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02)화 (102/123)

제102화

세드릭의 추궁에 아르그란드 부인은 결국 입을 열었다.

“……네 엄마도 분명 너를 위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한없이 온순하기만 하던 세드릭의 인내심에 균열이 일었다.

참아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버지가 결정한 것이 최선이니까, 그리 생각했기에 잠자코 따랐다.

하지만.

“세드릭, 네가 어떻게…….”

“정말로 저를 위한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나는, 나는…….”

“백작 부인!”

세드릭의 추궁에 아르그란드 부인은 머리를 짚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백작 부인과 부인의 시녀들은 서둘러 후작 저택을 떠났다.

시종들도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던 찰나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그렇게 대들다가는 작위가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이슈발.”

“그토록 죽고 못 사는 것처럼 붙어먹더니 난 또 왜 틀어졌나 했지. 아무리 미쳐도 그렇지, 아들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말이야.”

“그 입 다물지 못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하필이면 이 이야기가 이슈발의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독이 오른 세드릭의 반응을 즐기며 이슈발은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어깨에 두 팔을 걸쳤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후작님도, 너도 결국 이용만 당했다는 걸 왜 모르는 건지.”

“그런 문제가 아니야.”

“후작께서도 그러시더군.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그건…….”

“뭐가 아니란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넌 닭 쫓던 개 신세 아닌가?”

안 그래도 생채기가 난 자리를 손톱으로 벅벅 긁어 대는 이슈발의 말이 오늘따라 더 아프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래. 다른 건 모르지만 적어도 네 꼴이 우스워졌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지.”

“이……!”

어설프게 주먹을 날려 보지만 이슈발의 손에 가볍게 막혔다.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망설임 없이 세드릭의 손목을 꺾어 버렸다.

“윽!”

“네까짓 게 뭐나 된 줄 알았지? 별것도 아닌 주제에 까불고 있어.”

비참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째서 이것밖에 해내지 못하는 건지.

복받치는 서러움에 세드릭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으로 상대를 공격하지. 그래도 스스로가 별 게 아니란 인식은 있다는 건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냉소적인 목소리는 리듬감 있게 또박또박 끊어져 내렸다.

이 집안에서 그런 말투를 구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형님!”

“네가 왜 여기에…….”

경악한 이슈발이 빈틈을 내보이자 세드릭은 서둘러 그의 손을 뿌리치고서 제 형에게 달려갔다.

몽펠리에 후작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가 될 사내.

“테세우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세드릭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 주며 그는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이슈발을 차갑게 비웃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 재미있지.”

어찌 들으면 세드릭을 괴롭히는 이슈발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들으면 테세우스가 별것 아닌 존재라며 이슈발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네놈이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고함치는 이슈발을 앞에 두고 테세우스는 어깨만 으쓱했다.

“내 집에 내가 돌아온 걸로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네. 누가 보면 네가 차기 가주라도 되는 줄 알겠어.”

“나는 엄연한 이 가문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는 주제에.”

테세우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슈발의 가장 아픈 부분을 후벼 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대들다니, 이제 그만 몽펠리에에서 쫓겨나고 싶은 모양이지?”

“이 자식이!”

“주먹이 나서지 않고는 대화조차 불가능하다니. 침팬지만도 못하군.”

코앞까지 다가선 주먹을 피하지도 않고 그는 차가운 비아냥을 날렸다.

여기서 주먹을 날리게 된다면, 분명 잠깐의 통쾌함은 있겠지만…….

감히 이 가문의 후계자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수는 없다.

“바라는 게 뭐야?”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을 어찌 취급하면 되는지, 보면 알겠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들은 그 효용 가치를 잃어버린다. 만약 이대로 가문에서 쫓겨나기라도 한다면.

“이……!”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거야.”

“빌어먹을!”

압도적인 위압감 앞에서는 이슈발 따위가 감히 함부로 대들 수 없다.

세드릭은 그런 제 형을 꼭 끌어안았다.

“형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어리광이 더 심해졌구나.”

핀잔을 주면서도 테세우스는 이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 * *

현명한 형님이라면 분명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터.

막 돌아온 테세우스를 붙잡고서 세드릭은 지난 일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라나다라. 왕실은 늘 가성비가 떨어지는 길을 택하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귀여운 아우의 질문에 테세우스는 친절히 대답해 줬다.

“그라나다는 이미 손에 쥔 패인데,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미친 자는 없지.”

“그렇다면…….”

“마정석을 미끼로 거래를 한 거겠지.”

“경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드릭의 어설픈 설명만 듣고도 테세우스는 왕실의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냈다.

“국왕은 돈이 필요하지만, 귀족들은 세금을 내고 싶지 않고. 어설프게 돈을 뜯었다가는 왕실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곤란해지다니요?”

“플로리아 공주의 짝이 신분이 제법 낮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잔뜩 뒤엉킨 실타래 같던 사실들이 테세우스의 입을 타고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빌헬름 왕자가 실종되고 조카인 아스타로테를 국왕 후보로 내세워야 하는데. 플로리아 왕녀에게 유력 귀족이 붙기라도 하면 곤란했을 테지.”

“……그러게요.”

“그라나다는 왕실에 더없이 충성하니까. 새 공작이라고 해서 그 사실이 특별히 달라질 이유도 없고 말이지.”

“형님…….”

어떻게 이리도 모든 사안에 대해 정확히 분석해 낼 수 있는 걸까.

“문제는 아스타로테 본인인데. 솔직히 크게 기대가 되진 않는구나.”

그래 봐야 아직 어린 여자아이라고. 차가운 테세우스의 반응에 세드릭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스타는 굉장해요. 매일 폐하를 대신해 국무회의도 개최하고, 아버님께서도 칭찬하셨고 제가 보기에도…….”

“그 애를 좋아하는구나.”

“저, 저는……!”

“고백했는데 차인 건가.”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속내를 술술 읊어 대는 형님 앞에서 세드릭은 얼굴만 벌게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작 5년 터울일 뿐이건만 훨씬 나이가 많은 이슈발보다 더 어른스러운 테세우스 앞에서는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다.

이런 면까지도 세드릭의 형님은 아버지와 무서우리만치 닮았다.

“그 애가 왕이 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너를 차 버리고, 다른 남자의 손을 잡았는데도?”

“하지만…….”

냉정한 형님은 아마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세드릭은 그날 밤 아스타가 해 줬던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 애는 진심으로 저를 위해 주는, 소중한 친구예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라. 신선한 발상이로구나.”

“진심이에요. 그 애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뤄 주고 싶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도와주고 싶어요.”

주먹을 꼭 쥐고 용기를 가득 담아 하고 싶은 말들을 가득 쏟아 냈다.

행여나 형님에게 핀잔을 들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지만 이건 오로지 세드릭 혼자만의 기우였다.

“변했구나.”

“저, 저는…….”

“자주 오지 못한 탓이겠지만.”

그가 다니는 아카데미는 16학년제. 졸업하려면 아직 4년이 훨씬 더 남았다.

본래라면 귀가조차 허락받지 못할 테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

“지젤 왕녀께서 직접 오실 모양이야.”

아카데미도 일단은 테세우스가 유학 중인 무아르 왕국 소속의 기관이다.

졸업 후에는 작위를 잇기 위해 돌아오게 될 테지만, 미리 연락할 만한 인연의 끈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계산이었을 터.

“형님, 굉장해요……!”

그런 속사정도 모르는 채 세드릭은 해맑게 웃으며 테세우스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궁금하긴 하구나.”

과연 이렇게나 귀여운 세드릭을 뻥 하고 차 버린 강심장이 어떤 사람인지.

테세우스는 몹시도 궁금해졌다.

* * *

“에, 에, 엣취!”

내 우렁찬 재채기 소리에 미나가 제일 먼저 놀라 달려왔다.

“아가씨, 감기에 걸리신 건가요?”

“아니. 그냥 뭐가 좀 들어간 것 같아.”

누가 내 욕을 하는 건지 귀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나는 참석 명단을 줄줄이 읽어 나갔다.

“이 부분이 어렵단 말이지.”

마정석 경매라는 특수한 이벤트가 열리게 되는 바람에 기존 내가 알던 루트가 모조리 바뀌었다.

단서 하나 없이 정답을 찾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나는 턱을 괴고서 유독 신경이 쓰이는 이름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젤 델 포레 무아르>

무아르 왕국의 왕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