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여스칼〉의 메인 사건은 국왕의 이복동생인 ‘루이스터 대공’의 반역이다.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루이스터 대공은 국왕과 왕세자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국왕에 충성하던 칼릭스 공작가에 반역 누명을 씌워 없애버리고, 이교도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칼릭스 공작가의 차남이자 왕실 근위대장인 남자주인공 ‘세드릭 칼릭스’는 그렇게 루이스터 대공의 흉계에 튈르리 감옥에 갇혀 죽는다.
이에 상심한 여자주인공 오스칼은 근위대를 떠났지만, 국왕이 위험에 빠지자 다시 돌아와 왕의 친동생 아르투아 대공과 협력하여 라인하트 왕실을 구한다.
그러나 오스칼은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으로 사망하고 소설은 끝난다.
리나가 달달 외우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원작의 내용을 몽땅 외운들 무슨 소용이냐고! 모든 사건이 끝나버린 뒤인데…!”
원작을 버전별로 정독, 숙독, N독까지 완료한 넘버원 독자인 자신을 기본 설정값도 알려주지 않고 소설에 빙의시키면서, 소설이 끝난 세계에 던져놓다니!
애독자 버프가 없는 빙의물이 말이 되냐고? 게다가 주인공인 오스칼이 죽고 난 뒤의 〈여기사 오스칼 〉 외전이라니, 이게 무슨 지독한 컨셉인가.
“외전이라니…. 내가 외전에 빙의했다니….”
아득해진 머리로 정처 없이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리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좀 전까지는 꽤 번화한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대로변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길 위에 서 있었다.
어디선가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거친 말투를 한 사내들의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안감에 리나의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젠장, 계획이 실패했다고?”
“다 잡은 고기를! 우린 꼼짝없이 혼날 거야.”
“얼레? 뭐야 저건?”
이내 걸걸한 목소리들이 가까워지더니, 복면을 쓴 십여 명의 남자들이 리나의 주위를 에워쌌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살롱에서 마주친 이교도 습격자들의 한패임이 틀림없었다.
“저 녀석 우리 이야기 다 들은 거 아냐?”
‘젠장, 망할 세계관 같으니.’
최애작을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남들은 최애 소설 속에 빙의하면 아리따운 귀족 영애가 되어, 황태자니, 공작님이니 하는 남주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현생에서는 엄두도 못 낼 화려한 삶을 누리기도 하건만.
리나는 검투 마니아 작가의 세계관에 빙의한 탓에, 빙의 첫날부터 칼부림만 벌써 두 번째였다. 리나가 속으로 남자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모두 열 한 명이었다.
“아이고, 꼬맹이가 늦은 시간에 혼자 길을 걸어 다니면 쓰나.”
복면을 쓴 남자 중 한 명이 낄낄거리며 말을 붙였다. 짧은 머리에 남성복을 입은 리나를 소년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리나는 칼을 몸 앞으로 빼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냥 길을 가던 중이었어요. 비켜주시죠.”
침착하게 남자들을 상대했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은 리나를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쭈, 칼까지 있어? 엄마가 늦은 시간엔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어디 보자, 차림새를 보아하니 가진 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사지 멀쩡한 꼬맹이면 노예로 팔아버릴까.”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색다른 취미가 있는 노친네들한테도 먹힐 것 같은데.”
“우리가 먼저 좀 써볼 수도 있지 않겠어? 크크크.”
복면 밖으로 드러난 남자들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이글거렸다. 남자들의 저질스러운 말들을 듣고 있자니 리나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자들이 이교도 세력이 맞다면, 자신은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여스칼〉에서 흑마법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은 약탈과 인신매매를 자금줄로 하는 자들이었다.
“…어? 이 녀석 옷에 피가 묻어있어!”
“뭐?!”
“이 녀석 뭐 하는 녀석이냐?”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짓하자 두세 명의 남자들이 리나를 붙잡으려 다가왔다. 리나는 칼을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쯤은 손쉽게 제압하리라 생각하고 다가오던 남자들이 리나의 칼에 베여 쓰러지자, 나머지 사내들이 눈을 흉포하게 뜨며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어디서 온 놈이냐?!”
‘역시, 〈금수저 공녀님은 역하렘을 좋아합니다〉를 인생작으로 삼을 걸 그랬어.’
리나는 다시 한번 〈여스칼〉의 가혹한 세계관을 원망했다. 작가의 검투에 대한 집착은 외전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모양이었다. 세계관 최강자였던 원작의 주인공도 열한 명의 적과 싸운 적은 없었으니까.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손끝에는 아직 사람을 베어낸 감각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진짜 검에 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칼날이 들어왔다. 아무리 리나라 해도 무장한 열 명 남짓의 남자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겨우 운 좋게 급소는 피했으나, 팔다리 여기저기가 칼에 베여 쓰라렸다.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에서 검의 손잡이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마침내 한 남자가 거칠게 리나의 칼날을 쳐내자, 검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제 자신을 지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여기서 죽는구나.’
다음 생에선 반드시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를 최애작으로 삼겠다고 다짐하며 리나가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크억!”
리나를 공격하려던 남자가 목이 막히는 듯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져 쓰러졌다. 나머지 남자들 역시 저항할 겨를도 없이 피를 뿜으며 바닥을 굴렀다.
뜻밖의 전개에 리나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쌓여있었다. 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남자들 너머로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쏟아지는 석양빛이 눈부셔 눈을 찡그렸다. 해거름 전 타오르는 태양 앞에, 말을 탄 형상의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웠다. 그림자 속에서 리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석양을 등지고 선 남자의 인영이 말을 걸었다.
“죽지는 않은 것 같군.”
구원자의 목소리였다.
***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리나는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말에서 내린 남자는 몸을 숙여 리나의 상태를 살폈다.
날카로우면서도 사내다운 굴곡의 얼굴을 한 그의 외모에서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체격 역시 압도적이었다.
보호장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보호장구 너머의 가슴과 어깨 근육 역시 보기 드물게 탄탄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숱 많은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빛나는 까만 눈동자가 그의 흰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자들은 튈르리를 습격한 이교도들이다. 요즘 같은 시기엔 인적이 드문 곳은 혼자 다니지 않는 게 좋아.”
손을 뻗어 리나의 팔과 다리에 난 상처를 들춰보던 남자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의 시선이 별다른 감정 없이 담담하게 리나의 상처를 스쳤다.
“고, 고맙습….”
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뒤돌아섰다. 더는 리나에게 볼일이 없다는 태도였다. 괜히 머쓱해진 리나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주섬주섬 일어났다.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남자들이 말을 몰아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단장님, 상황은 전부 종료되었습니다. 이교도들이 튈르리에서 탈취한 무기들도 전부 회수했습니다.”
“그래. 모두 몇 명이지?”
“총 열 한 명입니다. 저희가 도착하기 전 이미 세 명은 죽어있는 상태였습니다. ”
남자의 보고에, 단장이라 불린 흑발의 남자가 리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가냘픈 체구에 예쁘장한 얼굴을 한 청년이 피 묻은 검을 손에 단단히 쥐고 있었다.
“튈르리 근처 살롱의 시체 두 구까지, 전부 열셋이로군.”
그는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기욤, 이 자가 다친 것 같으니 치료를 부탁하지. 치료하고 큰길까지 데려다주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리나의 몸 군데군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다지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붉은 머리의 기욤은 말안장에 메인 가방에서 상처를 치료할 적당한 도구를 꺼내왔다. 리나가 얌전히 앉아 치료를 받고 있자니,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진 갈색 머리의 남자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설마 여기 먼저 쓰러져 있던 세 놈은 네가 해치운 거야?”
남자의 물음에 리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꽤 대단한걸? 혼자서 이놈들을 상대하고 이 정도 가벼운 상처만 남았다니.”
“운이 좋았어요.”
리나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이 정도 실력을 갖출 정도면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는 건 어때?”
“제가 다른 할 일이 많아서 거절하겠습니다.”
리나는 자세한 설명을 듣기도 전에 남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의 초라한 차림새로 보아, 기사단이라고 해봤자 평민들로 이루어진 하급 기사단일 게 뻔했다.
‘외전에 빙의했어도, 원리는 똑같겠지.’
리나는 처음 생각한 대로, 외전의 주인공을 찾아볼 작정이었다.
〈여스칼〉 원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주인공이라면 귀족이거나 적어도 왕실 근위대에 소속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왕실 근위대나 귀족 기사단이라면 모를까, 굳이 평민 기사단에 합류할 이유는 없었다.
리나의 거절에 갈색 머리의 남자가 아쉬움이 묻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난 기사단의 부단장 마티스 빅토르라고 한다.”
“아, 내 이름은….”
리나는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해야 할지 망설였다. 빙의한 영애의 이름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고리나’라고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 달리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결국, 리나는 종일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이름을 말했다.
“오스칼.”
생각나는 대로 뱉은 이름이건만, 그 이름을 말하자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생각해 보니, 남장을 한 채 〈여스칼〉의 세계 속을 헤매는 자신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었다.
“오스칼이에요. 내 이름!”
리나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운명과도 같은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소리내어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내 이름은 오스칼로 정했어!’
그렇게 리나는 오스칼이 되어 마티스에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