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오스칼의 목소리에 근처에서 이교도들의 시체를 살피던 기사단장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심연과도 같은 그의 검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오스칼이 황급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시선이 닿은 그의 목덜미 아래에서 녹색의 펜던트가 반짝였다.
“좋아. 하지만 잘 생각해 봐.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하고. 우리 기사단 이름은….”
부단장 마티스가 뭐라고 말을 보태고 있었지만, 오스칼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남자의 펜던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뤼, 뤼미에르?!”
남자의 펜던트를 알아본 오스칼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바로 삽화로도 구현된 〈여스칼〉의 주요 아이템이었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였지만, 로맨스는 실종된 〈여스칼〉에서 독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주인공이 여자란 사실을 알고 있던 근위대장 세드릭 칼릭스와 주인공 사이에 간간이 피어나는 ‘썸’이었다.
그러나 연재 당시 두 사람의 ‘키갈’을 외치던 독자들의 원성이 무색하게도, 키스는커녕 포옹 장면조차 나오지 않아, 스릴러 장르도 이것보다는 질척하겠다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었다.
그런 원작에서, 남자주인공 세드릭이 가문에서 내려오는 녹색의 보석 ‘뤼미에르’를 여자주인공에게 건네며 마음을 전달하는 장면은 소설의 유일한 로맨스 기류였다.
소설 속 로맨스 기근이 이어지자, 단행본 버전에서는 〈여스칼〉이 로맨스 판타지 장르라는 것을 강조라도 하듯이 보석의 삽화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의 집을 ‘뤼미에르 가옥’이라고 부를 만큼 그 보석을 아꼈다.
“너, 우리 기사단 이름을 알고 있었어?”
마티스가 깜짝 놀란 듯 물었다. 〈여스칼〉의 주요 아이템이 등장한 것도 모자라, 기사단의 이름마저도 뤼미에르인 모양이었다. 이건 애독자라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형 떡밥이었다.
떡밥을 던지면 받아먹는 게 인지상정.
“생각이 바뀌었어요. 가입할게요. 기사단!”
오스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드디어, 외전의 실마리를 찾았다.
***
신입 기사를 받을 생각에 싱글벙글한 부단장 마티스와는 달리, 기사단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눈을 찡그렸을 뿐이었다.
오스칼의 입단을 위해 기사단 본부로 가는 동안, 마티스는 기꺼이 오스칼을 자신의 말에 태워주었다. 천천히 말을 몰던 마티스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오스칼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우리가 뤼미에르 기사단이란 건 어떻게 알았어?”
“아…. 그건….”
〈여스칼〉의 1호 팬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스칼은 눈을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요.”
“아, 우리가 왕국 기사단일 때 들었나 보지?”
왕국 기사단? 오스칼은 눈을 반짝였다. 왕국 기사단이라면 〈여스칼〉의 주인공, 오스칼이 활동하던 무대가 아닌가?
“어… 네네. 이제는 왕국 기사단이 아닌가요?”
“사람들은 우리를 ‘버림받은 기사단’이라고 불러. 처음엔 왕국 기사단 소속이었지. 물론 평민들로 이루어진 하급 기사단이라 처우도 형편없었지만 다들 왕국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견뎠는데….”
마티스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평민 출신의 기사들은 쓸모없다고 국왕이 우리 기사단을 왕국 기사단에서 내쫓았어.”
“네?”
오스칼이 놀라 되물었다. 원작으로부터 25년이 지난 후라면 현 라인하트의 국왕은 분명〈여스칼〉 원작의 왕세자일 텐데?
마티스는 분한 듯 얼굴을 붉히고 고삐를 쥔 손을 부들거렸다.
“군기가 빠져서 고상한 일에만 나서는 왕실 근위대 녀석들보다 우리가 험지를 다니며 훨씬 고생을 많이 했는데 말이야!”
왕실이라면 치가 떨리는 듯 불만을 늘어놓던 마티스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고 가슴을 퉁퉁 두들겼다.
“비공식이긴 하지만, 왕국 기사단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우린 어엿하게 기사단 활동을 하고 있지.
가끔 용병 같은 일도 하지만, 다들 왕국을 지키는 기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기사단이 해산되고 우왕좌왕하던 우리를 하나로 모은 게 바로 저기 레오 녀석이야.”
마티스가 저만치 앞서 말을 모는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를 가리켰다.
“단장의 이름이 레오인가요?”
“아, 제대로 소개해주지 않았구나. 녀석의 정식 이름은 레오폴드 칼릭스야.”
“칼릭… 뭐라고요?!”
오스칼이 말 위에서 펄쩍 뛰었다. 오스칼의 움직임에 놀랐는지 말이 낮게 투레질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마티스가 놀라 걱정 어린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지만, 오스칼의 귀에는 영 닿지 못했다.
‘저 남자의 성이 칼릭스라고?!’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했다. 오스칼이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듯 물었다.
“그… 저분 목에 걸린 펜던트가 눈에 띄던데… 혹시 뭔지 알아요…?”
“하하, 너도 봤냐? 나도 처음엔 사내 녀석이 뭐 저런 걸 하고 있나 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래. 자기를 지켜주는 부적이라나? 지금까지 저 녀석이 살아남은 걸 보니 정말 효험이 있나 싶기도 하고.”
마티스가 껄껄 웃었다. 하지만 오스칼은 웃을 수가 없었다.
원작 주인공의 물건을 어머니의 유품으로 가진, ‘칼릭스’를 성으로 쓰는 남자. 이 정도면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했다. ‘레오폴드 칼릭스’라는 남자는 틀림없이 원작 주인공들의 아들이었다.
‘아니, 둘이 썸만 탔던 거 아니야? 언제 아들까지 낳았어?!’
오스칼이 다시 한번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원작에서 키스도 한번 안 했던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있었을 줄이야. 설마 주인공이 왕실 근위대를 잠시 떠나있었던 게, 출산 때문이었나?
‘아니 작가님! 이런 어마어마한 설정이 있었으면 본편에서 풀었어야지요. 소설에서는 그 흔한 ‘짹짹짹’ 씬도 없었잖아요. 왜 이 좋은 걸 혼자만 알고 있냐고요.’
‘금’ 중의 ‘금’은 황금, 소금, 19금이라는 말도 있는데, 역시 망한 작품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작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충격이 가시자, 이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그 대단한 칼릭스 가의 아들이 평민 기사단에 들어간 거야?’
따지고 보면 레오폴드 칼릭스라는 남자는 〈여스칼〉 세계관 최고의 혈통을 가진 ‘검수저’ 중의 ‘검수저’였다.
아버지는 공작 가문 출신의 왕실 근위대장이었고, 어머니는 주인공 버프를 빵빵하게 받은 세계관 최강자 여기사이자, 반역자들로부터 국왕을 구한 영웅이었다.
검투 마니아 작가의 입맛에 딱 맞는 설정에 원작 주인공의 아들, 거기다 흑발의 미남자라니! 웹소설 고인물의 예감은 그가 이 외전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작가의 아들인 주인공이 평민이라니?
원작과 외전 사이에 뭔가 단단히 잘못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오스칼은 기사단 본부로 향하는 흔들거리는 말 위에 앉아, 앞서가는 아드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여스칼〉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도, 외전의 스토리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오스칼의 뒤에서 마티스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려면 입단 테스트를 거쳐야 해. 꽤 어렵지만,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뭐요? 입단하라고 스카웃 제의를 할 때는 언제고, 테스트?
오스칼이 황당한 표정으로 마티스를 돌아보았다. 마티스는 그런 오스칼의 시선을 외면하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드디어 본부에 도착했군.”
***
본부라고 불린 건물은 아담한 2층의 벽돌집이었다. 오스칼의 입이 벌어졌다.
‘이건, 뤼미에르 가옥이잖아?’
오스칼이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소설 속 삽화에서 보았던 바로 그 아름다운 집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붉은 벽돌과 작은 창문, 이름 모를 들꽃이 심어진 정원까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기사단 사람들을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서자 응접실과 사무실 그 어디쯤의 역할을 할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한쪽 벽에는 벽난로가, 방의 가운데는 큼지막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수수하지만 깔끔한 공간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테이블 곁에서 초조한 표정을 하고 둘러앉아 있던 청년 몇 명이 벌떡 일어섰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단장님. 돌아오실 시간이 지났는데 오시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레오의 실력을 몰라서 그래? 뭘 그리 걱정해.”
이내 뒤따라 들어온 마티스가 청년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요즘 이교도 세력이 무서운 속도로 커지고 있지 않습니까.”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맞아. 오늘 튈르리를 습격한 이교도 무리도 무려 열세 명이었어. 물론 레오가 모두 해치워버리긴 했지만.”
“왕실 근위대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니, 이교도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한 청년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단장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니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나, 드미트리.”
마티스가 드미트리라는 이름으로 불린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누굽니까.”
가장 어려 보이는 청년이 오스칼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티스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이쪽은 오스칼이야. 오늘 입단 테스트를 할 녀석이지.”
“예? 이런 비실비실해 보이는 녀석이요?”
오스칼이 그 말을 한 청년을 쏘아보았다. 청년은 그 눈빛에 아차 싶은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른 기사단원들 역시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칼은 ‘기사단’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체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반면, 이곳의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이었다.
“제라드, 겉과 속이 다른 경우도 있는 법이야.”
마티스가 청년을 향해 싱글거리며 웃었다.
대체 입단 테스트라는 게 뭔데 다들 미덥지 못한 얼굴들일까. 많이 위험한 종류의 테스트일까. 오스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때 잘 해낼 수 있지?”
“뭐, 뭘요?”
툭툭 오스칼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리는 마티스 뒤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어느새 단장이 오스칼을 똑바로 응시한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설마… 입단 테스트라는 게….”
“레오와 대련하는 게 우리 기사단의 입단 절차야. 나도 네 실력이 궁금한데?”
마티스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스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더러, 세계관 최고 검수저랑 대련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