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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12)화 (12/138)

12화



 

계약자의 피가 닿으면, 분명 계약서 내용이 짠-하고 나타나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는 계약서에 오스칼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불길한 가설이 번뜩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오스칼은 그대로 칼을 뽑아 들었다.

“이 사기꾼 같은 놈이, 감히 가짜를 내놔?”

목덜미를 향한 날카로운 칼날에도 클로드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정말 내가 가짜를 내어놓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무리 나라도 피의 맹약을 어길 순 없어. 거기 있는 건 당신과 계약한 그대로야. 칼릭스 공작가의 반역 조작을 의뢰한 계약서, 그리고 ‘루이스터 대공’의 피.”

그의 말에 오스칼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듯 어지럽게 흔들렸다.

“설마… 계약자가 루이스터 대공이 아니었어?”

오스칼의 허탈한 목소리가 잘게 떨리며 공기 중에 흩어졌다.

원작에서 칼릭스 가를 몰락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던 자가 악역 루이스터 대공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해본 적 없었다.

당연했다. 칼릭스 가의 몰락 이후, 루이스터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 반란군을 일으켰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원작에서도 샤무아가 그 일을 했다는 언급만 있었을 뿐, 그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이 루이스터 대공의 반역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칼릭스 가 몰락의 배후도 루이스터일 것이라고 당연하게 추측했을 뿐이었다.

클로드가 이제 깨달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여 자신에게 겨누어진 칼날을 단번에 치워냈다. 오스칼이 그 모습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았다.

어느새 클로드가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차가운 손으로 그는 천천히 오스칼의 창백해진 뺨을 쓸어내렸다.

“안타깝게 됐군.”

승리감에 찬 그의 미소가 지독히도 거슬렸다. 오스칼은 제 뺨에 닿은 클로드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넌 처음부터 루이스터 대공이 계약자가 아닌 걸 알고 있었잖아. 그래 놓고 천연덕스럽게 나와 그런 계약을 해?”

“난 그저, 당신이 달라고 한 정보만 넘겼을 뿐이야.”

“이 치사한 자식!”

오스칼이 분통이 터진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항상 계약할 때는 신중해야 하는 법이야.”

차분한 그의 음성은 오스칼의 화만 더 돋울 뿐이었다. 오스칼은 대답 대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오스칼의 귓가에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와 다시 계약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걸고 말이야.”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호를 그리며 휘었다.

***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국왕 라인하트 10세의 집무실을 방문한 아르투아 대공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른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국왕 라인하트 10세는 술에 취해 있었다.

“딸꾹. 숙부님, 딸꾹. 오랜만에 들러주셨군요.”

자못 아름다웠었을 그의 얼굴은 유흥에 찌들어 푸석하고 생기가 없었다.

라인하트 왕가의 상징인 화려한 금발 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한때 푸르렀을 눈은 총기 없이 탁한 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그의 곁에는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옷을 입은 것도, 벗은 것도 아닌 상태로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연회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아르투아 대공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바쁘신 줄 잘 알고 있으나, 국정에 대해 잠시 논의 드릴 것이 있어서 알현했습니다.”

“숙부님, 말씀을 편하게 하세요. 딸꾹.”

젊은 국왕이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를 냈다. 아르투아가 자못 겸손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감히 폐하께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제가 오늘 알현을 드린 이유는 왕국의 국방 문제를 상의드리기 위함입니다.”

“그건 숙부가 전담하시는 부분이지요.”

국왕은 즉위 이후, 어린 시절 루이스터 대공의 반란에서 자신을 도왔던 숙부, 아르투아 대공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국정에 소홀한 국왕의 일을 대행하고 있는 아르투아는 명실상부 현재 라인하트 최고의 권력자였다.

아르투아 대공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국왕의 이야기를 모두 기록 중인 집무실의 서기관을 흘긋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예, 최근 제가 왕국 주요 시설에 대한 경비를 조정 중에 있습니다만, 최근 이교도들의 기세가 흉포합니다.”

“그 망할 이교도 놈들이요? 아직 그들이 남아 있습니까? 제가 어린 시절 그놈들과 손잡은 루이스터 숙부 때문에 죽을 뻔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국왕이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술에 취한 자가 흥분해 휘두르는 주먹은 주정이라도 부리는 듯, 퍽 우습게 보였다.

“이번 그들의 폭동 때문에, 에르네스트 대공이 크게 상처를 입어 아직 의식이 없다는군요.”

“그 녀석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제 친동생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미가 다른 형제는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루이스터 숙부가 제 아버지께 저지른 일을 보세요.”

“그래도 전하께서 자손이 없이 돌아가시면 에르네스트가 왕위를 이을 것입니다.”

“미천한 첩의 자식 놈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다는 것도 불쾌합니다. 차라리 숙부님이라면 몰라도요.”

아르투아의 미간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으나, 이내 그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제 계승 순위는 그다음입니다.”

“흥. 승계법이란! 그래서 그 이교도놈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숙부께서 처리를 잘하셨겠지요?”

“예…. 물론 잘 처리했습니다만…. 이번 일에 레오폴드 칼릭스가 나선 모양이더군요.”

“그 반역자의 사생아 말입니까? 그자는 분명 왕국 기사단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그 이름을 들은 국왕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분부하신 대로, 제가 분명 그자가 소속된 왕국 하급 기사단을 없애버렸었는데… 그자가 앙심이라도 품었는지 인원을 규합해 기사단이랍시고 설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기사단이요? 역시 더러운 핏줄을 타고나 불손한 마음을 먹은 게로군요. 지금 그 사생아 놈이 따로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군사라고 할 수준은 아닙니다. 오합지졸들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근위대가 나설 일에 그자가 얼굴을 들이미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는 않습니다.”

“왜 아직 그놈이 살아있는 겁니까? 숙부께서 그자를 없애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국왕의 힐난에 아르투아 대공이 국왕을 달래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제복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반역자의 후손이라 해도 이제 와서 명분도 없이 공개적으로 그자를 처형할 순 없습니다. 그러니 은밀하게 기회를 노려야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오늘은 이참에 제 휘하의 근위대 숫자를 늘리고, 전하를 위해 일할 암살자들도 더 뽑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겁니다.”

“음…. 하지만 예산 문제로 평민 기사단도 없애버렸는데, 근위대 인원을 더 충원한다는 것이 썩 내키진 않습니다. 게다가 왕실 자금으로 암살자를 고용하는 건 문제가 될 수도….”

순간, 국왕은 아르투아가 입은 제복의 단추 색이 변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분명 검은색이었는데, 지금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술이 덜 깼나. 그가 눈을 깜빡여 단추를 들여다보았다. 단추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그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전하?”

아르투아가 미끄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몽롱한 정신의 국왕이 웅얼거렸다.

“숙부님 뜻대로 하세요. 군사 문제는 숙부님이 전문가 아니십니….”

드르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국왕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내 집무실 안은 국왕의 코 고는 소리와 서기관이 두 사람의 대화를 받아 적는 소리만 들렸다.

아르투아가 서기관에게 손을 뻗어 왕명이 담긴 칙서를 받아들었다.

“그럼, 분부 받잡겠습니다.”

아르투아 대공은 잠든 국왕에게 정중하게 예를 차린 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폐하는 제 형님을 참 많이 닮았군요. 아둔한 것까지.”

그 말을 남기고 아르투아 대공은 집무실을 나섰다.

***

샤무아의 골목 앞, 레오는 홀로 오스칼을 기다렸다. 계약의 이행을 위해 출입이 허용되는 자는 계약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쩐지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아 초조한 표정으로 샤무아의 골목 앞을 서성였다.

“이제 곧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니.”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긴, 그 녀석이 제 앞에 나타난 이후 믿을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할까. 그가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어젯밤만 해도 그랬다.

사내들끼리 몸 좀 붙이고 자는 게 어떻다고 유난을 떨더니, 막상 또 옆에 누이니 잠시 꼬물대더니 아주 푹 잠들어버렸다.

게다가 몸은 또 어떤가. 사내놈 같지 않은 체형인 줄은 알았지만, 살갗이나 향기도 그랬다.

남자 같은 진한 땀 냄새도 까슬까슬한 털도 느껴지지 않는, 포근한 향기와 부드러운 감촉.

“크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레오가 헛기침하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녀석과 붙어 있다 보니 자신도 좀 이상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때, 울상을 한 오스칼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레오가 번뜩 고개를 들고 오스칼을 향해 달려갔다.

“어떻게 되었나?”

***

기사단으로 돌아가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한 오스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레오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며 자신 있게 나섰는데,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사정이 그렇게 되어서……. 미안.”

“계약서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않나. 25년을 기다렸는데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애써 실망감을 감춘 그가 차분한 어조로 오스칼을 위로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 것만으로도 그는 감사했다.

하지만 오스칼은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원작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만해 벌어진 실수였다.

원작의 주인공들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으면서, 뭘 믿고 계약자를 루이스터라고 확신했던 건지.

‘작가님, 회수 못 한 숨겨진 설정이 대체 몇 개예요?’

아무래도 이 외전을 이끌어 갈 메인 스토리는 원작에서 칼릭스 가문에 누명을 씌워 몰락시킨 ‘진짜 흑막’을 찾아내고, 원작 주인공 아들의 행복을 찾아주는 것일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흑막을 어디 가서 찾냐고요.’

막막한 기분이 된 오스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이 외전의 엔딩을 보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으로선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우선 당분간 레오 곁에 머물면서 칼릭스 가문의 누명을 벗길 다른 실마리를 찾는 것이 최선이었다.

“정 안되면, 증거고 나발이고 그냥 내 방식대로 해결하는 수밖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입 밖에 내어 중얼거린 오스칼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뭐라고?”

오스칼의 살벌한 혼잣말에 레오가 옆을 바라보았다.

“응? 아냐, 아냐.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얼른 손을 휘저어 보였지만, 여차하면 폭력적인 방법으로라도 엔딩을 보겠다는 오스칼의 다짐은 물론 진심이었다.

그녀에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외전의 탈출이었으니까. 때론 법보다 주먹이 강한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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