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클로드가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나 미끄러지듯 오스칼 앞으로 다가왔다.
“내게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너 따위가 내 심장에 걸린 저주의 속박을 풀 수 있다고?”
그가 내뿜는 이글거리는 기운에 레오가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혀 스파크가 일었다.
방안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이내 오스칼의 음성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갈랐다.
“그래. 내가 당신의 심장을 저주에서 풀어줄게. 그러니 나와 ‘피의 맹약’을 해. 어차피 당신도 손해 볼 것 없잖아.”
오스칼이 아는 한, 심장의 저주를 푸는 것이야말로 클로드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심장의 저주는 그가 500년 전 흑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 고대 마녀와 계약해 치른 대가였다.
저주를 위해 심장을 바친 후 그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잃어버렸고, 영원히 늙지도,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클로드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예상대로 클로드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이 애송이가 그 끔찍한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저주를 풀어내면 풀어내는 대로, 저주를 풀지 못하면 그것대로 좋았다.
피의 맹약을 맺는 이상, 애송이가 심장의 저주를 풀지 못하면 계약 위반으로 목숨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그의 입가에 잔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양피지와 깃펜이 나타났다.
“오스칼, 이건 함정이다.”
레오가 오스칼을 가로막고서 고개를 저었다. 클로드가 레오를 한번 흘긋 쳐다보더니, 이내 느릿하게 말했다.
“계약자는 계약 조건을 말하라.”
오스칼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레오의 눈을 바라보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가로막고 선 레오를 힘있게 밀어냈다. 오스칼은 차분하게 계약 조건을 읊었다.
“계약자 오스칼은 샤무아가 칼릭스 공작가의 반역 조작을 의뢰받은 계약서와 루이스터 대공의 피를 원한다. 클로드 드보이스의 심장을 대가로 지불하겠다.”
허공에서 깃펜이 스스로 움직였다. 신기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레오의 표정이 굳었다.
마침내 모든 기록이 끝나자, 클로드가 작은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피의 맹약을 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대가를 치르지 못하면 넌 고통스럽게 죽을 거다.”
클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오스칼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레오가 다급하게 오스칼의 팔을 붙잡았다.
“안돼. 네가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레오의 목소리가 초조한 듯 떨렸다. 그런 그에게 오스칼이 단호하게 말했다.
“필요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내 아버지의 일이니, 그럼 내가 계약자가 되겠다.”
레오의 말에 클로드가 눈을 길게 치켜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계약자가 될 건가. 계약의 이행은 반드시 계약자가 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지.”
“내가 이행하겠다. 그러니 나와 계약을 해.”
레오는 요지부동이었다. 오스칼을 붙든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오스칼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한숨을 한번 내쉰 오스칼은 결심한 듯 반대쪽 손을 뻗어 허리춤에 찬 단도를 뽑아 들었다.
스릉-
“오스칼 잠깐-!”
“윽.”
낮은 신음과 함께 재빠르게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낸 오스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에 떠 있는 깃펜을 집어 들어 자신의 피를 잉크 삼아 양피지에 서명했다.
그러자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듯 양피지에서 기묘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아무것도 없는 백지가 되었다.
클로드가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오스칼!”
오스칼의 돌발행동에 레오가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완성된 계약서를 어디론가 날려 보낸 클로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승리감에 찬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대되는군. 내 심장이든 네 목숨이든, 내겐 나쁠 것이 없으니까 말야.”
***
샤무아에서 빠져나온 레오가 오스칼을 붙들고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네가 한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알고 있는 건가?!”
“피의 맹약을 이행한다면 특별히 무모할 것도 없어.”
일그러진 레오의 표정과는 달리, 오스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레오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목숨이 달렸는데 무모할 게 없다고?
“그건, 내가 할 일이었다.”
“넌 그 심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계약을 이행하려고?”
“그럼 너는 그자의 심장을 찾을 수 있다는 건가.”
“아마도?”
오스칼의 심상한 대답에 레오가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책이라고는 없는 녀석이었다. 레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네 목숨을 걸었다고? 너란 녀석은!”
“이 방법이 최선이었거든.”
알고 있는 원작의 정보를 이용해서, 외전의 스토리를 진행하려면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대체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스칼에겐 이 계약으로 얻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왕국에서 잔악하기로 유명한 샤무아의 주인을 상대로 목숨을 건 얼토당토않은 맹세를 했다.
“그야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하니까.”
오스칼이 대답했다. 자신의 목표는 오직 그의 해피엔딩이었다.
“!”
오스칼의 대답에 레오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어, 우린 꽤 먼 길을 가야 하거든. 내 목숨을 클로드에게 바칠 생각이 아니라면, 내게 순순히 협조하는 게 좋을걸.”
씩씩한 목소리로 환하게 웃는 오스칼의 머리 위로 눈부신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정신없이 말을 달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수도에서 꽤 떨어진 작은 도시, ‘샤르트르’에 당도했다.
설명충 작가가 풀어 놓은 설정에 따르면, 클로드의 심장은 샤르트르에 위치한 ‘검은 숲’의 저주받은 버드나무에 봉인되어 있었다.
샤르트르는 마치 유령 도시 같았다. 풍파에 마모된 높은 건물들의 흔적만이 이곳이 과거에는 번영했던 도시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이런 곳에 클로드 드보이스의 심장이 있는 건가?”
레오가 을씨년스러운 마을의 풍경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마을 근처의 검은 숲에 있어. 하지만 그 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그 사람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해.”
오스칼은 마을을 가로질러 허름한 통나무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 쓰러져 가는 목조건물 이곳저곳에는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산다고?”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오스칼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문을 두드렸다.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꾀죄죄한 몰골의 노파가 문을 빼꼼히 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구쇼?”
하얗게 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주름진 얼굴을 한, 기묘한 분위기를 흘리는 자였다.
여러 가지 색이 번잡스럽게 섞인 낡아빠진 판초를 걸친 노파의 모습에, 오스칼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직 살아있었네.’
노파는 〈여스칼〉에서 등장하는 사기꾼 주술사 ‘예가네초프’였다.
그녀는 흑마법이라고는 전혀 사용할 줄 모르면서, 사람들을 상대로 효험도 없는 주술을 행하고 돈을 뜯어내 생활하던 자였다.
원작에서 사기 혐의로 주인공에게 체포될 뻔하자, 유령 도시 샤르트르로 도망쳤다.
“예가네초프, 당신한테 볼 일이 있어서 왔어.”
노파가 얼굴을 찡그렸다. 주름진 얼굴이 더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사람은 여기 없네.”
시치미를 뗀 예가네초프는 황급히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자 레오가 재빨리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을 닫는 것에 실패하자 그녀는 문 뒤에서 몸을 옹송그렸다. 오스칼이 레오에게 잘했다는 눈짓을 보낸 뒤 입을 열었다.
“당신이 좀 찾아줄 게 있어서 말이야. 검은 숲의 저주받은 버드나무 알지?”
오스칼의 말에 예가네초프의 잿빛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두려움에 이를 딱딱 부딪쳤다.
“그, 그런 사특한 것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썩 돌아가!”
소리를 지른 예가네초프가 강하게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 일엔 예가네초프가 필요했다. 예가네초프는 고대 마녀의 먼 후손으로, 마력은 없지만 마력 감수성이 있는 자였다.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길잡이 없이 검은 숲에 들어갔다간 길을 잃고 죽기 딱 좋았다.
이대로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오스칼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닫히는 문에 얼른 자신의 왼쪽 다리를 들이밀었다.
쾅-
오스칼의 종아리와 문이 제대로 부딪쳐 큰 파열음을 냈다. 낡은 나무문에 가해진 강한 충격에 땅이 울고 문도 울고 오스칼도 울었다.
“흐억.”
극심한 통증에 오스칼은 주저앉아 눈물을 찔끔 흘리며 신음했다. 두 사람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괘, 괜찮은가?”
레오가 당황한 듯 오스칼의 표정을 살피려 애썼다. 오스칼은 대답 대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발치를 움켜쥐던 오스칼이, 순식간에 레오의 외투 자락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동전으로 가득 찬 주머니를 꺼내 예가네초프에게 내밀었다.
“이 정도면 버드나무로 안내하는 대가로 충분하겠지.”
오스칼이 뻔뻔하게 씨익 웃어 보였다.
레오가 샤르트르로 이동하기 전 말을 빌리면서 값을 치를 때 꺼낸 돈주머니를 오스칼은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일부러 슬쩍 확인해둔 참이었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
레오는 그의 돈을 자기 돈처럼 꺼내 드는 오스칼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소곤거렸다.
“사기꾼을 움직이는 건 돈이거든.”
“뭐?”
황금만능주의가 공포심도 이기는 법이다. 귀신 나온다는 폐가도, 재개발 소문에는 없어서 못 판다니까.
벌컥-
어느새 문이 활짝 열렸다. 공포에 물들었던 예가네초프의 눈은 이제 먹잇감을 본 하이에나처럼 번들거리며 빛났다.
“친절히 모시겠네.”
흉측한 이를 보이며 자본주의 미소를 지은 예가네초프가 앞장서서 그들을 검은 숲으로 안내했다.
***
검은 숲은 어쩐지 이름처럼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아직 늦여름의 더위가 한창임에도 숲속은 서늘하니 한기가 돌았다.
“그 버드나무는 내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 때부터 이 숲에 있었지.
물론 그동안 자네들처럼 그 버드나무를 찾으러 간다는 사람이 가끔 있었어. 그 버드나무에 봉인된 것을 얻으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흑마법을 가질 수 있다더군.
그런데 나무를 찾으러 이 숲을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런 의미에서 날 동행으로 삼은 건 탁월한 선택이라네, 이래 봬도 내가 몇십 년 전에는 시에나에서…….”
전직 사기꾼 아니랄까 봐 예가네초프는 말이 참 많았다. 그 말을 흘려듣던 오스칼은 어쩐지 오싹한 기분에 숲을 둘러보며 예가네초프를 향해 물었다.
“이봐, 혹시 검은 숲에 귀신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
“흘흘, 자네 겁이 많은가 보군. 이곳에 그런 건 없다네.”
“그러면 다행이고.”
오스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귀신 이야기 같은 건 질색이었다.
“근데 왜 아까부터 뭔가 계속 날 지켜보는 것 같지.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 아니다.”
레오가 경계태세를 갖추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레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챈 오스칼이 주위를 살폈다.
“숲길로 들어선 이후, 여섯.”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음성에서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그가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오스칼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설마…… 누군가 우릴 노리는 거야?”
“아마 날 제거하려고 보낸 암살자들일 거다. 이 숲에선 누가 어떻게 죽어도 모를 곳이니까. 분명 숲이 더 깊어져 흑마법의 기운이 강해지기 전에 공격해올 거다.
내가 저들을 유인할 테니 그 틈에 넌 예가네초프를 데리고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해. 지금 네겐 그자가 꼭 필요하니까.”
“그럼 넌?”
“나는 놈들을 해치우고 뒤따라 갈 테니 먼저 가.”
잠깐, 이거 사망 플래그 대사잖아?
오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