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어느덧 기사단장이 자신의 보호장구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보호장구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의 근육들이 드러났다.
두툼하지만 육중하지는 않은, 섬세한 근육이었다.
“그럼 네 실력을 봐야겠지.”
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원들이 대열을 갖추어 응접실 가운데를 비운 채 둥글게 둘러섰다.
마티스가 팔짱을 끼고 한쪽 다리를 삐딱하게 선 채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청년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몇몇 단원들이 오스칼을 바라보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 자그마한 체구의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청년이 자신들의 단장을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청년들은 은밀하게 내기를 이어나갔다. 5초와 10초 중 고르라는 소리에, 너도나도 5초에 돈을 걸었다.
하지만 이 작은 소동이 오스칼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내가 정말 주인공 아드님이랑 대련을…? 덕후로선 성공했지만, 입단은 실패할 것 같은데….’
오스칼은 마티스가 건네주는 검을 받아들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섰다. 단장은 이미 준비태세를 갖춘 모양이었다. 어느새 응접실에는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입단에 실패하면 외전 공략도 끝이야.’
숨을 한번 들이쉰 오스칼이 비장하게 검을 움켜쥐었다.
“시작!”
마티스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세계관 최고의 ‘검수저’가 오스칼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의 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련이니만큼 비교적 여유롭게 검을 쓰는 것 같은데도, 힘, 기술, 순발력 그 무엇 하나 빠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다고.’
오스칼이 검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그리고 단숨에 그의 칼을 받아냈다. 두 사람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오스칼은 강하게 덤벼오는 그의 검을 몇 번이고 흘려보냈다. 그는 그런 오스칼의 검을 대번에 눈치챘다.
이번에는 힘을 빼고 검의 속도를 달리했다. 하지만 오스칼은 요리조리 검을 흘리며 그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피했다.
몇 번의 합이 흘렀다. 대련을 지켜보던 청년들이 소곤거리는 것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여유롭던 남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오스칼이 레오폴드의 약점을 찾아 빠르게 눈을 움직였다. 그녀의 예리한 눈은 마룻바닥에 난 옹이 자국에 그의 발이 걸리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스텝이 잠깐 어긋난 사이, 반대쪽의 생긴 빈 공간으로 잽싸게 파고든 오스칼의 검이 마침내 그의 목 가까이 닿았다.
‘이겼다! 검수저도 별거 아니잖아?’
오스칼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려는 찰나, 그가 살짝 꼬인 스텝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비틀었다.
“어?”
오스칼의 칼날에서 벗어난 그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목표를 놓친 오스칼이 당황했다.
펜싱 경기에서 등 뒤의 공격을 신경 써 본 적은 없었다. 잠시 뒤 뒷덜미에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나타난 그가 오스칼의 오른쪽 손목을 칼자루로 가볍게 타격하자, 그 충격에 검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검이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스칼의 왼팔이 등 뒤로 꺾여 몸이 앞으로 숙어졌다. 어느새 오스칼의 목덜미가 그의 칼날 아래에 놓였다.
“아악. 뒤에서 나타나 무기 뺏고 손쓰는 건 반칙 아니야?”
레오폴드의 제압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오스칼이 항의했다. 이거 대회에선 실격이라고!
“전장의 적이 규칙에 따라 고상하게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하나? 실전 경험은 별로 없나 보군.”
그의 무심한 듯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곧, 오스칼을 단단하게 붙들었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젠장.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비로소 그에게서 벗어난 오스칼이 욱신거리는 팔을 문지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검술은 테크닉은 뛰어나지만 ‘경기용’ 이었다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실전이다.
눈앞의 남자는 기술도, 생존을 위한 노련함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런 실력을 갖추기 위해 그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많은 실전을 경험해 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응접실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던 청년들의 표정이 묘했다.
‘아차… 나 졌구나….’
입단 실패와 함께 외전의 공략도 이대로 끝났다는 생각에 눈앞이 막막해졌다. 겨우 잡은 실낱같은 원작의 실마리였는데 이것마저 놓쳐버릴 줄이야.
‘제길!’
어찌할 새도 없이 무력하게 져버린 상황에 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 검을 시작한 이후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오스칼은 손등으로 눈을 비벼 뿌옇게 된 눈앞을 닦아 냈다.
마티스가 걸걸한 목소리를 냈다.
“너, 우냐? 팔 좀 꺾인 게 그렇게 아팠어?”
“누, 누가 아파서 운대? 대련에서 진 게 분해서 그래!”
오스칼이 억울하다는 듯 볼멘소리를 했다. 그 말에 마티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 역시 너 물건이구나? 과연 승부욕이랑 패기도 합격이야.”
“하, 합격이라고?”
“당연하지. 기사단의 입단 기준은 세 번 이상 그의 검을 받아내는 거야. 지금까지 입단 테스트에서 레오와 다섯 합 이상을 겨룬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마티스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련에서 이겨야 합격인 게 아니었어?”
“저 괴물 같은 녀석을 이기는 게 기준이면, 기사단에 가입할 사람이 없을걸? 잠깐이지만 레오 녀석 목에 칼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다니, 오늘 덕분에 진귀한 구경을 다 했다.”
마티스의 말에 오스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련을 지켜보던 청년들이 우르르 오스칼에게 다가왔다.
모두 흥분한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보기와 달리 대단한데?!”
“그런 기술은 어디서 배웠어?”
“검을 휘두르는 자세가 남다르던데?”
그때 등 뒤에서 레오폴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스칼이라 했나.”
그가 입을 열자 청년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오스칼에 대한 궁금증은 감추지 못한 눈치였다.
그런 청년들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오폴드는 무심한 목소리로 오스칼을 불러냈다.
“날 따라오지.”
‘좋아! 일단 주인공 곁에 잠입하는 건 성공이다!’
오스칼이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말없이 2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오스칼을 데려갔다.
달칵-
오스칼이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불길한 잠금쇠의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 소리에 등줄기가 서늘해진 오스칼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검을 찾았다.
아차! 아까 대련 중 무장이 해제된 채, 그를 따라온 것이 생각났다.
‘설마, 함정인 거야?’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검이 날아왔다. 오스칼이 손에 잡히는 대로 근처의 투구를 방패 삼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챙-
투구와 검이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간신히 검을 막아 낸 오스칼을 노려보며 레오폴드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네 정체를 밝혀라.”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네 정체를 밝혀.”
“정체를 밝히라니 그게 무슨 말…… 아니 우리 카, 칼은 놓고 얘기하시죠?”
오스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교도와 함께 있던 정체모를 녀석이 기사단에 가입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 그자의 실력이 내가 지난 10년간 본 어느 기사보다도 뛰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게 설마 전부 우연이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맹세코 정말 우연이거든요!”
“남루한 차림을 한 주제에, 네 검술은 귀족들이나 구사할 법한 고급 기술이었어. 실전 경험은 별로 없는 걸 보니 살아남기 위해 배운 검술도 아니더군. 국왕의 자객인가?”
“국왕이 보낸 자객이면 제가 이렇게 허술하게 무기도 없이 따라왔겠어요?”
아니 원래 펜싱이 귀족 결투에서 유래한 운동인데 어쩌라고!
“게다가 넌 우리 기사단의 이름도 알고 있었어. 이곳에 잠입한 목적이 뭐지?”
“아니 그건 그럴만한 사정이…!”
그는 무슨 변명을 해도 의심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투구를 겨눈 그의 칼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뭐든 생각해 내야 한다. 오스칼의 머릿속에서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는 데 써먹을 웹소설의 수많은 설정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혼물? 말도 안 되고. 육아물? 이것도 아니잖아. 악녀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고… 젠장, 성녀도 아니야!’
도움 안 되는 설정들이 줄줄이 폐기처분 되었다. 그녀를 노려보는 레오폴드의 눈이 형형했다. 이대로라면 소설 초반 주인공한테 끔살당하는 엑스트라 행이다.
‘가, 가족후회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설정에 오스칼이 외쳤다. 방법은 이것뿐이야!
“내, 내가 네 엄마…다!”
스타@즈의 다스베이더 같은 대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레오폴드가 마치 미친놈을 보듯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오스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일단 성공이었다. 어지간히 황당했던 모양인지, 그의 칼에 힘이 빠져 있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내가 네 엄마…!”
오스칼은 얼른 숨을 헙 들이쉬고 이어 내뱉었다.
“친구 아들이다….”
엄마라는 단어를 당당하게 외친 것에 비해, 친구 아들이라는 대목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엄마 친구 아들’에는 가족 관련 단어가 두 개나 들어가니까, 일단 날 죽여서 가족 후회물 만들고 싶지 않으면 좀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