 영애나 검술을 배운 영애가 없는지를 확인하라 일렀다.
알랭이 수도의 귀족 영애들을 샅샅이 찾아 헤맸지만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영애는 물론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그는 그런 영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귀족 영애가 검술을 배운다는 얘기는 태어나 들어본 적조차 없었으며, 짧은 머리는 평민 아낙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틀림없이 제 주인은 살롱에서 머리를 다친 게 분명했다.
“자네 지금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는 건가?”
주인의 물음에 ‘네’라고 말하고 싶어 알랭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이내 이성이 그를 만류했다.
“그…럴 리가요. 주인님이야말로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와 냉철한 이성을 가진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전에도 보고 드렸다시피, 말씀하신 조건의 영애는 수도를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
“그래! 내 정신은 멀쩡하다니까? 아무래도 직접 찾아야겠어. 알랭, 수도에 있는 귀족 영애들 초상화를 모두 구해다 줘. 내가 얼굴을 전부 확인하지.”
“예에? 예에….”
알랭이 혼이 나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로써, 알랭 도비에는 이번 주에도 야근 확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