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뭐… 뭐라고?”
너무 놀라 잠이 달아나버린 오스칼이 소스라치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야영 시에 체온 유지를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로 몸을 맞대는 거다. 기본적인 생존기술이지.”
허둥거리는 오스칼과 달리 레오는 누운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고개만 까딱여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웬 호들갑이냐는 태도였다.
“아… 생존기술.”
음란요정이라도 씐 것인지 그의 말을 야릇하게 받아들인 스스로가 머쓱해져, 오스칼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그의 동료 기사일 뿐이었다.
‘아니, 이런 헛간 같은 창고에서 품에 안기라니까 그랬지. 난 죄가 없다고.’
오스칼이 괜히 속으로 투덜거렸다. 원래 물레방앗간이나 헛간이 다른 일이 벌어지기에 딱 좋은 환경이 아닌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 성가신데.”
레오가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 있는 오스칼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휘이잉-
머뭇거리는 오스칼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밤바람이 불어왔다. 밤바람의 한기에 오스칼이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결국, 추위에 굴복한 오스칼이 슬그머니 레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럼 조금만 옆으로… 흐앗!”
그의 커다란 체구 옆에서 바람이나 피하려 했던 오스칼이 자신의 어깨에 감겨오는 낯선 살갗의 감촉에 낮은 비명을 질렀다.
“넌 몸이 작으니 내 팔을 베고 누워도 충분할 거다.”
“딸꾹, 딸꾹.”
몸에 바짝 닿는 남자의 몸에 놀란 오스칼이 딸꾹질했다.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살을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오스칼의 귓바퀴가 붉어졌다.
“딸꾹질까지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군.”
딱하다는 듯 혀를 한 번 찬 레오가 반대쪽 팔을 감아 오스칼을 제 품에 안았다. 졸지에 오스칼은 레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레오에게 폭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레오의 커다란 양팔이 오스칼의 등을 따뜻하게 감싸고, 레오의 다리와 오스칼의 다리가 겹쳐졌다. 그러자 검술로 단련된 레오의 탄탄한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흡.”
오스칼이 낮게 숨을 들이켰다.
‘정신 차리자.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이건 생존을 위한 야영기술일 뿐이다. 나는 지금 남자 기사단원이다…….’
2n년째 모쏠인 그녀에게 이 상황은 지극히 자극적이었다. 레오는 그저 생존기술을 따르고 있을 뿐인데, 오스칼의 심장은 주책스럽게도 빠르게 뛰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콧김이 변태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한참 동안 숨을 참던 오스칼이 더 견디지 못하고 숨을 뱉었다.
“후하.”
뱉었던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젖은 흙냄새와 풀 내음이 섞인 달큰한 체향이 났다.
그 야릇한 향기에 현기증이 난 오스칼이 눈을 꼭 감았다. 바깥에서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풀벌레의 규칙적인 울음소리와, 하얀 달빛만이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와. 정말 달빛 같네.”
오스칼의 말을 곱씹은 남자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고풍스러운 안락의자에 앉아 시가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신 클로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달빛 같다라.”
그런 말을 듣기도 했었지. 조소하듯 읊조린 클로드가 시가 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그는 흩어지는 흰 연기 속에서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역시, 오빠의 머리카락 색은 달빛 같아.”
“이 불길한 색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니야, 분명 언젠가는 그 은색이 달빛같이 예쁘다는 걸 알아볼 운명 같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웃던 클라우디아. 바보같이 착해 빠져선.
그는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서 고개를 돌렸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파삭-
움켜쥔 클로드의 손에서 시가가 바스러졌다. 아스라이 흩어지는 불씨에 그의 손이 붉게 변했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500년을 사는 동안 인간으로서의 감정은 마모되어 바스러졌고, 삶의 감각은 말라붙어 건조해졌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새로운 계약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냘픈 주제에 저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맞서던 당돌한 모습. 맹약의 내용도 정보이니 내어놓으라는 겁 없는 제안에는 자신도 허를 찔리고 말았다.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인데.”
그가 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서늘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오스칼에게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실로 오랜만에 드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보상인 그가 알아내지 못할 정보는 없으니 녀석에 대한 관심 또한 식을 터였다.
게다가 그 약해 보이는 녀석이 제 심장의 저주를 풀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멍청하게 다른 사람을 위해 제 목숨을 걸다니.”
그가 조소를 흘렸다. 결국, 그 녀석도 죽게 될 것이다. 그가 안락의자에서 일어나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클라우디아. 500년을 살았지만, 네가 말한 운명 같은 사람은 없었어. 결국, 다 바보 같은 죽음을 맞이할 뿐이거든.”
그때, 지독한 통증이 클로드의 가슴에 밀려들었다.
“윽.”
그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소용없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숨을 헐떡이며 텅 비어있을 그의 왼쪽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그러쥐었다.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의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기랄.”
그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어느덧 타는 듯한 열기가 그의 가슴을 휘감았다.
그의 왼쪽 가슴에서 시작된 뜨거운 불길이 온몸의 혈관을 도화선 삼듯 타고 흘러 온몸을 휘저었다.
쿵-쿵-
왼쪽 가슴 위에 올려진 그의 손바닥에서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하…. 하, 하하하.”
클로드의 입에서 실소와도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이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말…. 그 녀석이 저주를 풀었다고…?”
클로드의 눈이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며 빛났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정제되지 않은 감정으로 일렁였다.
***
다음날, 계약의 이행을 위해 샤무아를 찾은 오스칼은 그녀를 바라보는 클로드의 집요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마치 맹수 앞의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보낸 네 심장은 잘 받았지?”
오스칼은 짐짓 태연한 척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어쩐지 이 남자와의 기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기대 이상이더군. 오스칼.”
느릿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끈적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어느새 피부의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제게 가까이 다가와 서 있었다.
결점 하나 없이 희고 매끈한 그의 피부가 마치 도자기 같았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진 오스칼이 얼른 본론으로 돌입했다.
“약속했던 정보나 얼른 넘겨줘.”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마.”
오스칼이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외전의 핵심 아이템을 찾아서 스토리를 진행해야 하는데 조급하게 굴지 말라니.
거 참, 성질 급한 K-영혼은 답답해 돌아가시겠네.
“난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지?”
“지난번, 당신이 동행한 자는 칼릭스 가의 핏줄이던데. 무엇 때문에 그를 위해서 당신이 맹약의 위험을 무릅쓴 거지?”
“네가 계약자의 시시콜콜한 사정까지 관심을 가지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오스칼의 빈정거림에 클로드가 낮게 웃었다.
“보통 관심 없지. 하지만 궁금해졌거든.”
“당신이 알 것 없어.”
오스칼의 냉랭한 대답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내 심장의 저주는 대체 어떻게 푼 거야? 생각보다 당신, 꽤 강한 모양이야.”
“정보상이라며? 직접 알아내 보시지? 난 당신에게 친절하게 설명 같은 거나 해줄 시간이 없거든.”
클로드가 그에게 아무것도 알려줄 생각이 없어보이는 오스칼을 옅은 웃음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아 쉽게 얻어내는 것도 재미없지. 난 인내심이 강한 만큼 궁금한 건 반드시 알아내. 그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당신, 나를 꽤 자극하는 구석이 있어.”
클로드가 선선하게 웃었다. 도리어 그 웃음에 간담이 서늘해진 것은 오스칼이었다.
이 남자, 정보상 아니랄까 봐 정보에 진심이다.
“그, 그런 거에 일일이 자극받지 마.”
“사실… 내가 진짜 궁금한 건 당신이야.”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퇴폐적이었다. 남자의 눈빛은 그렇게 하면 오스칼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듯 집요했다.
오스칼의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네 호기심은 사양할게.”
“우리가 정말 남다른 운명일지도 모르잖아.”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무슨 뜻일까?”
“너…. 설마 남자가 취향이었어?”
오스칼의 평정심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이 자식… 혹시 변태 아닐까?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취향이라. 재밌는 말이군. 난 당신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그냥 당신이 궁금해.”
“사, 상관없다고 하지 말고, 혹시 취향에 편견이라는 걸 좀 가져보는 게 어때? 으악!”
자신이 남자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는 오스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팔이 오스칼의 허리와 손을 휘감아 들어왔다.
그가 오스칼의 허리와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몸 가까이 당기자, 오스칼의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어느새 오스칼은 그의 품에 안겨 오른손을 그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댄 모양새가 되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 근육 아래에서 심장의 강한 박동이 느껴졌다.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 듯, 클로드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때? 네가 찾아준 심장이 잘 있는지 확인해봐.”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클로드의 시선이 핥듯이 오스칼의 얼굴에 얽혀들었다.
“이, 이 자식아 뭐 하는 거야?”
퍽-
우당탕-
오스칼이 바짝 다가온 클로드의 얼굴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다.
순식간에 한 대 얻어맞은 그가 오스칼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불같이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그가 청량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하, 누군가에게 맞아본 건 정말 오랜만이야. 꽤 기분 좋은데.”
…이 자식, 변태 확정이다. 그것도 500년 묵은 변태.
“이, 이 미친놈아. 저주가 풀렸으면 당연히 심장이 돌아갔겠지. 뭐 대단한 것처럼 확인까지 시켜줘?”
기상천외한 그의 발언에 아연실색하며 오스칼이 목소리를 떨었다.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당신이 확인했으면 해서.”
“난 네 심장의 안부에는 관심 없거든? 얼른 계약한 물건이나 내놔.”
계약의 대가인 증거만 받으면, 이 변태 같은 남자와 더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동안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그러지.”
순순히 대답하는 그의 태도가 어쩐지 수상쩍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백지상태의 계약서 한 장과 루이스터 대공의 피가 담긴 자그마한 크리스털 병을 불러냈다. 그는 자신의 마법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저주에서 벗어났지만, 마력은 여전히 남아 있더군.”
“어, 그래. 축하한다.”
오스칼이 클로드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강 대답했다.
그리고는 한시가 급하다는 듯 공중에 떠 있는 계약서와 병을 재빠르게 낚아챈 뒤, 빠른 손놀림으로 병에 담긴 피를 계약서에 쏟아부었다.
“저런, 한 방울이면 될 텐데.”
클로드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스칼의 신경은 오로지 계약서에 집중되어 있었다.
칼릭스 가의 누명을 벗길 증거가 바로 눈앞이었다.
그러나 곧 계약서가 정체를 드러내리라는 오스칼의 기대와는 달리, 여전히 텅 빈 양피지 조각은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겁에 질린 듯한 오스칼의 목소리가 허공에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