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오스칼이 자신을 배금주의자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주인공의 인생을 가시밭길로 만든 흑막을 응징하고, 그의 행복을 찾아 준 뒤 이 소설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필요했다.
“돈! 돈이 필요해!”
오스칼이 간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돈 나올 구멍 없나….
특별 훈련의 둘째 날, 오전 훈련을 마친 후 쉬고 있던 오스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돈이 없어 여분의 텐트를 사지 못했다는 마티스의 말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빙의물의 네 번째 법칙. 돈을 벌어 성공하고 싶으면, 나만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하라.〉
“하아…….”
빙의물의 법칙을 떠올린 오스칼은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소설에서 별의별 TMI를 남발하던 작가가, 하필이면 돈 될 만한 정보는 원작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운 좋은 빙의자들은 원작에 나왔던 다이아몬드 광산 같은 치트키로 돈다발부터 쌓아놓고 시작하던데, 역시〈여스칼〉은 빙의 난이도 극악인 소설이 확실했다.
오스칼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소설만 탓할 일은 아니었다.
소설에서 돈 될 만한 걸 못 찾은 빙의자들은 치킨도 팔고 패션 · 뷰티 사업을 일으켜서 성공하던데, 자신은 요리도 미용도 젬병이었다.
할 줄 아는 건 펜싱과 웹소설 읽기밖에 없었던 현생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오스칼의 눈에 어딘가에 열중한 제라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스칼이 그를 향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제라드 넌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그는 쉬는 시간이면 수첩을 꺼내 뭔가를 끄적거리곤 했다.
“아, 제가 사실 어릴 적부터 작가가 꿈이었거든요. 나중에라도 제 이름으로 책을 내보고 싶어서 재밌는 소재가 떠오를 때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느닷없이 오스칼에게 자신의 꿈을 공개하게 된 것이 쑥스러웠던지, 제라드가 얼굴을 붉히며 목덜미를 쓸었다. 그의 대답에 오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
“책? 어떤 책을 쓰고 싶은데?”
“연애 소설입니다. 다들 사나이가 무슨 로맨스 소설이냐고 질색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만물의 근원은 사랑이니까요!”
어라? 이거 잘하면…? 오스칼의 눈이 먹잇감을 찾은 하이에나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글을 안 써?”
“사실 틈틈이 소재를 떠올리긴 하지만 이렇다 할 건 못 찾아서, 혼자 끄적거리는 정도입니다. 제가 상상력이 좀 부족한가 봐요.”
제라드가 괜히 창피한 듯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오스칼의 귓가에서는 풍악이 울리고 있었다.
“찾았다, 내 다이아몬드 광산!”
오스칼이 제라드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
특별 야외 훈련에서 돌아온 이후 오스칼은 최근 온종일 제라드와 붙어 있었다.
“예에? 국왕이 정부를 들이자 왕비가 이혼하고 옆 나라 국왕이랑 재혼을 한다고요?”
“맞아, 끝내주는 소재지?”
“거기다 죽은 줄 알았던 공작부인이 눈 밑에 점을 찍고 나타나 바람 난 공작에게 복수를요?”
“그래. 이것도 정말 대박 소재야.”
“꽃같이 아름다운 네 명의 귀족 공자들과 잡초 같은 평민 아가씨가 아카데미에서 사랑을 하고요.”
“응, 평민 아가씨는 그중 가장 지체 높은 공작 가의 아들과 결국 잘되는 거지.”
“우와!”
“거기 두 사람, 너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응접실에 앉아 투구를 손질하고 있던 레오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무기 손질을 특별히 정숙한 분위기에서 할 필요도 없었건만, 두 사람이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다정하게 하하 호호 떠들고 있는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요 몇 주간 제라드는 기사단의 훈련이 없는 날에도 뻔질나게 뤼미에르 가옥에 드나들었다.
종일 오스칼 옆에 붙어 앉아 무슨 신나는 이야기를 하는지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가 깔깔거렸다가 하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그간 아침저녁으로 틈만 나면 성가실 정도로 제 옆에 와서 조잘조잘 떠들어댈 땐 언제고 저렇게 태세를 전환하다니.
레오는 그를 완전히 팽개쳐 둔 채 온통 제라드에게만 정신을 쏟고 있는 오스칼의 모습이 어쩐지 괘씸했다.
저 녀석은 누구든 제 얘길 들어 줄 사람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거였나?
그제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오를 발견한 제라드가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더니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시정하겠습니다.”
바짝 군기가 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제라드가 상기된 목소리로 레오를 향해 변명을 덧붙였다.
“오스칼 형님이 해주시는 이야기가 전부 다 엄청난 것이어서 말입니다.”
제라드의 찬사에 오스칼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그건 전부 내가 있던 세계에서 전설적인 히트 작품들이니까.’
“그러니까 넌 내가 알려 주는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오기만 하면 돼. 알았지?”
오스칼의 당부에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검증된 온갖 흥미진진한 스토리들을 글로 구현해 줄 작가를 찾아, 이 세계에서 책을 출판해 돈을 번다. 이것이 오스칼의 아이디어였다.
자극적인 양념이 팍팍 들어간 로맨스 소설이란 어느 세계에서도 인기 있는 법이다.
오스칼의 말을 듣던 제라드가 살며시 레오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평소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세 개나 잡혀있었다.
단장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제라드는 얼른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단장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라드가 각 잡힌 자세로 레오를 향해 인사하고는 기사단을 떠났다. 오스칼은 떠나는 제라드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도 내내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제라드를 보니 아무래도 이 사업, 꽤 성공할지도 몰랐다. 왜인지 드는 확신에 오스칼은 더욱 히쭉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나?”
오스칼을 향한 레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퉁명스럽게 들렸다.
“제라드에게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 이게 다, 기사단을 위해서야. 제라드가 쓴 소설을 팔아서 기사단의 자금을 댈 거라고.”
오스칼이 너처럼 재미없는 녀석은 진정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듯, 레오를 향해 검지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까딱이는 오스칼의 손가락 아래로 문득, 레오의 시선이 머물렀다. 오스칼의 옷소매가 다 헤어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오스칼이 이 집에 온 첫날, 작아진 자신의 옷을 두어 벌 건넨 이후로 오스칼은 항상 그 차림으로만 다녔다.
오스칼이 입고 있는 자신의 오래된 흰 셔츠는 어느새 소매며 옷깃이 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동안 내가 준 옷만 계속 입었던 건가?”
“응. 딱히 불편한 것도 없고. 옷을 살 돈도 기회도 없었으니까?”
오스칼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간 자신이 오스칼에게 너무 무심했나 싶었다.
“오늘은 같이 시에나에 나가는 것으로 하지.”
그의 뜬금없는 제안에 오스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시에나의 번화가에서 오스칼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빙의한 후 이런 신나는 장소를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오스칼이 방문했던 곳은 주로 폐허가 된 살롱, 저주받은 숲,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절벽, 그리고 수상쩍은 정보상의 음침한 건물 같은 곳들이었으니까.
오스칼은 마치 서울에 온 시골 쥐처럼 입을 헤- 벌리고 눈알을 굴려 시내를 구경하기 바빴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거리는 어느 하나라도 놓치기 싫을 정도로 예뻤다.
이런 광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레오를 뒷전으로 하고, 오스칼은 이리저리 쏘다니며 거리의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우와 끝내준다.”
오스칼이 말린 과일을 넣어 만든 앙증맞은 동물 모양의 쿠키들과 핑크빛 버터크림 아이싱이 잔뜩 올라간 고상한 케이크가 전시된 사랑스러운 베이커리의 쇼윈도 앞에 붙어 서서 군침을 삼켰다.
그런 오스칼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느덧 자신의 목적지 앞에 다다른 레오가 오스칼의 이름을 불렀다.
“오스칼, 한눈팔지 말고 이리 와 봐.”
아, 오늘 하루 중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인데….
아쉬운 표정으로 베이커리의 진열장에서 떨어진 오스칼이 종종걸음으로 레오에게 달려갔다.
“뭔데?”
레오가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의 가게를 가리켰다. 오스칼이 레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여, 상점의 간판을 확인했다.
‘킹×맨 남성 의류 전문점’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은 기사의 덕목 중 하나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조금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낡은 옷만 입고 있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는 말을 하기란 쑥스러운 일이었다.
“설마, 오늘 내 옷을 사러 시내로 나온 거야?”
“그래.”
“우와. 어쩐 일이래?”
뜻밖의 횡재에 오스칼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스칼은 신이 나, 가게 앞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라 힘 있게 아치 모양의 가게 문을 밀었다.
“어서오십쇼!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의류점 안에서는 콧수염이 난 인상 좋은 주인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주인장이 입은 재킷 호주머니에는 줄자니, 가위니 하는 것들이 잔뜩 꽂혀있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묻고는 눈대중으로 오스칼의 치수를 가늠했다.
“이것들은 어떠십니까.”
주인장이 권하는 말끔한 기성복을 본 오스칼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점원의 안내에 따라 탈의실로 들어간 오스칼이 회색 줄무늬 바지와 흰색 셔츠를 얼른 입어보았다.
주인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던지, 그가 골라 준 옷은 오스칼의 몸에 꽤 잘 맞았다.
“어때? 역시 외모가 받쳐 주니까 뭘 입어도 잘 소화하는 것 같지?”
오스칼이 좁은 탈의실의 문을 열고 나오며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그 너스레에 레오는 픽 웃고 말았다.
“이제 좀 봐 줄 만한 거 같기는 하군.”
적당히 칭찬의 말을 건넨 레오는 진열된 옷들 사이로 눈을 돌려 오스칼의 피부색과 어울릴 법한 바지 두 벌과 셔츠 네 벌을 빠르게 골라냈다.
수북한 옷더미를 건네받은 오스칼이 다시 한번 탈의실로 향했다.
오스칼이 나머지 옷을 입어보는 동안 레오가 재킷을 살피기 시작했다. 곧 가을이었다.
심사숙고하여 고른 질 좋은 남색 코트를 의류점 주인에게 건네자, 주인은 얼른 탈의실에서 나오는 오스칼에게 그 재킷을 입혀 주었다. 제대로 새 옷을 갖춰 입은 오스칼의 모습이 멀끔했다.
“아유, 미남이신 데다 군살도 없으셔서 나무랄 데가 없네요. 동네 아가씨들이 죄다 반하겠습니다. 하하하!”
주인장은 진심인지 영업용 멘트인지 모를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았다.
“역시 그렇죠? 하하하.”
주인의 칭찬에 우쭐해진 오스칼이 연신 옷을 갈아 입어가며 멋진 척,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다 비슷한 옷인데도 매번 레오에게 감상을 물어대는 통에, 레오는 없는 말주변으로 무슨 말이든 해주느라 진땀을 뺐다. 옷 하나를 사는데도 참 시끌벅적한 녀석이었다.
새 옷을 차려입은 오스칼은 헌 옷을 걸친 꾀죄죄한 몰골로 있을 때와는 딴판으로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땐, 영락없이 비실비실한 소년처럼 보이던 오스칼은 이제 근육이 붙어 제법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간 매일같이 어마어마한 식사량을 소화하고, 근력 훈련을 한 보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예예, 모두 잘 어울리십니다. 그럼 어떤 거로 주문하시겠습니까?”
“난 두 번째에 입어본 게 가장 마음에 드는데, 레오 네 생각은 어때?”
오스칼이 도톰한 남색 바지와 파스텔 톤의 하늘빛 셔츠를 들어 올렸다. 오스칼의 질문에 레오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