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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03)화 (103/123)
  • 제103화

    ‘호오.’

    내 흥미는 오로지 세드릭의 형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부터 벌써 멋있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데다, 완전히 새로운 루트라면 게임에서 흔히 있는 확장팩 한정 공략 캐릭터일지도 모르는……!

    “아스타?”

    “윽!”

    서류를 보다 깜빡 잠이 든 걸까. 고개를 들자 라이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부스스한 내 모습을 본 미나가 흐트러진 머리카락부터 빠르게 다듬어 줬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아, 명단! 이번 경매에 참여하는 인원이 제법 많아 보여서.”

    “몽펠리에의 장남이 참석한다던데.”

    왕녀 쪽은 깨끗한데, 자다가 얼굴을 문지른 탓에 문제의 세드릭 형 페이지만 제대로 구깃구깃해졌다.

    “하, 하하하, 아무래도 긴장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지.”

    눈동자를 굴리며 딴청을 부리자 라이언은 슬그머니 더 가까이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그건 연적이 될지도 모르니 긴장하라는 뜻인가?”

    “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미나 싶더니 이내 라이언은 엉킨 내 머리카락만 바로 해 주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곧 마법 수업이 시작될 거야.”

    “아, 맞아. 그랬었지 참!”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는 드디어 마지막 공략 캐릭터, 넬 루트를 진행하게 됐다.

    “아무리 마정석이 있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이 마법을 쓰는 건 어렵지.”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래서 무기가 되는 거고, 나도 재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마법의 소질은 각각 제각각으로 태어나지만, 검사 결과 내게도 약간의 재능은 존재한다고 했다.

    “거기에 마정석을 더하게 되면, 최소한 내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없이 자신만만한 내 모습에 라이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걸.”

    “그럼. 나처럼 멋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럼. 아스타가 최고야.”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라이언의 눈빛이 너무 뜨겁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나도 나지만, 뭐랄까 라이언도 참.

    “너 날 진짜 좋아하는구나?”

    새삼스럽게나마 해 본 얘기였는데 순식간의 라이언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경매 준비로 바빠서 먼저 실례할게.”

    “그냥 가게? 딱 1분만 더 있다 가면 좋은 걸 해 주려고 했는데.”

    떨어지던 라이언의 발걸음이 단번에 멈췄다.

    나는 히죽 웃으며 슬금슬금 다가가서는 등 뒤에서 라이언을 꼬옥 껴안았다.

    “오늘도 힘내. 내 생각 많이 하고.”

    “……너도, ……지 마.”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먼저 실례할게.”

    라이언은 끝까지 말을 마치지 않고서 그대로 별궁을 떠나 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아가씨도 바람피우지 말라고 하신 거 아니었어요?”

    자기 딴에는 얼버무리려고 한 모양인데, 정면에 서 있었던 미나는 그만 라이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버린 모양이다.

    “헤에, 그렇단 말이지.”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약혼이 결정된 것도 있지만 요즘 들어 라이언의 태도가 무척이나 솔직해졌다.

    “바람을 피우긴, 무슨.”

    아마 지금쯤 적잖이 속앓이를 하고 있을 텐데, 도저히 웃음을 멈출 길이 없다.

    “……아가씨. 마법부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다 못한 미나가 문을 두드렸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드디어 마지막 공략 캐릭터인 넬을 만나게 된다.

    그 애랑은 참……. 어디부터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넬의 인기는 중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은 관심이 없는 4차원 캐릭터고.

    솔직히 말해 지금의 ‘나’와는 상극이라고 해야 할지 좀 많이 부담스러운…….

    “허허,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아스타로테 님!”

    “……당신은 또 누구야?”

    분명 마법 수업은 넬에게 부탁한 걸로 기억하는데.

    탱글탱글하게 콧수염이 말린 처음 보는 마법사가 대뜸 내 선생이랍시고 찾아왔다.

    “그 녀석은 마법부 내에서도 하등품 중의 하등품입니다. 그런 놈을 보냈다가 자칫 왕실에 누를 끼칠까 하여 최고등급 마법사인 제가…….”

    “누구 마음대로?!”

    아니, 대체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하오나 아스타로테 님의 품-격에 걸맞은 스승은 역시나…….”

    “그게 당신이라고?”

    “어흠, 어흠. 제 입으로 어찌 그런 말씀을 올릴까요.”

    “됐으니까 나가!”

    콧수염을 냉큼 쫓아내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결국 마법부의 수장을 포함한 마법사들이 넬과 함께 다시 별궁을 방문했다.

    “아스타로테 님, 송구하옵니다.”

    “…….”

    “어흠, 어흠흠.”

    수장조차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데 넬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가, 굳이 눈치를 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됐고, 다들 나가 봐요.”

    볼일 없으니 이만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내 엄명에 마법사들은 다들 굽신굽신하며 얌전히 물러났다.

    “너는 남고.”

    거기에 묻어가듯 슬그머니 도망치려던 넬은 덜미가 잡혀 결국 혼자 남고 말았다.

    “왜 약속을 어겼어?”

    내 추궁에 넬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니까.”

    “안 들리거든?”

    “난 도움이 안 되는 마법사니까.”

    “호오.”

    이 애가 의기소침해진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네가 왜 도움이 안 되는 마법사인데?”

    “그건…….”

    당장 내게 불려온 것만 해도 마법 실수 때문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애는 장차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게 된다는 걸.

    “나는 네 실력과 가능성을 믿어.”

    “나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를 떠올려 봐.”

    내 말에 넬의 눈빛이 변했다.

    이미 한 번 공략했던 캐릭터니까, 나는 넬의 과거를 알고 있다.

    이 애가 랜덤으로 등장했던 이유는 바로…….

    “내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찾기 위해 과거로 가고 싶어.”

    궁극의 마법, 시간 여행을 익힌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원래 게임에서는 그냥 랜덤으로 출연하는 마법사에 플레이 내용도 연애만 했지, 어떤 마법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넬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건 분명 운 좋게 열두 살 때 넬을 발견했던 때였지만…….

    문제는 바로 저 부모님의 원수다.

    “원수를 찾으면 어쩌려고, 죽이기라도 하려고?”

    날카로운 내 지적에 넬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아.”

    “어련하시겠어요.”

    오로지 복수만을 꿈꾸며 과거로 가는 마법을 익힌 그는 기어코 범인을 찾아내서는 원수를 갚고 자기도 죽어 버렸다.

    그렇게 날 과부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실각시킨 장본인이다.

    게임에서의 엔딩 시점이 넬과 맺어진 직후였기에 아무도 몰랐을 뿐.

    엔딩 이후에도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 라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나도 게임에 들어온 후에야 알았다.

    주변에 선 시녀들이 듣지 못하게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을 익히고 있는 거야?”

    “그, 그걸 어떻게……!”

    너무 놀란 나머지 넬은 그만 비명까지 질렀다.

    나는 손가락을 비비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내가 누군지 알지?”

    일부러 도발하듯 다리를 꼬자 넬은 더욱 의기소침해져서는 오들오들 떨었다.

    “제발 비밀로 해 줘, 만약 수장께서 아신다면!”

    “그 마법은 확실히 금기지.”

    모르고 당하면 억울하지만 나는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게 되겠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 전에 들키면 쫓겨날 테니 말이야.”

    마법은 개나 소나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정보를 접하기 위해서는 마법부에 소속되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스승 따위는 없다.

    원하는 마법을 얻기 위해서는 스승을 보며 눈으로 훔쳐야 한다.

    그렇기에 넬은 사람들에게 구박받으면서 어떻게든 마법부에서 버티고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궁지에 몰린 탓일까, 곤란해 보이는 그를 위해 나는 기꺼이 당근을 던져 줬다.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란 핑계를 대면 서고에 접근하기 쉬워질 텐데?”

    “그건…….”

    “내가 궁금해한다고 하면 검열된 자료도 좀 더 수월하게 대여할 수 있을 테고.”

    혼자서 몰래 잠입해서 배우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날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차기 국왕 후보니만큼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위험한 마법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해.”

    “아무리 그래도 마법부에서 쉽게 허락해 주지 않을 텐데.”

    “내기할래?”

    대놓고 하는 도발에 넬은 기꺼이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차기 국왕이라고 해도 금기시된 자료를 열람하는 건 안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지만…….

    “지면 내 소원 들어주기, 네가 이기면 황금 20개를 줄게.”

    넬은 기꺼이 내 거래 조건에 응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

    “네, 아가씨.”

    “마법부 사람들,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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