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레오가 자리를 떠나자, 기욤이 부리나케 약 상자를 가져왔다.
“형님! 옷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치료를 해드리겠습니다.”
“어? 아, 아니야. 여긴 내가 할게. 이따 약이랑 붕대만 줘.”
오스칼이 자신의 상의를 들어 올리려는 기욤을 향해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까진 손바닥만을 그에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저 때문에 이렇게 다치시고…. 단장님께 꾸중을 듣게 해서요.”
오스칼이 풀 죽은 기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아냐. 이 정도면 약을 바르면 금방 나을걸?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네가 날 치료해 줬었는데. 네가 솜씨가 좋은가 봐. 약을 바르고 난 뒤에 상처가 금방 나았거든.”
오스칼의 따뜻한 칭찬에 기욤이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집안에서 만든 상처 치료제입니다. 집안 대대로 약방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이 녀석 집안이 후시다인 가문입니다. 평민들 사이에서 꽤 명성 있는 약방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드미트리가 끼어들었다.
아. 어쩐지 단원들이 상처를 치료할 때 기욤만 찾는다 했다. 역시 상처엔 후시다인이지.
오스칼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형님, 반응 속도가 대단하시던데요!”
“위에서 지켜보다가 제 심장이 다 쪼그라드는 줄 알았습니다.”
“전에 단장님과의 대련에서도 느꼈지만, 순발력이 대단하십니다.”
어느새 옹기종기 오스칼의 옆에 몰려든 청년들이, 절벽에서 민첩하게 기욤을 구해 낸 오스칼을 향해 칭찬을 쏟아냈다.
“자, 다들 그만 대열을 정비하고 숙영 준비를 하지.”
마티스가 잡담하던 청년들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단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티스는 능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거기 너희들은 막사를 설치해. 그리고 드미트리, 폴, 시몬은 무기 손질을 한다. 거기 두 사람은 날 따라와 보초를 서도록. 물과 식량을 나르는 건 기욤과 제라드가 맡아. 이상.”
귀를 쫑긋 세우고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오스칼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마티스, 내가 할 일이 빠졌어!”
“넌 부상으로 힘쓰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 저녁 먹을 때까지 쉬고 있도록 해.”
“나 괜찮은데. 이 정도 부상으론 끄떡없어. 나도 도울게. 막사 설치를 하면 돼?”
그러자 청년들이 의욕을 불태우는 오스칼을 앞다투어 만류했다.
“안 됩니다, 형님. 쉬고 계세요.”
“예예. 형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앉아 계시면 됩니다. 제가 형님 몫까지 다 하겠습니다.”
“오스칼, 들었지? 넌 그냥 쉬면 돼. 자, 다들 얼른 움직이자고.”
“아니 나도 밥값은 해야….”
마티스가 싱긋 한번 웃고는, 오스칼의 말을 못 들은 척 멀리 사라져버렸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혼자만 쉬고 있는 것은 영 불편한 일이었다.
오스칼은 안절부절못하고 청년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뭐라도 도우려 애썼다. 하지만 청년들은 철통같은 방어태세로 오스칼에게 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허. 이런 건 제가 들면 됩니다.”
“형님이 있어야 할 곳은 저기입니다.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자, 이건 이미 다됐죠? 여기 형님이 더 도와주실 일은 없습니다.”
결국, 청년들의 일터에서 쫓겨난 오스칼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마티스를 붙잡았다.
“정말 나 뭐 도울 거 없어? 다들 바쁘잖아.”
“하여간 오지랖은….”
마티스가 오스칼을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다들 날 환자 취급하니까 그렇지!”
“으이그. 다들 널 걱정하는 거다.”
마티스가 오스칼의 이마를 검지로 콕 찍었다. 그리고는 눈을 굴려 뭔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정 그러면 가서 요리라도 해.”
“뭐…. 뭐? 요리?”
오스칼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재료도 다 있고, 딱히 힘쓸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너도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마티스는 그 말을 남기고는 바쁜 듯 자리를 떠나 버렸다.
엉겁결에 저녁 담당이 되어 버린 오스칼이 막사 앞의 취사도구 앞에 오도카니 섰다. 그리고 멍하니 눈앞에 쌓인 재료와 텅 빈 냄비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냥 힘을 쓰게 해줘….”
오스칼이 울상을 짓고 중얼거렸다.
***
빙의 후 맞이한 최대의 위기였다.
21세기의 ‘전기 인덕션형’ 인간 오스칼에게 맨바닥에서 불을 피울 재주라곤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태어나서 직접 만들어본 음식이라고는 라면이 전부였다.
학교 다닐 땐 급식, 선수촌에서는 배식만 받으며 살아온 오스칼은 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레오가 이걸 이렇게 했던가……?”
검은 숲에서 불을 피우던 레오의 모습을 떠올린 오스칼이 부싯돌과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꼼지락거려보았다. 하지만 손만 지저분해질 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젠장, 불 피우는 일이 무장괴한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줄이야.’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말도 안 되는 도구들로 불을 붙이느라 한참 씨름을 하던 오스칼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눈앞의 인기척에 오스칼이 얼굴을 들어 올리자 레오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건가?”
레오의 물음에 오스칼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조금 전의 일 때문이더라도 레오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붙일 줄은 몰랐다.
잠깐의 침묵 뒤로 오스칼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불을 붙이는 중이었어.”
“그런데…?”
“잘…. 안돼….”
오스칼이 아까 화를 내고 가버린 레오가 서먹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레오가 오스칼의 상태를 슬쩍 살폈다. 붕대를 감은 오스칼의 손바닥은 까마귀가 울고 갈 만큼 새카매져 있었지만, 쌓인 장작 근처엔 불씨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지금까지 한 번도 불을 피워 본 적이 없는 건가?”
“응….”
“넌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살았길래 불도 못 피우는 건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었다. 레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오스칼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찬찬히 불 피우는 법을 보여 주었다. 오스칼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를 따라 해 보았다.
“이…이렇게?”
오스칼이 부싯돌을 문지르자 불꽃 비슷한 게 튀는 듯도 했다. 좀처럼 재능이 없어 보이는 오스칼을 향해 레오가 끈기 있게 처음부터 다시 방법을 알려주었다.
타닥-타닥-
그의 손길이 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적당한 크기의 불길이 일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불붙이는 일이 해결되자, 문득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오른 듯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민망한 듯 눈만 깜빡거리던 오스칼이, 머쓱한 듯 손가락으로 코끝을 쓱 문질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오였다.
“그…. 아까 암벽 훈련 뒤에 네게 화를 낸 건 미안하다…. 네가 자꾸 다치는 게…. 크흠. 거, 걱정되기도 하고….”
걱정? 그의 말에 오스칼이 눈을 깜빡이며 계속해서 말을 잇는 레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듣는 것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심산이었다.
“그래서… 푸흡.”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를 하던 레오가, 자신을 향한 오스칼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스칼의 얼굴이 재투성이였다. 검댕이 묻은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른 탓에, 콧잔등이 새카맣게 된 오스칼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코끝만 까맣게 된 것이 작은 동물 같기도 했다.
그의 웃음소리에 오스칼이 영문을 몰라 눈을 굴렸다. 눈치껏 제 얼굴에 뭔가 묻었다는 걸 알아챈 오스칼이 허리춤의 단도를 꺼내 검날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끙.”
오스칼이 작게 탄식하고는 옷소매로 얼굴을 문질러 검댕을 닦았다.
하지만 더러워진 소매로 문지른 얼굴은 점점 더 엉망이 되었다. 그 모습에 레오가 숨을 죽이고 웃었다.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웃지만 말고 좀 도와줘.”
오스칼이 볼멘소리를 했다.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 녀석이….
레오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오스칼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깨끗한 손수건이 거뭇거뭇해지자 오스칼의 얼굴이 제법 깨끗해졌다.
“여기도.”
입꼬리를 올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오가 깨끗한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오스칼의 뺨에서 미처 다 지워지지 않은 잿가루를 쓱쓱 털어주었다.
“고마워.”
오스칼이 민망한 듯 뺨을 긁었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이 누그러진 듯 분위기가 풀어졌다.
레오가 오스칼의 머리를 한번 쓱쓱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스칼 앞에 놓인 묵직한 냄비를 번쩍 들어 불 위에 올려놓았다.
“너무 무리하진 마.”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첫 번째 난관을 해결하기가 무섭게 두 번째 난관이 찾아왔다.
냄비의 물이 데워지는 동안 쌓여있던 재료를 대강 썰어낸 오스칼이 펄펄 끓는 물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음, 이걸 이렇게 해서 이렇게 넣는 건가?”
오스칼이 제멋대로 깍둑썰기 된 야채와 고기를 냄비로 밀어 넣었다.
“이게 양념이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향신료를 냄비에 한 주먹 털어 넣은 오스칼이 국자로 냄비를 휘휘 저었다. 멀리서 레오가 다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 됐으면 냄비는 내가 옮길 테니 넌 접시를 챙기도…록?”
아무래도 수프가 가득 담긴 냄비가 오스칼에게 무거울 것 같아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 레오는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혀 굳어버리고 말았다.
뭔가 수상한 것이 냄비에서 연성 되고 있었다.
“너….”
레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흑마법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음식, 아니 물질이었다.
“어…. 이거 냄새가 좀 그런…가?”
오스칼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코를 벌름거렸다.
냄새도 문제였지만, 비주얼도 그리 호감 가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레오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검술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멀리서 하루 종일 고된 훈련으로 잔뜩 굶주려 있던 청년들이 눈을 빛내며 냄비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빠듯한 기사단의 살림 탓에 여분의 식자재도 없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오가 눈을 질끈 감고 접시에 수프를 담아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오스칼의 귓가에 재빨리 소곤거렸다.
“넌 지금부터 잠자코 있는 것이 좋겠군.”
바닥에 자리를 잡고 수프 그릇을 집어 든 단원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매사에 꼼꼼한 청년 시몬이 접시를 들어 미심쩍은 표정으로 수프의 색을 요리조리 살폈다.
“어…이 수프 어딘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색깔이지 않습니까?”
미처 수프의 색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던 드미트리가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수프를 입에 밀어 넣었다.
“우웨엑. 쿨럭쿨럭. 이게 뭐야.”
혀에 닿는 생경한 감각에 그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크흑.”
“윽. 이건 이 세상맛이 아닙니다.”
수프의 강렬한 맛을 본 단원들이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초조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오스칼이 수프를 한입 맛보았다.
“푸흐학.”
오스칼이 수프를 입에서 쏟아냈다. 내가 대체 뭘 만든 거지?
이건 지옥에서도 받아 줄 것 같지 않은 음식이었다.
“오스칼, 설마 이거 네가…?”
마티스가 오스칼을 바라보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다른 청년들 역시 불만에 가득 찬 눈빛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망했다, 첫 훈련부터 단단히 찍힐 것 같은데.
“어…. 사실….”
울상이 된 오스칼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때, 레오가 오스칼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늘 식사는 내가 준비한 거다.”
“뭐어?”
“예에?”
기사단의 청년들이 입을 떠억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