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한밤중의 불청객 덕분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오스칼이 응접실의 테이블에 턱을 기대고 눈을 천천히 끔뻑거렸다.
몽롱한 정신으로 기사단 청년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티스가 앞으로 나서곤 응접실을 한번 휘- 둘러보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다들 주목.”
꽤 준엄한 목소리였다. 응접실에 모여 있던 청년들의 시선이 마티스에게 집중되었다. 오스칼 역시 부스스 몸을 일으켜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우리 기사단에 입단한 것을 환영하기 위해 특별 야외 훈련 일정을 준비했다.”
마티스가 설렘과 뿌듯함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신이 난 그와는 달리, 청년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부단장님! 신입 단원에게 환영회를 열어주지는 못할망정 특별 훈련이라니요!”
“하계 특별 훈련 다녀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훈련입니까, 예에?”
“특별 훈련이 이렇게 잦으면 그건 정기 훈련입니다!”
“아직 지난번 특별 훈련의 근육통도 다 안 풀렸는데요?”
기사단의 청년들이 울상이 되어 마티스에게 원망 섞인 투정을 늘어놓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기사단의 부단장 마티스는 ‘훈련 마니아’인 모양이었다.
“특별 야외 훈련이라는 건 어떤 거야?”
오스칼이 부족한 잠 때문에 흐리멍덩한 눈으로 기사단에서 가장 어린 청년인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제라드가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아시다시피 우리 기사단은 주로 험지를 돌지 않습니까? 그런 걸 대비해서 야외에서 합숙하며 전투 훈련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아아- 그런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오스칼이 문득 눈썹을 구겼다. 저 ‘형님’이란 소리는 아직 적응되지 않았다.
기사단에선 실력이 곧 서열이었다. 입단 테스트에서 오스칼이 보여준 실력을 확인한 청년들은 이미 서열정리를 마치고 오스칼을 형님으로 깍듯이 대했다.
어쩌다 보니 팔자에도 없던 형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오, 전투 훈련이라고? 재밌겠는데?”
선수촌에서 했었던 전지훈련 뭐 그런 건가?
레오와 함께했던 검은 숲의 야영을 떠올린 오스칼이 흥미로운 표정을 했다.
그러자 듬직한 체격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청년 드미트리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형님, 지금 잠이 덜 깨셔서 사리판단이 잘 안 되는 겁니다. 훈련하다 보면 형님도 생각이 달라지실걸요. 마티스 부단장님의 훈련은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단원들을 아주 데굴데굴 굴리신다고요.”
“설마….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마티스가?”
건장한 녀석들이 엄살이 심한걸? 오스칼이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하하하 웃었다.
***
“허억, 허억, 지금 나랑 장난해? 전투 훈련이라고? 이건 극기 훈련이잖아?”
과연 드미트리의 말은 백 퍼센트 사실이었다. 오스칼은 특별 야외 훈련을 기대하던 과거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스칼은 깎아 지르는 절벽을 기어오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기사단의 훈련에 왜 이런 암벽타기가 포함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기초 체력훈련인 팔굽혀펴기,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따위를 끝내기 무섭게 곧바로 이어진 실전 훈련이 바로 이 암벽타기였다.
온갖 체력훈련을 거치고 쉬는 시간도 없이 실전 훈련이라니, 이대로 몸이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젠장, 다음엔 꼭 잔잔한 힐링물을… 최애작으로 고를… 허억… 거야…!”
오스칼이 숨을 헐떡거리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가뜩이나 근육량이 적은 몸으로 기사단의 건장한 청년들과 같은 훈련을 받고 있자니 딱, 죽을 맛이었다.
안전을 위해 정상의 기둥에 연결된 밧줄을 허리에 감은 채였지만, 줄에 의지한 채 가파른 절벽을 맨몸으로 기어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스칼이 가쁜 숨을 내쉬며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이 지옥 같은 훈련을 마냥 불평할 수도 없었다.
단장 레오와 부단장 마티스도 다른 기사들처럼 이 훈련에 동일한 조건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괴물 같은 두 남자는 이미 누구보다도 빠르게 고지에 올라 힘겹게 절벽을 기어오르는 단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콰악-
얄밉다는 듯 절벽 위 두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오스칼이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돌벽 사이의 틈에 자신의 단검을 꽂아 넣었다.
벽에 꽂힌 단검을 피켈(등반용 도끼) 삼아 한 뼘씩 몸을 옮기던 오스칼이 이를 악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쳤다.
‘다시는 K-체육인의 근성을 무시하지 마라!’
그 시각, 레오는 팔짱을 낀 채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여멀거니 비실비실한 녀석이 마티스가 준비한 고된 훈련을 전부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뜻밖에 아직까지는 우는 소리 없이 잘 버티는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야. 근력이 처지니까 도구를 사용하잖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티스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런 것 같군.”
검술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근성도 제법이었다. 레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때였다.
따악-
절벽 아래에서 돌이 부서지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발아래에서 들린 소리에 오스칼이 시선을 내렸다. 제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던 기욤이 내디딘 발아래의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중심을 잃은 기욤이 밧줄에 자신의 몸을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욤! 괜찮아?”
오스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발을 좀 헛디뎠습니다.”
안전줄의 존재에 안심한 오스칼이 다시 시선을 정상으로 향했다. 이제 고지가 눈앞이었다.
그러나 곧,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욤의 몸에 연결된 밧줄이 곧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암벽 훈련을 시작하며 준비된 줄 중 하나를 골라 몸을 묶을 때, 기욤이 미처 밧줄을 꼼꼼하게 점검하지 못하고, 좀이 슨 밧줄을 그대로 몸에 두른 모양이었다.
결국, 부실한 밧줄은 기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끊어지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오스칼이 기욤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기욤! 빨리 벽을 붙잡아! 잘못하면 줄이 끊어지겠어!”
“네에?”
출렁-
거의 끊어진 밧줄이 달랑달랑 좌우로 흔들렸다. 당황한 기욤이 황급히 암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긴장감으로 땀에 젖은 손이 미끄러졌다. 불행히도,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밧줄의 올은 더 풀려나갈 뿐이었다.
“이봐! 기욤의 밧줄이 위험해! 어서 새 줄을 던져줘!”
오스칼이 정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절벽 아래의 심상치 않은 상황에 이미 정상에 도착해 있던 청년들이 허둥지둥 새 동아줄을 내렸다.
간신히 돌벽에 몸을 붙여 중심을 잡은 기욤이 제 곁으로 내려온 새 줄을 향해 팔을 뻗었다.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아찔했다.
따악- 투둑-
돌이 깨지는 소리와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기욤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쑥 꺼졌다.
오스칼이 본능적인 순발력을 발휘해 아래로 몸을 던져 기욤의 팔을 붙잡았다. 허리에 맨 안전줄이 오스칼의 몸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으윽!”
건장한 성인 남자의 무게를 버티는 왼팔에서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졌다. 기욤의 손을 붙잡을 때 발생한 순간적인 마찰력에 손이 까져 쓰라렸다.
죽을 뻔했다는 공포심과 자신을 붙잡아준 오스칼에 대한 고마움으로 기욤이 울먹이듯 외쳤다.
“혀, 형님!”
“윽, 빠, 빨리 줄을…!”
오스칼이 힘겨운 신음을 냈다. 허리의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살갗을 파고들었다.
“기욤! 여기!”
마티스가 조바심을 태우며 다시 한번 줄을 흔들었다.
정신을 차린 기욤이 허겁지겁 눈앞의 밧줄을 붙잡자, 단원들이 힘을 모아 줄을 당겨 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기욤이 무사히 구출되는 것을 확인한 오스칼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의 근육을 한바탕 휩쓸고 간 묵직한 무게감에, 더는 암벽에 매달릴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스칼의 몸이 안전줄에 매달린 채 축 늘어졌다.
“오스칼! 줄을 잡아! 우리가 끌어 올릴 테니까.”
마티스의 외침에 오스칼이 줄을 붙잡으려 애썼다.
“악!”
하지만 쉽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자 온몸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살갗이 쓸려나간 손바닥이 거친 밧줄 표면에 닿자 쓰라린 고통이 느껴졌다.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오스칼이 울상을 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오스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레오?”
몸에 줄을 묶고 오스칼이 있는 곳까지 내려온 레오가 말없이 오스칼을 안아 들었다.
한 줌밖에 되지 않은 오스칼의 낭창한 허리를 팔로 단단히 고정한 그가 줄을 붙들고 빠르게 벽을 기어올랐다.
사람 하나를 팔에 매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그의 단단한 팔뚝에서 불끈 솟아오른 힘줄이 느껴졌다.
그는 절벽을 오르는 내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레오의 발이 절벽 정상의 지면에 닿기가 무섭게, 먼저 끌어 올려진 기욤이 레오의 팔에 안긴 오스칼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마티스가 허둥지둥 달려와 오스칼의 허리에 묶인 밧줄을 끊어내자, 그제야 레오가 오스칼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내려놓으며 살짝 들려진 옷 아래로 시퍼렇게 멍이 든 오스칼의 허리가 보였다.
엉망이 된 제 몸 상태는 아는지 모르는지, 오스칼은 기욤을 올려다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뭘.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다친 사람이 없긴 왜 없나?! 너는 대체 왜 그렇게…!”
레오가 오스칼에게 버럭 화를 냈다. 높아진 레오의 언성에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을 향한 그의 화난 목소리에 청년들이 당황해 눈치만 살폈다. 그는 무슨 말을 더하려다 입을 다물고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 기욤 너는! 훈련 전 장비를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은 건가? 철저한 준비야말로 기사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라고 수도 없이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단장님. 제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입니다.”
레오의 무서운 질책에 기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심으로 죄스러운 표정이었다. 오스칼은 화를 내는 레오를 야속한 듯 응시했다.
칭찬을 들으려고 기욤을 구한 건 아니었지만, 도리어 야단을 맞을 줄은 몰랐다. 그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홱 돌린 레오가 마티스를 향해 내뱉듯 말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훈련을 중단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레오는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오스칼이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썹을 구겼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도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