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18)화 (18/138)

18화



 

“뭐?”

“세상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손님.”

거울 앞에서 다양한 옷들을 제 몸에 요리조리 대어보며 무엇을 살까 고민하던 오스칼이 화들짝 놀라 레오를 돌아보았다.

골라둔 옷 전부를 주문하겠다는 레오의 말에 가게 주인의 입이 벌어져 귀에 걸렸다.

오스칼이 멍한 표정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나 이거 알아. 어디서 봤어.’

‘남성복’ 의류 매장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만 빼면, 재벌 남주 클리셰잖아 이거.

“레오, 잠깐! 흥분하지 말고 침착해. 우리, 이러면 안 되잖아?”

오스칼이 허겁지겁 그에게 현실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 지금 가난해.

멋있는 척, 값을 치르려던 레오의 손이 흠칫 멈추었다. 그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잠깐 갈등했다.

이 정도쯤이야 새로 장만하려고 했던 자신의 투구를 포기하면 될 것이었다. 그래, 헌 투구는 닦아서 쓰면 된다.

“네가 옷 가게에선 걸려있는 옷을 모두 사는 게 멋있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너…. 관심 없는 척하더니 내가 제라드한테 하는 말 다 듣고 있었구나?”

예상치 못했던 레오의 대답에 오스칼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는 오스칼이 어제 제라드에게 늘어놓았던 ‘소설 속 매력적인 남주의 덕목이란’ 주제의 일장 연설을 은근히 경청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네게 이 정도 물건을 사줄 돈은 있어.”

그가 의연한 얼굴로 주인에게 돈을 건넸다.

“와. 레오 너 방금 엄청 멋있었어.”

그의 과감한 소비에 오스칼이 엄지를 척 내어 보였다.

“흠흠. 네가 너무 남루한 몰골로 다니면 사람들이 우리 기사단을 뭐로 생각하겠나.”

오스칼에게 멋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쑥스러운 듯 레오는 괜히 툴툴거렸다.

“역시 넌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녀석이야.”

솔직하지 못한 레오를 타박하는 오스칼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

다시 한번 말하자면, 오늘은 오스칼이 빙의하게 된 이후 가장 완벽한 날이었다.

수도의 번화가를 구경하고, 새 옷을 잔뜩 샀으며,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외식까지 하게 되었다.

번화가에서 꽤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먹는 돼지고기 요리는 과연 소문대로 맛있었다. 오스칼은 두툼한 고기를 썰어 입에 넣으며, 연신 신이나 재잘거렸다.

레오는 제 앞에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오스칼의 모습에 묘한 흐뭇함을 느꼈다. 제라드를 대할 때보다 두 배는 말이 많아 보였으니까.

레오는 행복한 표정으로 요리를 먹어치우는 오스칼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주문한 닭고기를 오스칼에게 덜어주었다.

“레오…. 너 정말 좋은 녀석이었구나.”

접시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닭 다리를 본 오스칼이 깊이 감동한 눈빛을 했다. 즐거운 식사시간이었다. 오스칼이 잔뜩 부른 배를 한 손으로 통통 두들겼다.

“여기 소스가 묻었는데.”

레오가 검지로 오스칼의 입가를 가리켰다. 오스칼이 얼른 테이블 위에 놓인 은제 숟가락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살피고는 재킷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찾았다.

주머니를 한참 뒤적이던 오스칼이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아까 옷 사면서 함께 산 손수건이 없어졌어!”

“어디 두고 온 건 아닌가.”

레오의 말에 오스칼의 녹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초조한 표정으로 기억을 되짚던 오스칼이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까 들른 무기점에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는 거기에 놓고 왔나 봐. 얼른 다녀올게!”

오스칼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오스칼! 그냥 같이…!”

레오의 말이 허무하게 공중에 흩어졌다. 고작 손수건 하나일 뿐인데, 그새 사라졌을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냥 식사 끝나고 같이 가지….”

홀로 남은 레오가 중얼거렸다.

***

엷은 갈색 머리카락이 아래위로 나풀거렸다. 전속력으로 골목 두 개쯤을 지나쳐 달려간 오스칼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찾았다!”

고이 접힌 라벤더색 손수건은 무기점에서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초조한 듯 구겨져 있던 오스칼의 눈썹이 매끈하게 일자로 펴졌다.

“휴, 하마터면 레오에게 선물 받은 걸 하루 만에 잃어버릴 뻔했네.”

오스칼이 안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손수건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잰걸음으로 레오가 기다리고 있을 식당으로 향하던 오스칼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험악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이봐, 아가씨. 돈을 빌렸으면 제때 갚아야지.”

“빌린 돈은 200골드뿐인데, 6개월 만에 200골드가 3000골드가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이미 1000골드나 갚았잖아요.”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위협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가냘픈 여자는 겁에 질린 채 울먹이고 있었다.

험상궂은 남자들의 말투나 행동을 보아하니 악질적인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들인 것 같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오스칼이, 식당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고 골목 안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 아버지가 그렇게 계약을 하고 돈을 꾸어 갔는데 어쩌나?”

멸치같이 생긴 남자가 품 안에서 차용증을 꺼내 흔들었다.

“갚을 방도가 없으면 몸으로라도 갚지 그래. 2000골드에 아가씨를 사줄 테니까.”

썩은 무같이 생긴 남자가 음흉하게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두 남자는 단춧구멍만 한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위협적인 시선에 잔뜩 굳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와.”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스칼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고리대금업에 인신매매까지?

정의로운 K-영혼의 피가 들끓었다.

남자 놈들이 연약한 여인을 상대로 협박이라니. 역시 저런 빌어먹을 정도로 뻔한 악당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주먹.”

오스칼이 검을 빼 들며 중얼거렸다.

***

오스칼이 골목 안으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새로 산 남색 재킷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세 분이 그리 정다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골목 어귀에서 들려오는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두 남자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앳된 청년의 모습에 남자들이 코웃음을 쳤다.

“어이, 형씨. 쓸데없는 참견 말고 그냥 가던 길이나 마저 가지.”

멸치같이 생긴 남자는 오스칼의 손끝에서 빛나는 검을 가소로운 듯 일별하고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그의 허리춤에 찬 칼을 꺼내 보였다.

“그냥 지나치기엔, 내가 아름다운 아가씨가 곤경에 빠진 꼴을 못 보는 성격이라.”

오스칼이 빙긋 웃었다. 오스칼의 여유 있는 태도에 남자들이 눈을 부라렸다.

“이런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놈을 봤나. 너도 이 여자랑 같이 노예로 팔리고 싶나 보구나.”

노예매매라.

오스칼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라인하트 왕국은 노예를 사고파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노예거래상을 일망타진한 줄 알았더니, 여전히 암암리에 불법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어때? 당신들도 검이 있으니, 검을 겨뤄서 당신들이 이기면 날 팔아주지. 하지만 내가 이기면 그 차용증을 내놓는 거야.”

오스칼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품에 넣은 손수건을 던져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그 눈빛에 움찔한 남자가 애써 호기로운 목소리를 내며 칼을 빼 들었다.

“노예가 될 놈이 제 발로 굴러들어오는구나. 후회하지 마라!”

마주 선 칼날이 예리하게 빛을 뿜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여자가 웅크리고 오들오들 떨었다.

채앵-

날카로운 쇠붙이가 맞부딪쳤다.

몇 합이 오간 이후, 남자는 압도적인 기량 차이에 크게 당황했다.

그의 이름은 바티스타. 나름 뒷골목에서는 칼을 좀 쓴다고 하는 작자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마치 어린아이처럼 농락당하고 있었다.

상대는 바티스타의 검이 어디를 향할지를 미리 알고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를 죽일 생각이 없는지 급소를 교묘하게 피해가며, 허벅지나 팔 만을 스치듯 베고 있었다.

한낮의 골목에서 두 남자가 검을 겨루고 있는 장면을 본 행인들이 슬그머니 하나둘 모여들었다. 조금 전, 여자를 위협하는 두 남자가 선 골목길의 풍경에는 관심 없던 행인들이었다.

여자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구경꾼들은 두 남자의 결투를 유희 거리 삼아 키득거릴 뿐이었다.

오스칼이 모여든 구경꾼들에게 흘긋 눈길을 주었다. 모든 것이 오스칼의 계산대로였지만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모으려면 싸움 구경만 한 게 없지.’

암살자도 아닌 자들을 대낮의 길거리에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정식으로 결투를 벌여 사람들을 모으면 증인이 생긴다.

게다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구경꾼들이 치안대를 부를 것이었다. 그러면 이 남자들의 인신매매 범죄까지 밝혀낼 수 있었다.

오스칼이 남자의 칼끝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좇았다. 남자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검은 오스칼을 상대로 제대로 된 공격도 한번 하지 못했다.

오스칼이 섬세하고 유려한 기술로 바티스타의 검을 유린할 때마다 그는 바짝 약이 올라 자신의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점점 지쳐 갈 뿐이었다. 남자의 얼굴과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때쯤, 오스칼이 날카롭게 그의 칼을 쳐냈다.

꽝-

나동그라진 바티스타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기절해 버렸다.

“이야!”

“대단한데?”

“이런 결투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구경꾼들의 탄성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두 사람의 결투를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썩은 무같이 생긴 남자, 고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보다 훨씬 검을 잘 다루는 바티스타가 단숨에 나자빠졌다.

바티스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청년의 기세를 보자 두려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스칼이 그를 차갑게 응시했다.

“당신도 내게 덤빌 건가?”

검을 쥔 고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관중들의 야유 소리가 들렸다. 고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오스칼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바티스타에게 다가가 그의 조끼 주머니에 꽂혀있는 차용증을 빼 들었다.

“그럼 결투의 조건대로 이건 내가 가져도 되겠지.”

오스칼이 고일을 향해 차용증을 흔들어 보이고는,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건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오스칼이 차용증을 절반으로 찢어 품에 넣었다. 눈물 젖은 여자의 얼굴에서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름다운 마드모아젤을 지키는 건 기사의 본분이지요.”

짐짓 멋있는 척 대사를 내뱉은 오스칼이 내적 비명을 질렀다. 나, 너무 멋있는 거 아냐?!

그 말에 여자의 볼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오스칼의 이마가 땀에 젖은 것을 본 여자가 수줍게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전 릴리안이라고 해요.”

“감사합니다. 릴리안.”

오스칼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싱긋 웃자 릴리안의 눈이 황홀한 듯 몽롱해졌다.

고일이 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절박한 이들에게 돈을 꾸어주고, 감당할 수 없는 이자를 물어 돈이 될 만한 사람을 빚 대신 팔아치우는 것은 그가 소속된 인신매매단의 수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릴리안은 거기에 딱 들어맞는 아가씨였다.

그런데 그의 계획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저 애송이 때문에!

심지어 바티스타를 만신창이로 만든 애송이는 눈앞에서 백마 탄 기사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 고일의 눈이 비열하게 빛났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결투에서 승리해 공주님을 구한 기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악당의 기습에 죽는다는 결말은 어떨까?

고일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칼을 쥐고 오스칼의 등 뒤를 향해 내달렸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오스칼이 칼을 든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운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뒷덜미에서 한기가 들었다. 등 뒤에서 번쩍- 날붙이가 햇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오스칼!”

멀리서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꺄악!”

릴리안의 비명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땅에 떨어진 그녀의 손수건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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