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09)화 (109/123)

제109화

“사랑하지 않는다면 화가 나지도 않았겠지!”

깨달음을 얻은 나를 두고 미나는 대놓고 핀잔을 줬다.

“……아가씨가 일하던 빵집에서 불이 났다고 했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거예요.”

“아!”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겨 주세요. 아가씨는 제 전부니까요.”

“……사랑해, 미나!”

안겨 드는 나를 기꺼이 맞이하며 미나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저도 아가씨를 너무너무 사랑한답니다.”

순간 눈물이 울컥 나려는 걸 애써 참았다.

라이언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고마워.”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거니까.

“덕분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아가씨는 분명 해내실 수 있어요!”

그렇게 미나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오늘의 이 계획을 세웠다.

* * *

“일부러 기만하신 겁니까?”

테세우스는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만해.”

하지만 지젤 왕녀가 직접 그를 말리고 나섰다.

“하오나!”

“아스타로테 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어.”

다행히 왕녀는 내가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그러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두 사람 다 한숨도 못 잔 모양이네요.”

나는 곧장 어제의 그 부부를 다시 불러들였다.

어젯밤에 심하게 다툰 건지 둘 다 안색이 좋지 않다.

특히나 금방이라도 올 것 같은 아내를 앞에 두고 나는 대뜸 물었다.

“남편의 장점 세 가지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장점이요?”

“응.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가지면 충분해요.”

아내는 잠시 고민한 후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성실합니다. 영주의 역할에 충실하고 부모님께 예의가 바르며 말을 매우 잘 탑니다.”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에게 다시 물었다.

“남편과 결혼한 걸 후회하나요?”

아내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 망설이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격양된 남편의 항의에 이번에는 타깃을 바꿔 남편에게 물었다.

“어제부터 궁금했어요. 남편은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부부들 사이에서는 외도를 일부러 눈감는 경우도 많다.

만약 귀족의 명예 때문에 문제 삼은 거라면 애초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뒤늦게 듣긴 했지만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질투한 거죠?”

심지어 남들 입에 오르내릴 걸 알면서도 굳이 물어봤다는 건 분명…….

“나는 이 사람이 좋은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상하죠.”

“저는……!”

정곡을 찔린 남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빈말이라도 지금은 나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 아닌가요?”

애초에 애정이 없다면 질투도 하지 않을 텐데.

남편은 행여나 아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 게 아닐까 두려웠을 터.

“여보.”

생각지도 못했던 건지, 아내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채 남편에게 다가섰다.

“그런 거였어요?”

“…….”

저쪽은 잘 해결될 것 같으니 나는 고개를 돌려 왕녀 쪽을 바라봤다.

“왕녀께도 여쭤보죠. 전하께서는 아바마마가 좋으신가요, 어마마마가 좋으신가요?”

“그건!”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왕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역시나 플로리아 언니와 비슷하다. 고민에 빠지는 왕녀 앞에서 나는 일장 연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물과 공기 중 하나를 고를 수 없듯이 사람의 마음도 절대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죠.”

“아스타로테 님, 당신은…….”

“미래는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운명은 고정된 게 아니라고.

아빠를 구하고, 언니를 구하고, 모두를 지켜 낸 것처럼.

이번에는 분명 무언가를 바꿔 보겠노라고.

“나는 정해진 운명 따위에 굴복하지 않을 거니까요.”

내 말을 들은 왕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 정확한 자리를 찾아왔음에도 리본을 찾지 못했다는 것.

자신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린 것까지도.

“……그래서 화가 나신 거군요.”

“왕녀 전하의 능력은 대단하지만, 저처럼 악용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 맹신해서는 곤란하다고.

왕녀를 모욕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내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왕녀는 내게 깔끔한 사과를 전했다.

“제 생각이 짧았네요.”

“엄밀히 말해 함정에 빠트린 제가 더 나빴죠. 그러니 이번 승부는 비긴 걸로 해요.”

지켜보던 귀족들 앞에서 더 논란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우리는 훈훈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지켜보는 귀족들의 눈이 많으니까, 이렇게 수습하면 나중에 뒷말이 나와도 할 말이 있다.

“공작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것 같아요.”

하긴, 안 그래도 유난히 예민하던 라이언의 모습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일을 꾸민 것도 없잖아 있다.

그사이 지붕에 올라갔던 라이언은 묶어 둔 내 리본을 가지고 내려왔다.

돌아온 라이언을 앞에 두고 왕녀 역시 어제의 무례를 정식으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공작.”

“……저는 괜찮습니다.”

마지못해 받아들인 기색이 역력하지만 어쨌든 잘 수습됐으니 다행이다.

창고를 떠나기 전 나는 아까 전, 문제의 부부에게도 슬그머니 귀띔했다.

“두 사람 다 이번 기회에 서로의 마음을 잘 털어놓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아스타로테 님.”

오해가 풀린 건지 두 사람 다 어느덧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암, 나는 사랑의 큐피드니까!”

* * *

아스타로테가 신이 난 사이 왕녀는 라이언에게 물었다.

“재미있는 분이네요.”

“보고 있으면 심심하진 않습니다.”

행여나 저 부부가 진짜 헤어지기라도 할까 싶어 밤새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두 사람 모두 아스타로테의 속뜻을 기꺼이 알아차렸다.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전령의 외침에 귀족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그즈음 국왕이 아스타로테를 불러냈다.

“그럼 이따가 봐!”

손을 크게 흔들어 주는 그녀를 보며 라이언은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아무것도.”

“화해의 기념으로 공작께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한번 시험해 보라고. 왕녀의 제안에 라이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비록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도 분명 신기한 능력이긴 하다.

아무리 허점이 있다고 해도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 그건 정말 매력적인 유혹이긴 하다.

“아스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공작이잖아요?”

왕녀의 말에 라이언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요?”

“그러니 모처럼의 호의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왕녀와 함께 한발 늦게 경매장에 도착하자 경매장 저편에 나란히 선 국왕과 아스타의 모습이 보였다.

“공작이 말한 게 저분이군요.”

반대편 입구에서 뒤늦게 도착한 할슈타인 대공이 들어서자 왕녀의 손에 쥔 펜던트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빠!”

행복한 아스타로테를 가만히 바라보는 라이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맴돌았다.

왕녀는 그런 그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스타로테 님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하셨죠.”

“바꿔야 합니다.”

“운명을 뒤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아스타로테의 말대로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은 왕녀의 말에 라이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공작.”

“지금은 그저 이대로 있고 싶습니다.”

제 아버지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아스타는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라이언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씩씩한 걸음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라이언!”

공식적인 관계가 된 만큼 아스타도 이제는 거침없이 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아버지인 할슈타인 대공을 이길 수는 없을 테지만…….

“나만 빼놓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대공 전하는 참 멋지시네요.”

왕녀가 말을 돌린 줄도 모르고 아스타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우리 아빠는 참 잘생겼어요.”

라이언의 팔짱을 끼고서도 아빠 자랑을 멈추지 않자 왕녀가 물었다.

“아스타로테 님은 아빠가 좋아요, 공작이 좋아요?”

역시나, 그냥 넘어가지 않는 왕녀의 기습에 라이언은 슬그머니 눈을 흘겼다.

그런데 딸을 본 할슈타인 대공도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빠도 그건 좀 궁금하구나.”

“응?”

“그러고 보니 왕녀께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

거기에 국왕 폐하까지. 어른들의 습격에 아스타는 눈동자를 굴리며 왕녀에게 열심히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밀릴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아스타는 누구보다 제 아버지를 지키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아주 조금은 희망을 걸어 보고 싶기도 하다.

“저도 궁금합니다.”

어리석은 질문이라 비웃음을 듣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사실은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다.

“아스타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라이언은 옆에 선 아스타의 손을 더욱 꽉 잡고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아니라면, 좀 많이 섭섭해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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