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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05)화 (105/123)

제105화

“끝났습니다!”

장식을 마치고 나는 라이언에게 등을 기댄 채 드레스 차림으로 사뿐히 말에 올랐다.

여기까지는 모두 내 계획대로였다.

한 가지만 빼고.

“윽, 불편해.”

“어쩔 수 없지. 내게 기대.”

다리를 둘 다 한쪽으로 모으고 타니 혼자서는 균형조차 제대로 잡기 힘들다.

그렇다고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쩍 벌릴 수도 없고.

곤란한 나를 본 라이언은 더욱 단단히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직도 불편해?”

“이, 이제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해.”

따뜻한 호흡이 살결에 바로 맞닿았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얌전히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두근두근.

어떤 놈의 짓인지는 몰라도 이거, 꽤 나쁘지 않다.

유난히 꼭 붙어 있는 탓일까. 나란히 앉은 우리의 모습은 지금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미나는 나를 보며 엄지를 번쩍 들어 줬다.

* * *

오늘부터 일주일.

경매를 명목으로 귀족들은 물론 해외에서도 수많은 내빈이 자리했다.

애피타이저로 플로리아 왕녀와 명예 백작 카이의 결혼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오늘의 메인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이 커플이다.

“보셨어요?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이 정말 아름답네요.”

“그러게요.”

정원에서 열리는 연회다 보니 누가 오고 나가는지 모습이 모두 공개된다.

마치 일부러 보란 듯이 아름답게 장식한 백마에 오른 두 사람.

아스타로테와 라이언을 앞에 두고 귀족들 사이에서 연신 찬사가 터져 나왔다.

“제법 머리를 썼구나.”

“과찬이십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스타는 국왕에게 인사를 올린 후 라이언에게 살그머니 속삭였다.

“죽을 것 같아. 약이라도 발라야 할 것 같은데.”

익숙지 않은 자세로 달린 탓에 아스타는 말에 탄 내내 엉덩이가 아프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나저나 웬일이야. 내 계획에 이렇게 순순히 어울려 줄 줄은 몰랐는데.”

“……어서 다녀오기나 해.”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테세우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지만, 그걸 굳이 아스타에게 말해 줘야 할 이유는 없다.

비상사태에 부랴부랴 달려온 미나에게 아스타를 넘겨주고서 라이언은 음료를 들고 인적이 드문 후원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어.’

마법사가 금단의 마법에 무사히 도달한 것도 확인했다. 아스타가 바라는 건 모두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으니까.

아무 방해 없이 이대로만 이어진다면 무사히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터.

‘그렇게 되면…….’

라이언은 음료를 내려놓고 제 두 손을 내려다봤다.

순간 욱신, 심장이 조이는 적나라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윽.”

아프고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행복하다.

오늘따라 먼저 안겨 온 아스타로테의 따뜻한 체온이 얼어붙은 그의 심장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그녀가 웃고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꺅!”

고통이 겨우 가라앉던 찰나 저쪽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라이언은 곧장 후원 기슭으로 달려 나갔다.

“아야, 아파라…….”

“괜찮으십니까.”

파티에 온 손님으로 보이는 아담한 키의 레이디다.

체격이 작을 뿐 나이가 어려 보이진 않는다. 연갈색에 곱슬곱슬한 머리 위에는 티아라를 썼다.

‘어딘가의 귀한 신분인 모양인데.’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건지.

수풀 어귀에서 발을 헛디딘 채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시겠어요?”

“기꺼이.”

외간 여자의 손을 잡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곤경에 처한 이를 외면하는 것도 인간의 도리는 못 된다.

라이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손에 든 펜던트를 보여 주며 생긋 웃었다.

“나는 지젤이라고 해요.”

“……무아르의 지젤 왕녀께 인사 올립니다.”

받아 본 초상화와 몹시 다른 인상에 당황했지만 라이언은 능숙하게 인사를 올리며 이 상황을 넘겼다.

“도움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 할 텐데, 혹시 운명을 믿으시나요?”

“……연회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엉뚱한 사람이라는 메모가 있긴 했지만 난데없는 운명 타령에 라이언은 기꺼이 못 들은 척하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라이언의 예상보다 훨씬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신기하네요. 남들은 다들 궁금해하던데. 앞으로 다가올 미래나, 운명의 상대 같은 것들이 궁금하지 않나요?”

“……미래라.”

“추가 묘하게 움직이는 게 신기하네요.”

발걸음을 멈추고서 지젤 왕녀는 도발하듯 말을 꺼냈다.

“라이언 그라나다 공작은 운명을 믿지 않는 걸까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안 걸까. 라이언은 지젤 왕녀의 손을 주목했다.

그녀의 손 아래 늘어트린 펜던트가 라이언이 선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다우징이라고 하죠. 물의 흐름을 찾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는 무아르의 전통이랍니다.”

남의 나라의 문화에 함부로 입을 댈 수는 없다.

허울 좋은 핑계에 라이언은 입을 꽉 다문 채 왕녀가 하는 모양새를 그저 바라만 봤다.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세요.”

그녀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팽이처럼 생긴 펜던트는 줄에 매달린 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원형을 그리는 모습을 본 왕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당신의 운명이 보이지 않아요.”

아무래도 괴짜 왕녀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판단한 라이언은 기꺼이 이 자리를 떠나는 길을 택했다.

“먼저 실례하지요.”

“……이대로 운명이 흔들리면 누군가가 죽을지도 몰라.”

저주처럼 덧붙인 말에 라이언의 걸음이 다시금 멈췄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일국의 왕녀라고 해도 방금 발언은 도가 지나쳤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왕녀의 앞에 섰다.

“알량한 재주로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장난은 사양하겠습니다. 몹시 불쾌하군요.”

“응?”

“아이고, 왕녀님! 여기 계셨군요!”

겨우 따돌렸던 지젤의 유모가 드디어 왕녀를 찾아냈다.

보호자가 온 걸 확인한 후 라이언은 일언반구 없이 그대로 후원을 떠났다.

“……신기하네.”

“대체 말씀도 없이 어딜 가셨던 거예요?”

“운명의 이끌림을 따라온 건데. 아무래도 나는 지금 기적을 마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아.”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저분은 누구신가요?”

“……그라나다 공작이 왜 왕녀님과 함께 있는 겁니까?”

곧이어 유모를 따라온 테세우스는 뒷모습만 보고도 저 멀리 가는 라이언을 알아봤다.

“어머나, 공작님이셔요?”

혹시나 하는 기대에 눈을 반짝이는 유모를 본 테세우스는 이내 찬물을 끼얹었다.

“차기 국왕이 될 아스타로테의 약혼자입니다.”

“날 이렇게 거칠게 대한 남자는 처음이야.”

“예?”

라이언이 떠난 뒤 추는 흔들림 없이 그가 떠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내 한 번 더 흔들자 추는 빙빙 돌며 건물 쪽을 향했다.

“너무 아파서 엉덩이가 박살 나는 줄 알았다니까!”

“쉿. 아가씨.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예쁘고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을 써 주세요.”

“뭐 어때. 누가 듣는다고. 아오, 아파라…….”

“하여튼 간에 진짜…….”

저 요란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테세우스는 이미 눈치채 버렸다.

그런데 어쩐지 지젤은 벽 쪽을 가만히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신기한 사람이 둘이나 있네.”

“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지젤 왕녀는 다우징에 쓴 펜던트를 목에 걸고 곧장 연회장 쪽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갑자기 없어질 때는 언제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질 않나.

무슨 소린지 모를 말만 중얼거리는 이 왕녀는 대체 정체가 뭘까.

“이상해. 아주 이상해.”

네가 더 이상해,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테세우스는 부랴부랴 지젤 왕녀의 뒤를 따랐다.

* * *

“너무 아파서 엉덩이가 박살 나는 줄 알았다니까!”

약을 다 바르고 나서도 아픔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말 안장에서부터 전해지는 고통을 받아 내기에, 부드러운 드레스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쉿. 아가씨.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예쁘고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을 써 주세요.”

“뭐 어때. 누가 듣는다고. 아오, 아파라…….”

그래도 이제는 좀 살 것 같다. 복도를 다 빠져나온 이후 나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요조숙녀 흉내에 나섰다.

“아스타.”

“라이언!”

연회장에 들어서니 마침 라이언이 기다리고 있다.

미나에게 괜찮다고 몇 번이나 손짓한 후 나는 냉큼 라이언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나 너무 아팠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

진지한 얼굴로 애틋하게 꺼낸 말에 나는 그만 못된 상상을 하고 말았다.

“어우, 몰라.”

“응?”

“라이언은 변태. 완전 변태야.”

“…….”

혼자 까르륵 웃으며 좋아 죽는 내 모습도 이제 익숙한지, 라이언은 별말 없이 내 손만 꼭 잡아 주었다.

“지젤 왕녀를 조심해.”

지젤이 누구더라. 테세우스 얘기에 정신이 팔려서 솔직히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왕녀를 마주한 후, 나는 라이언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금방 알게 됐다.

“아스타로테 님은 백 살이 넘으신 것 같은데, 무척이나 동안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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