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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08)화 (108/123)
  • 제108화

    “리본이요?”

    “네. 리본을 찾아 주시면 된답니다.”

    “그 정도는 간단하죠.”

    확신에 찬 왕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이 무조건 옳다는 저 믿음이 언젠가 자기 발목을 잡게 될 거라는 건…….

    겪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인데.

    반대쪽에 묶었던 리본을 앞에 두고 왕녀는 목에 매고 있던 펜던트를 풀어 손 아래로 늘어뜨렸다.

    “저는 절대 틀리지 않아요.”

    “제한 시간은 한 시간.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 반대쪽 리본을 찾아 주시면 된답니다.”

    문밖으로 안내하는 내 손짓에 왕녀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죠.”

    본격적인 다우징이 시작되자 펜던트가 양옆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쪽이네요.”

    진동을 따라 복도를 걷자 구경하기 위해 온 귀족들도 뒤따라 걸었다.

    어제의 그 부부도 일부러 함께 불러들였다. 추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왕실 한쪽 구석에 있는 창고에 도착했다.

    “테세우스, 이곳을 찾아보도록 하세요.”

    “예, 왕녀 전하.”

    그의 지시에 시종들이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추는 분명히 한곳을 가리키고 있는데. 한참 동안 뒤져 봐도 어째서인지 어디에도 리본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없습니다.”

    “뭐라고?”

    “왕녀 전하, 다시 한번 침착하게 살펴보시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왕녀가 다시 한번 펜던트를 늘어뜨려 보지만 어째서인지 한 자리만 가리킬 뿐.

    쌓인 짐 더미를 치워 보아도 리본은 없었다.

    그제야 왕녀는 내 함정을 눈치챘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죠?”

    “글쎄요?”

    “리본을 숨기지 않은 건가요?”

    “그랬다면 다우징이 이곳을 가리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분명히 숨겼고 당신이 여기로 온 게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알쏭달쏭한 내 태도에 테세우스가 끼어들었다.

    “일부러 왕녀께 무안을 주시려는 겁니까?”

    “그럴 리가.”

    나는 뻔뻔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냥 리본을 찾아 달라고 한 거고, 찾아낼 수 있다고 하신 건 왕녀신걸요.”

    아무리 무안하다고 해도 이미 뱉은 말이 있으니 왕녀는 다시 집중해서 리본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시간은 하염없이 가는데 추는 도무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닥을 파 봐요!”

    “아래를 뜯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모래가 줄어들 때마다 왕녀의 여유도 사라져 갔다.

    거의 끝날 때가 되자 그녀는 고귀한 발걸음을 내디뎌 스스로 리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리본은 없다.

    “없습니다!”

    속절없이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져 내리며 드디어 한 시간이 모두 지났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테세우스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나는 냉큼 말을 잘랐다.

    “잠시 건물 밖으로 나가죠.”

    대기 중이던 라이언에게 눈짓을 보내고 나는 사람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지붕 위에 라이언이 나타났다.

    “저건!”

    번개를 막기 위해 설치해 둔 피뢰침에 리본이 흩날리고 있다.

    “엄밀히 말해 다우징은 틀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왕녀 전하께서는 리본을 찾지 못하셨죠.”

    “그건…….”

    “저는 왕녀 전하의 능력을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어요.”

    하늘에 흩날리는 리본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말장난을 친 거죠. 처음부터 [건물 안]이라는 말씀은 드린 적이 없으니까요.”

    * * *

    어떻게 하면 왕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지난 밤사이 나는 예비 형부 카이를 통해 왕녀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입수했다.

    “왕녀의 능력에도 조건은 달려 있습니다.”

    “조건이요?”

    “왕녀의 능력이 가장 두드러진 건 가뭄이 인 땅에서 수맥을 찾았을 때라고 했습니다. 넓고 장애물이 없는 공간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는 거지요.”

    “호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입니다만, 무아르 왕실은 왕녀의 능력에 대해 특별히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카이의 의견에 나도 공감했다.

    “정말로 만능이라면 오히려 숨겼을 텐데 말이에요.”

    얼핏 들으면 만능일 것 같은 능력인데, 그걸 그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건 분명 맹점도 있을 터.

    거기에 카이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

    “물건을 찾는 건 어쩌면 쉬울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다르니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스타로테 님에게는 적절한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필요하군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카이는 플로리아 언니를 불러왔다.

    “갑자기 언니는 왜요?”

    “무아르의 왕실은 우리만큼이나 화목한 편이니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언니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걸어왔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게.”

    “아…….”

    아! 그렇구나. 평화로운 왕실에서 자라 상냥하고, 친절하고, 그늘 없고. 그래서 더 빈틈이 많은 점까지.

    저런 순수한 호의를 보니 플로리아 언니와 지젤 왕녀는 참 비슷하다.

    카이는 그런 언니에게 물었다.

    “플로리아, 당신은 국왕 폐하가 더 좋습니까, 왕비 폐하가 더 좋습니까?”

    “응? 아바마마랑 어마마마 중에 누가 더 좋냐니……. 그걸 어떻게 골라?”

    한참 고민하던 언니는 결국 둘 중 한 사람을 고르지 못했다.

    “아바마마를 고르면 어마마마가 서운하실 테고, 어마마마를 고르면 아바마마가 토라지실 텐데!”

    “그럼요, 플로리아.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과부하에 걸려 혼란스러워하는 언니를 토닥이며 카이가 말했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칼로 베듯이 딱 잘라 버릴 수는 없지요.”

    “그러게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절대 옳다는 확신에 빠졌을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카이의 냉정한 경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별궁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낮에 보았던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정의 크기는 어떻게 잴 수 있을까.

    아니, 누군가를 잊지 못한다는 게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될 수 없다.

    어두운 길을 걸으며 나는 옆에 선 미나에게 물었다.

    “미나는 결혼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할 거야? 아니면 집에서 골라 준 사람이랑 할 거야?”

    어차피 만약을 위한 가정이니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나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저는 평생 아가씨 옆에 있을 텐데요?”

    “응?”

    “아가씨 옆에 있는 게 첫 번째니까, 결혼은 그다음 문제죠.”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당황한 내 모습을 보며 미나는 까르륵 웃었다.

    “저 같은 시녀는 보통 다른 고용인과 결혼하게 될 거랍니다. 지금이라면 공작가의 차기 집사가 아닐까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럼요. 저는 아가씨의 측근이니까요.”

    하긴, 단순한 고용인이라면 모를까. 집사나 시녀장처럼 평생 곁을 지키는 측근은 사실상 가업이나 다름없는 형태긴 하다.

    “아가씨께서 누구와 결혼을 하시든, 아가씨의 살림을 보살펴 드리는 건 저일 테니까요.”

    “그거야 그렇지.”

    속옷부터 밥 한 끼 먹는 것까지도, 내 생활 전반을 관리해 주는 건 미나니까.

    매번 아빠를 잃고 밥도 안 먹고 울면서 틀어박힐 때마다 미나는 필사적으로 내 입에 음식을 밀어 넣곤 했다.

    “귀족분들께서 정략결혼을 하시듯이 저희도 그래요. 모시는 주인에 따라 인연이 닿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혼자 살기도 하고, 다양하죠.”

    “……그렇구나.”

    “그러니까 상대가 누가 되든 저는 잘살고자 노력할 거예요.”

    그러고 보니 미나는 갑자기 왕실에 들어와서도 텃세 하나 안 당하고 잘 적응하고 생활력도 강한 편이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해도, 아가씨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저니까,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 상대가 있다면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아?”

    미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걱정하는 내 모습에 미나는 되레 까르륵 웃었다.

    “30년 정도 같이 살다 보면 아마도 불타는 사랑은 아니더라도 정은 들겠죠. 공통의 목표가 있는 것도 나쁘진 않거든요.”

    “……공통의 목표라.”

    “게다가 돌아가신 마님께서 제게 아가씨를 부탁하셨거든요.”

    “엄마가?”

    엄마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미나는 홀로 꽁꽁 담아 두었던 옛이야기를 풀어내 주었다.

    “저는 마님의 친정에서 따라온 시녀였으니까요. 대공 저의 시녀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한 신분이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어린 미나를 유독 귀여워하며 결혼한 후에도 직접 대공 저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저는 대단한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아가씨 곁에는 누구보다 오래 있었으니까요.”

    “그럼. 미나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지.”

    심지어 내가 모르는 내 입맛이나 취향까지도 미나는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

    “그 작은 아기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셨으니까, 아가씨는 제 자랑이에요.”

    미나의 말이 꾸밈없는 진심이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디오니스 경이 나를 배신했을 때도 슈덴을 따라 왕궁을 탈출했을 때도, 미나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 줬다.

    꼭 엄마처럼.

    “그러니까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아가씨를 진심으로 걱정하니까, 이렇게 미운 말도 하게 되는 거랍니다.”

    “……아.”

    미나의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아까 그 남편은 왜 그리도 아내의 진심을 알고 싶어 했을까.

    “그런 거였구나.”

    정말로 미웠던 거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통찰력] 85(▲3)/99

    [판단력] 85(▲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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