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 카테고리에 버젓이 걸려있으면서도, 주인공들의 검투에 지독하게 집착해 매회 검투씬을 넣어대던 탓에, ‘검투 마니아’라고 불리던 〈여스칼〉 작가가 ‘이교도들의 습격’이라는 신나는 상황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얇고 긴 검날을 조명에 비추며 리나는 검을 휘둘러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검은 리나가 들기 알맞게 가벼웠다. 검날도 무디지 않아 충분히 리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터였다.
“아, 아니 마드모아젤, 지금 뭐 하는 건가?”
제멋대로 잘려나간 드레스 자락 사이로 리나의 다리가 훤히 드러나자, 남자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여스칼〉의 세계관은 꽤 보수적이었다.
리나는 남자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머지 칼을 마저 들었다.
“검, 쓸 줄 알아요?”
남자는 찡그린 표정으로 왼손으로 피가 흐르는 오른쪽 어깨를 간신히 붙잡고 섰다. 금으로 된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흰 재킷 코트의 오른쪽 소매는 이미 피로 흥건했다.
출혈이 꽤 큰 모양인지, 남자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파리해 지고 있었다.
“그 모습으로는 어렵겠네요.”
크게 다친 남자 때문이라도 더는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제 나가죠.”
검을 손에 쥔 것뿐인데도 어쩐지 리나는 아까보다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살롱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드나드는 문인데, 이 건물 복도로 연결돼.”
남자와 리나는 허리를 숙여 문을 빠져나왔다. 문을 빠져나오자, 좁은 복도가 나왔다. 좁은 복도 한쪽 끝에 바깥과 연결된 출입구가 보였다.
“여기 놈이 살아있다!”
두 사람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반대쪽 복도 끝에서 복면을 쓴 사내가 나타났다. 살롱에 폭탄을 터뜨린 이교도 습격자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타다닥-
복면을 쓴 습격자는 한 손에 장검을 들고, 그들을 단칼에 베어낼 기세로 달려왔다.
설상가상으로 습격자의 고함을 들었는지, 먼 곳에서부터 다른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나는 본능적으로 금발 머리 남자의 다치지 않은 왼쪽 팔을 잡아채 자신의 뒤로 물렸다.
금발 머리의 남자는 순식간에 리나의 등 뒤에 숨은 모양새가 되었다.
‘쫄 것 없어 고리나. 검이라면 져 본 적 없잖아. 경기라고 생각하면 돼.’
리나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한 번도 검으로 사람을 베어본 적은 없었지만, 분명 저 남자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검사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손에 쥔 검을 다시 한번 단단히 고쳐 잡으며 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빙의한 영애의 순진했던 눈망울은 어느새 날카로운 검사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습격자는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검을 휘둘러 왔다. 큰 덩치만큼 완력도 강한지, 그가 허공에 칼을 휘두를 때마다 ‘휙휙’ 하는 무서운 바람 소리가 났다.
눈앞의 남자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상황은 활자 속 검투 장면이 아니었다. 죽고, 죽이는 것이 현실이 된 지금, 리나는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었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엔 훈련만 하는 대한민국의 운동선수를 무시하지 말라고.’
리나는 남자의 공격 방향을 읽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평생 상대의 검을 분석해 온 그녀였다.
‘읽었다!’
리나가 그의 공격을 반 박자 빨리 피했다. 남자의 칼은 리나가 방금까지 서 있었던 허공을 갈랐다.
허공에 칼질한 남자가 잠시 주춤거렸다. 리나가 빠른 템포의 스텝으로 남자를 압박하듯 찌르자 남자가 몸을 비틀거렸다.
귀족 영애가 자신의 공격을 받아 쳐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습격자가 당황한 사이 리나는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칼을 움직였다.
‘마르쉐 팡트(전진 후 찌르기), 다음엔 데가즈망 (상대방의 칼을 피해 찌르기)!’
뛰어난 스피드로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기술은 리나의 특기였다. 드디어 리나의 칼이 남자의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크헉!”
좁은 복도에서 육중한 몸을 뒤뚱거리며 비틀대던 남자는 제대로 방어해보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바닥에 늘어진 남자의 몸 뒤로 복면을 쓴 다른 습격자의 모습이 보였다.
“죽어라!”
동료가 쓰러진 것을 목격한 습격자는,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에스뀌브!(몸을 빠르게 이동하여 상대의 공격을 피함)’
리나가 재빨리 머리를 숙여 그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남자가 휘두른 칼날에 스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사락-
칼이 지나간 자리로 머리숱의 절반이 끊어져 후두둑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리나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 칼이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을 스쳤다면 즉사했겠지.’
리나는 몸을 재빠르게 뒤로 물렸다가 남자가 내리치는 칼을 비스듬한 각도로 쳐냈다. 리나의 기술적인 공격에, 남자가 몸을 휘청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리나가 순식간에 남자의 급소를 베었다. 습격자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어느덧 주위가 고요해지고, 헐떡이는 그녀의 숨소리만 들렸다. 숨을 몰아쉰 리나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정말 사람을 죽인 건가?’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제 손에 남아 있는 사람을 벤 감각과 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이, 이곳이 바로 〈여스칼〉의 세계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이 실감 난 리나가 손에 쥔 검을 바라보았다.
검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현실이 아닌 듯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대로 정신을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면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당신…… 대체 뭐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를 다시 현실로 데려다 놓았다. 리나는 그제야 금발 남자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리나를 바라보았다.
***
금발의 남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리나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대답 대신 쓰러진 습격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좋아, 이것이 내 현실이라면 제대로 살아내야지.
“거기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옷 벗기는 것 좀 도와줘요.”
“마드모아젤은 조금 전엔 자기 옷을 찢더니, 이제 다른 남자 옷을 벗기는 건가.”
남자는 마치 변태라도 보는 듯한 환멸스러운 표정으로 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렇게 찢어진 드레스 차림을 하고 밖에 나가란 말이에요? 당신 옷 벗어줄 거 아니면 좀 도와주죠?”
남자는 리나의 말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잠자코 쓰러진 남자의 윗도리를 벗겨내는 것을 도왔다.
찢어진 드레스 아래로 습격자로부터 벗겨낸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은 리나는 금발의 남자가 건넨 윗도리를 받아 들고는, 바지춤에 걸려있던 단도를 뽑아 남자에게 내밀었다.
“드레스 뒤쪽으로 잠겨진 단추랑 끈 좀 베어줘요, 이게 혼자서는 벗을 수도 없는 옷이네.”
리나는 남자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금발의 남자는 다시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마드모아젤, 그대는 부, 부끄러움도 모르는 건가, 외간 남자에게 이게 대체 뭐 하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마드모아젤한테 목숨을 구했으면 그냥 협조하시죠? 아니면 저기 누워있는 외간 남자들처럼 되고 싶어요?”
입씨름이라도 하자는 것인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금발 남자에게 리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흠흠.”
남자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번 하고, 리나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옷을 베어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답답한 옷이 벗겨지자 리나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옷을 마저 챙겨 입은 리나는 남자에게 단도를 돌려받았다. 그리고는 남아 있는 긴 머리카락을 잡고 한 움큼을 끊어냈다.
남자가 또다시 시작된 마드모아젤의 기행에 뭐라고 말을 얹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자 리나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왜요? 반만 짧은 머리로 있으면, 미친 사람 같아 보이지 않겠어요?”
남자는 잠자코 입술을 다물었지만 미묘한 시선만은 거두지 않았다.
리나가 창문에 비친 제 모습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아리땁던 귀족 영애는 어느새 남루한 평민 남자로 착각할 만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리나는 목덜미를 겨우 덮는 머리칼을 어색하게 쓸어내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우선 살고 봐야지. 어쩌겠냐고.’
안색이 점점 더 나빠지는 남자를 부축한 채 건물을 빠져나오자 고풍스러운 서양식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생경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리나는 다시 한번 소설 속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빙의물의 두 번째 법칙, 내가 누구에게 빙의했는지 모르겠거든 옆 사람에게 물어라.〉
‘빙의물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누구에 빙의했는지부터 파악해야 해. 그래야 내가 가진 정보를 적재적소에 써먹지.’
다른 빙의물에서는 몸이 가진 기억을 가지고 시작하거나, 아침에 눈을 뜨면 하녀가 다가와 이름을 부르면서 빙의자의 기본 설정값을 알려주기도 하건만, 자신에게 그런 어드밴티지는 적용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빙의 당시 살롱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명을 달리했으니, 이 금발의 남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저기….”
남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리나의 어깨가 묵직해지더니, 리나에게 기대어 서 있던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 어! 이봐요!”
리나가 깜짝 놀라 남자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 핏물이 흥건했다. 남자는 과다출혈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정신 좀 차려봐요!”
리나가 바닥에 쓰러진 그의 뺨을 두드렸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남자를 보며 리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딘가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
“주, 주인님!”
그때, 멀리서 한 남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는 얼굴이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상태였다. 주인님이라는 호칭과 차림새를 보니 이 남자의 집사쯤 되는 사람 같았다.
“저기요 이 사람의 사용인이세요? 폭발로 팔을 다친 것 같은데, 출혈이 심해요. 방금 의식을 잃고 쓰러졌어요. 빨리 치료를 해야….”
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수신호를 했다.
그러자 멀리서 마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와 마부는 리나에게서 남자를 빼앗듯 들어 마차로 옮겼다. 그리고는 재빨리 마차를 몰아 사라져버렸다.
“어… 어….”
눈 깜짝할 사이에 혼자 거리에 남게 된 리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허망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뭐야 진짜 간 거야? 이렇게 나만 두고서…? 빙의물에서 내가 누군지도 안 알려주는 거…… 반칙 아니야?’
결국, 빙의 후, 튜토리얼을 막 끝낸 리나에게 남은 건 처량한 몰골과 피가 잔뜩 묻은 세검뿐이었다. 자신이나, 함께 있던 금발 남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셨어요?’나 ‘세상에…! 가주님!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어요!’ 같은 게 아니고, 그냥 거지꼴로 빙의 시작이라고…?!”
날벼락 같은 상황에 심호흡을 한 리나가 생각을 정리했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이 상황은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여스칼〉의 메인 사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금발 남자와 빙의한 영애의 인상착의가 낯설었다.
〈여스칼〉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리나가 금방 떠올리지 못하는 인물이라면,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었다.
1.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음.
2. 소설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음.
즉, 두 사람 모두 소설의 메인 사건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라는 것. 리나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거 그거구먼! 엑스트라에 빙의. 클리셰네!”
〈빙의물의 세 번째 법칙. 엑스트라에 빙의했더라도 메인 등장인물을 찾아가라.〉
소설에 빙의하면 주인공이든 악역이든 극을 이끌어 가는 메인 캐릭터를 찾아서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이 빙의물의 불문율이다.
“일단 주인공부터 찾아가 보자. 기왕 빙의했으면 누려야지. 드디어 내가 성덕이 되는구나!”
리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거리의 빈 가게에서 달력을 찾아냈다. 지금이 몇 년도인지만 알면 대략적인 소설의 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소설이 끝난 시점이 외우기 쉽게도 라인하트력 1004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 내용은 머릿속에 훤하니까, 최애작 빙의 공략쯤은 식은 죽 먹기지.’
리나가 설레는 마음으로 달력을 들어 날짜를 읽었다. 달력에 쓰인 문자는 다른 세계의 문자였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라인하트력 1029년]
믿을 수 없는 숫자에 리나가 눈을 비볐다. 내가 잘못 읽은 거겠지?
리나가 눈을 깜빡여 다시 한번 달력의 글자를 읽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말도 안 돼……. 소설이 끝난 지 25년이나 지났다고?”
리나의 손에서 달력이 빠져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여스칼〉을 읽으며 상상한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죽어 사라진 소설 이후의 세계를 떠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순간, 작가의 이메일 내용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독자님 성원에 힘입어 오래전부터 외전도 출간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뜻대로 잘 안되네요.]
“설마 내가 빙의한 소설이…… 원작이 아니라 작가님이 준비하고 있다는 외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