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으아 흑막이고, 엔딩이고, 난 지금 너무 지쳤어…!”
이틀간 이어진 강행군으로 녹초가 된 오스칼이 자신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겨우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 낯선 방이지만, 검은 숲과 샤무아에서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했던 탓인지 뤼미에르의 작은 방은, 마치 제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하… 우리 주인공 아드님 누명… 벗겨야 하는…데….”
피곤함 때문일까, 침대에 쓰러진 오스칼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미처 끄지 못한 촛불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방문도, 창문도 잠겨 고요한 방안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일렁이던 촛불이 순식간에 꺼지고, 방 안이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다.
기이한 오싹함에 오스칼이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얼른 옆에 놓인 검을 움켜쥐었다.
그때, 방 안에 검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리고 소용돌이 한가운데, 눈부신 은빛을 내뿜는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오스칼이 재빠르게 소용돌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휙-
하지만 검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안녕.”
오스칼의 귓가에 차갑고 끈적한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어느새 클로드가 오스칼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뒤에서 끌어안듯 바짝 붙어선 그는 검을 쥔 오스칼의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잡고, 자신의 왼팔로는 오스칼의 왼쪽 허리를 감싸 안았다.
“손님에게 이렇게 칼부터 들이대면 서운하지.”
“야, 이 변태 같은 놈아! 손님은 무슨 손님! 당장 내 허리에서 손 떼!”
기회를 틈타 은근슬쩍 허리를 쓰다듬는 클로드의 손길에 오스칼이 소리를 꽥- 질렀다. 화통 같은 목소리에 클로드가 쿡쿡 웃으며 오스칼을 놓아주었다.
“변태 같은 놈이라니, 꽤 거친 표현이군.”
“야밤에 남의 방을 무단침입한 주제에! 더 심한 말을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참고로, 난 거친 것도 좋아해.”
천연덕스러운 클로드의 말에 오스칼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했다. 그의 붉은 눈이 웃고 있었다.
“당장 안 나가면 소리 지를 거야. 옆 방에 사람 있거든?”
“지금까지 당신이 지른 건 소리가 아니고 뭐야?”
“더 본격적으로 지른다고!”
얼굴이 벌게져 씩씩거리는 오스칼을 두고 다시 한번 눈을 접어 웃은 클로드는 오스칼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아마 안 들릴 거야. 내게 그 정도 능력은 있거든. 그러니까 괜히 힘 빼지 마.”
그는 마법이라도 쓰는 것인지, 집게손가락을 튕겼다.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오스칼은 질문하고 나서야, 자신이 하등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국 최고의 정보상이 고작 자기가 사는 곳 하나 알아내지 못했겠는가. 오스칼이 체념한 듯 한숨을 한번 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건 됐어. 안 들어도 알 거 같으니까. 그런데, 우리 계약은 다 정리가 된 거 아니었어? 갑자기 왜 불쑥 나타난 거야?”
“당신에 대해 너무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명색이 정보상이라, 궁금한 걸 못 견디거든.”
이제 클로드는 침대에 앉은 오스칼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한 손으로는 오스칼의 등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오스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저리 떨어져 앉아라.”
오스칼이 어느새 제게 추근대는 클로드를 향해 이를 악물고 경고의 말을 던졌다.
클로드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에 있던 책상 의자를 마법으로 돌려세운 후, 얌전히 오스칼의 맞은편에 앉았다.
몸에 딱 맞는 세련된 검은색 정장 차림의 그가 작은 나무 의자 위에서 긴 다리를 꼬았다.
“이렇게까지 궁금한 게 생긴 건 327년 전, 카이로스 제국의 피라미드가 어떻게 지어졌는지에 대한 의문 이후 처음이야. 그때 하마터면 카이로스 제국의 모든 고대 영혼을 소환할 뻔했지.”
오스칼이 황당한 듯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한 의문만큼 그녀에게 궁금한 게 뭐란 말인가.
‘저주를 풀어낸 방법을 알아내려고 그러는 건가.’
그렇다고 제가 빙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스칼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궁금한 게 저주에 대한 거라면 나도 알려 줄 수가….”
“당신, 이상형이 어떻게 돼?”
오스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클로드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언제 불러낸 것인지, 어느새 그의 곁에는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힌 기다란 양피지 두루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그 옆에서 허공에 뜬 깃펜이 오스칼의 대답을 기다리며, 양피지에 글자를 채울 준비를 했다.
“뭐…뭐?”
“혹시 선호하는 키스 방법, 뭐 그런 것도 있나?”
그의 노골적인 질문에 오스칼의 입이 떡 벌어졌다. 클로드의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깃펜은 분주하게 양피지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네가 그딴 게 왜 궁금해? 지금 그런 걸 물으려 야밤에 남의 방에 들어온 거야?”
오스칼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그딴 거라니. 완벽한 정보 수집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이야. 난 그게 궁금해서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거든. 당신은 정보상에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필요가 있어.”
그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금 저기에 적혀 있는 게 전부 나에 관한 내용이야?”
오스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려 달려들었다. 허공의 양피지를 재빠르게 붙잡고 되는대로 제일 먼저 보이는 문장을 읽었다.
[말할 땐 거친 표현을 즐겨 쓰지만, 거친 걸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음. 단, 때리는 것엔 익숙한 듯함. 주먹에 맞아보니 타격감이 상당함.]
[키 : … / 몸무게 : … / 오른손 크기: … / 왼손 크기 : … / 허리둘레 : … / 머리 둘레 : …]
오스칼이 제 눈을 의심했다. 기가 막힌 오스칼이 뒤 문장을 더 읽으려 하자 클로드는 황급히 손가락을 튕겼다. 오스칼의 손에서 빠져나간 양피지가 빠르게 돌돌 말리더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클로드가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힘들게 수집한 정보를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없어서 말야.”
“뭐? 지금 나랑 장난해? 나에 대한 게 어떻게 ‘아무나’야?”
“모든 정보에 대한 기밀 엄수가 바로 정보상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지.”
“당신, 내 신체 치수는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어떻게 몰라? 오늘만 해도 내가 당신을 몇 번이나 안았는….”
“야! 단어 선택 좀 똑바로 해! 누가 들으면 너랑 나랑…. 우씨….”
그의 부적절한 표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오스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 얘길 누가 들을 일은 없다니까.”
클로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오스칼이 눈을 세모꼴로 뜨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내 정보거든? 내 정보가 알고 싶으면 너도 대가를 내놔. 정보상이 상도덕이 있어야지!”
오스칼의 말에 클로드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당신 꽤 똑똑한데? 거래의 기본을 아는 그 태도가 정말 맘에 들어. 그래서… 내게 정보를 넘기는 대신 당신이 원하는 대가가 뭐야?”
“칼릭스 공작가에 반역 누명을 씌운 자의 피.”
오스칼이 뭘 새삼스레 묻냐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음, 그건 좀 수지가 맞지 않는 것 같은걸? 그것에는 더 큰 대가가 필요할 것 같아.”
“순 사기꾼 같은 놈. 아깐 나에 대한 정보가 궁금해서 잠도 못 잔다더니.”
“개인적인 궁금증과 거래는 구분해야지. 당신이 알려주지 않는대도 상관없어. 내가 직접 알아내면 되니까.”
오스칼이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당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 나에 대한 게 궁금해?”
“당신에게 관심이 생겼어. 사람에게 이런 감정이 드는 건 512년 만이야.”
“500년 전에는 관심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유행이었나 보지?”
“오랜만이라.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그럼 내가 알려줄게. 요즘 젊은 사람들은 관심을 돈으로 표현하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관심을 줄 때는 돈으로 해 주길 바라.”
“정말인가? 얼마야? 얼마면 되지?”
그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정말 매일 밤 관심을 명목으로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찾아올 모양이었다.
이 남자라면 언제든지 자길 사겠다고 ‘1억 2천, 전부 현금이다!’라는 말과 함께 돈다발을 던질 위인이다.
이 자식, 저주가 풀리고 심장을 돌려받는 대신 뇌를 바쳤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클로드는 인간적인 감정을 빼앗긴 채 500년간 살아온 탓에 사회성과 언어 구사에 전반적인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오스칼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그걸 진짜 믿었어?”
오스칼의 대답에 그는 어쩐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이면 될 줄 알았는데 다분히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오스칼이 시무룩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오랜만이라 뭘 모르나 본데, 남자가 남자한테 추근거리면 변태 소리 들어.”
“오늘 낮부터 느꼈지만, 당신은 샤무아의 주인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군.”
그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변태 소리 정도는 가볍게 들을 각오가 된 모양이었다.
오스칼이 더 입씨름할 기운도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돌아가. 난 잠을 좀 자야겠거든.”
벌써 새벽 3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곗바늘을 보며 오스칼이 한숨을 쉬었다. 오스칼의 말에 어느새 방 한구석에 몰래 나타난 깃펜이 양피지에 오스칼의 말을 받아쓰고 있었다.
[새벽 3시 전에는 보통 취침함. 잘 시간이 지나면 예민해 짐.]
그 광경을 본 오스칼이 눈을 부라렸다.
저 미치광이 깃펜이 진짜…?
“그럼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지. 우린 다음에 또 보자고.”
“다시는 오지 마!”
그는 오스칼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은 채,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오스칼은 사라지는 소용돌이를 확인하고는 지쳤다는 듯 침대에 쓰러져 누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여스칼〉의 외전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