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나는 놈들을 해치우고 뒤따라 갈 테니 먼저 가.”
“그런 게 어딨어? 너도 같이 가야지.”
오스칼이 다급하게 말했다.
소설에서 그런 대사를 읊은 뒤에 살아서 다시 만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주인공이 소설 시작하자마자 사망 플래그를 꽂아? 지금 나랑 장난해?
그 말에 곤란한 듯 입을 다문 레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런 숲속에서 노파까지 데리고 모두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 자객은 날 노리고 있어.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너를 암살에 휘말려 죽게 둘 순 없다.”
그는 낮고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이 결연했다.
그 말을 들은 오스칼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레오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널 미끼로 삼아서 여기서 혼자 빠져나가라는 거야? 그리고 뭐? 내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이 인간이 대체 나를 뭐로 보고! 난 네 녀석 어머니의 열렬한 팬이며 이 소설의 넘버원 애독자라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예가네초프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사기꾼답게 눈치 하나는 빨랐다. 그 모습을 본 오스칼이 예가네초프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당신. 내가 셋을 세면, 어디로든 숨어. 암살자들이 당신에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을 거야.”
암살자라는 말에 예가네초프의 눈이 커졌다. 이내 그녀는 입을 악다문 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칼의 지시에 레오가 무슨 생각이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그놈들 위치 파악돼?”
“일곱 시 방향에 둘, 다섯 시 방향에 둘, 여섯 시 방향에 둘.”
그의 말에 오스칼이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린 정면 돌파할 거야.”
레오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뭐? 진심인가?”
“그래. 앞으로 셋을 세면 달려. 습격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저들도 당황할 거야.”
찌푸린 미간 아래로 오스칼의 녹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으로부터 왜인지 레오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앞만 보고 달려, 네 뒤는 내가 지킬 테니까.”
그를 지키겠다는 오스칼의 단단한 목소리에 레오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늘 누군가를 지키는 입장이었다. 전장에서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감히 없었다. 낯선 감각에 손발이 찌릿했다.
이 녀석이 내 등 뒤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하는 동료인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어쩐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대책 없는 녀석을 믿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의지가 담긴 시선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레오의 눈빛에서 긍정의 뜻을 읽은 오스칼이 곧장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셋을 세기가 무섭게 오스칼이 검을 뽑아 들고 달렸다.
예가네초프가 잽싸게 몸을 굴려 숨을 곳을 찾았다. 평생 사기꾼으로 도망 다니느라 숨는 것에는 도가 튼 자였다.
갑작스럽게 뒤돌아 뛰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들의 뒤를 밟던 자객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레오가 빠른 속도로 정면을 향해 달려가자 무장한 남자 넷이 그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단숨에 두 남자가 나가떨어졌다.
이내 두 남자가 오스칼에게 달려왔다.
‘근접전은 피하고 속도전으로 간다!’
기습적인 선제공격과 상대를 압박하는 속도감 있는 플레이는, 가장 자신 있는 경기 운영 방식이었다.
오스칼은 상체를 바짝 낮추고는 빠르게 몸을 날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첫 번째 남자의 옆구리를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촤아악-
“으어억!”
오스칼의 검에 남자의 몸이 무너졌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동료가 낙엽처럼 땅에 뒹굴자 두 번째 남자가 사나운 기세로 오스칼에게 칼을 휘둘러왔다.
오스칼은 재빨리 몸을 물려 칼을 피했다. 그리고 민첩한 몸동작으로 남자의 측면을 향해 깊게 검을 찔렀다.
그러나 남자는 능숙하게 오스칼의 칼을 쳐냈다.
챙!
두 자루의 칼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맞부딪혔다.
“칫.”
공격이 막힌 오스칼은 나지막하게 불평하는 소리를 냈다. 이 남자는 이제껏 상대했던 다른 놈들보다 검을 좀 다루어 본 듯한 솜씨였다.
이번에는 남자의 하체를 노렸다. 하지만 오스칼이 휘두른 검신은 남자의 바짓자락만을 찢어 놓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남자는 자신의 아래로 들어온 칼날을 과격하게 올려붙이며 반격했다.
찌잉-
남자의 우락부락한 근육에서부터 칼날을 타고 전달된 압도적인 힘에, 칼을 잡은 오스칼의 손가락 마디가 저릿했다. 오스칼은 다시 황급히 몸을 바깥으로 내뺐다.
그가 무서운 속도로 오스칼의 몸 가까이 검을 붙여 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힘으로 검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오스칼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오스칼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하나 신체적인 열세를 극복하기란 어려웠다.
‘윽, 이대로라면 몸이 못 버티고 나가떨어지겠어.’
초조해진 오스칼은 남자에게서 실수를 끌어내기 위해 칼을 이리저리 꺾었다. 오스칼의 검은 초승달 같은 궤도를 그리다가도 곧장 찔러 들어왔다. 오스칼이 있는 힘을 다해 정면을 공격했다.
채앵-
섬광과 함께 오스칼의 검이 남자의 칼에 정통으로 막혔다.
‘아차!’
당장 검을 물리고 남자와의 간격을 벌려야 하는데, 기회를 잡은 남자는 검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무리하게 몸을 피했다가는 남자의 검에 당할 것이 분명했다.
남자의 완력을 받아내는 오스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검을 쥔 손아귀가 아파 왔다.
오스칼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칼날 뒤 남자의 눈빛은 여유롭고 자신만만했다.
오스칼은 대치 중인 남자의 어깨너머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낭패였다. 동시에 두 남자를 상대하고 있는 레오의 등 뒤로, 미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자객 하나가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마음이 급해져 욕이 튀어나왔다. 레오는 동시에 쇄도하는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그의 뒤를 노리는 남자를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레오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오스칼은 땀범벅이 된 얼굴로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이봐, 내가 올림픽에서도 못 배웠던 걸 여기 와서 배웠는데. 그게 뭔지 알아?”
올림픽이라는 알아듣지 못할 단어에 암살자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는다는 눈빛으로 다리를 넓게 벌려 자신의 몸을 단단히 지탱한 뒤 더욱 칼날에 힘을 실었다.
칼을 쥔 오스칼의 팔이 뒤로 밀려나 칼날이 오스칼의 목 끝까지 가까워졌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오스칼의 목 언저리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살갗이 따끔거렸다.
칼날이 닿은 자리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여차하면 목이 베일 것 같았다. 남자가 이제 끝났다는 듯 조롱했다.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오스칼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었다. 어찌나 안간힘을 썼던지 실핏줄이 터져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바로…. 인생은 경기가 아니라 실전이라는 거야.”
오스칼은 넓게 벌려 서 있던 남자의 다리 사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남자의 급소 정중앙에 오스칼의 정강이가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퍼억-
콰직-
“크어허어억!!”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고통에 남자가 칼을 놓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급소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스칼은 순식간에 칼을 높이 치켜들어 바닥을 구르는 남자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오스칼의 얼굴과 머리에 핏물이 튀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오스칼은 레오를 향해 내달렸다. 레오 등 뒤의 자객이 지척이었다.
동시에 칼을 휘두르는 두 남자와 검을 맞부딪치던 레오가 노련한 기세로 한 남자의 급소를 베어내고 빠르게 몸을 회전해 다른 남자를 베었다.
두 남자를 해치웠다고 생각한 순간, 기척을 숨기고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채앵-
당황한 레오가 황급히 자객의 칼을 막아 냈다.
하지만 대비 없이 칼날을 받아내느라 그의 손목이 어긋나 힘이 빠지고, 그 탓에 리듬이 깨진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느라 디딘 자리에 하필 거친 나무뿌리가 숨어 있었다.
“윽-”
발이 나무뿌리에 걸려 그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위험을 직감한 레오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대로라면 살아남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 무렵….
푸욱-
“흐어억!”
눈앞의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남자의 가슴팍이 날카로운 칼날에 그대로 꿰어졌다. 암살자의 동공이 확장되고,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풀썩-
검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암살자의 가슴을 관통해 튀어나와 있던 칼끝이 사라지며 남자의 몸이 바닥에 굴렀다.
그리고 그 자리엔, 울창한 나뭇잎 사이사이 쏟아지는 햇빛을 등진 가녀린 인영이 등장했다.
“헉, 헉. 아까 네 뒤는 내가 지킨다고 했지?”
얼굴이 온통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오스칼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레오가 바닥에 쓰러져 누운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숲의 나뭇가지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오스칼의 얼굴에 비친 잎새의 그림자도 함께 일렁거렸다. 레오가 나무 사이로 비친 햇살에 눈이 부셔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
난투극이 얼추 마무리되자, 어디엔가 숨어 있던 예가네초프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타났다.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났다는 사실에 비로소 오스칼이 입꼬리를 올렸다.
“너, 대체. 이 피는…… 얼마나 다친 건가. 아픈 덴 없나.”
오스칼의 머리카락과 이마가 피로 흠뻑 물들어 온통 붉었다. 레오는 황급히 자신의 양 손바닥으로 오스칼의 얼굴을 붙잡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죽을 뻔했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아니면 오스칼이 뒤집어쓴 피 때문인지 그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거 내 피 아니야, 난 괜찮아.”
오스칼이 별 것 아니라는 듯 옷소매로 얼굴에 묻은 피를 쓱쓱 닦았다.
머쓱해진 레오가 오스칼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오스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 칼에 베인 것 같은데.”
레오가 오스칼의 목덜미 즈음에서 칼에 베인 듯한 상처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앗, 따거.”
오스칼의 앓는 소리에, 레오가 황급히 손가락을 움츠려 몸을 물렸다.
“미, 미안.”
“조금 베인 것뿐이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이놈들이 널 위협한다는 국왕의 끄나풀이야?”
오스칼이 자신이 베어 쓰러뜨린 남자의 시체를 보며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아마 그럴 거다. 최근 잠잠하다 했더니. 너와 단둘이 움직이는 걸 기회라고 생각했나 보군. 그들이 보기엔 이쪽 전력이 상당히 약해 보였을 테니까.”
“젠장, 한 놈쯤은 살려서 배후가 누군지 불도록 족쳤어야 했는데.”
오스칼의 걸걸한 표현에 레오는 조금 웃음이 났다. 생긴 건 계집애같이 곱상하게 생겼는데, 말투는 꼭 동네 건달 같았다.
“자네들 실력이 대단하더군. 하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없네.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이동하세나.”
눈치를 살피던 예가네초프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오스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가네초프가 당부의 말을 건넸다.
“숲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사악한 기운이 느껴질 거라네. 정신 바짝 차리게.”
그 말은 사실이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바닥에 낮게 깔린 차가운 공기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대지에서부터 올라오는 오싹한 기운이 다리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었다.
“흐읍.”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끔찍한 악취에 오스칼이 낮게 신음하며 숨을 참았다. 오물이 가득한 하수구 냄새 같았다.
“이, 이게 그 저주받은 버드나무?”
악취가 나는 방향을 따라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그곳에서 섬뜩한 기운이 흐르는 버드나무의 모습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