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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94)화 (94/123)

제94화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건 역시나 세드릭의 미소에 홀려서였다.

‘예쁘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홀려 버릴 것 같은 달콤한 웃음.

저 웃음에 첫눈에 반해 버려서 내 신경은 온통 세드릭에게 쏠렸었다.

‘만약…….’

엄밀히 말하면 5회 차지만, 이곳에 들어와 공략한 건 나머지 네 사람뿐.

세드릭을 지금의 내가 공략해 본 적이 없긴 하다.

일부러 판을 깔아 주는 거처럼 세팅된 상황을 바라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게임이 바라는 정답은…….

처음 내 계획처럼 라이언이 아닌 이 애일지도 모른다.

‘만약 또 실패한다면…….’

이 모든 고생이 없던 일이 되어 버리고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거다.

언제 아빠가 죽을지 모르는 불안에 시달리면서 또다시 그 괴로운 길을 걸어야 할 테지만…….

정석 중의 정석인 세드릭을 앞에 두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린 좋은 친구잖아.”

세드릭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친구.”

“하루라도 빨리 놀러 가 보고 싶어.”

태연한 나와 달리 세드릭은 아무래도 아쉬운 기색을 쉽사리 숨기지 못했다.

“아스타, 나는…….”

“그러고 보니 새로 들어온 좋은 차가 있는데, 아스타만 아직 맛보지 못했네요.”

적절한 타이밍에 왕비님이 나를 찾았다.

“이따가 다시 얘기하자.”

세드릭을 달래고서 나는 왕비님의 곁에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아스타, 저도…….”

“세드릭 님, 다음 저희 가문에서 있을 연회 문제로 상담을 드리고 싶어요.”

“저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역시나, 인기인답게 내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사람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향기가 어때?”

“아주 그윽하고 좋아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선 세드릭을 바라보며 나는 넌지시 왕비님께 속삭였다.

“아빠도 왠지 저런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그럼. 정말 인기가 많았단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지.”

“지금도 인기가 많죠.”

“그럼. 지금도 할슈타인 대공비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적지 않단다.”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절대 안 되죠.”

“네 아빠가 원한다고 해도?”

아빠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웃으며 응원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차라리 빨리 결혼해서 애라도 안겨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뭐?”

“아니,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에요.”

매사에 진지한 왕비님은 그걸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셔서 나는 필사적으로 사정을 무마했다.

“어쨌든 제가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귀족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챙겨 가야 하니까, 세드릭이랑은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오래오래 잘 지내 볼 생각이에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뭐, 하기 나름 아닐까요.”

당장 디오니스 경만 해도 진심으로 내 사정을 털어놓고 상의할 정도로 친해지긴 했다.

악단이 흥겨운 왈츠를 연주하자 쌍둥이가 더그와 글라스의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갔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구나.”

메리와 케이트는 내게도 오라고 손짓하지만, 오늘은 정중히 사양했다.

괜찮다고 손을 흔들자 곧 다른 사람 몇몇이 더 나와 흥을 돋웠다.

제법 큰 음악 소리에 목소리가 묻혔다. 나무를 숲에 숨기듯이 이 타이밍을 노려 나는 넌지시 왕비님께 물었다.

“역시 [연하남]이라서 왕비님은 아빠를 반대하셨던 거군요.”

“……그랬었지. 그 애도 네 아빠를 무척 싫어했으니까.”

정곡을 찌르는 키워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자물쇠가 또 하나 풀려 나갔다.

“막 약혼이 깨진 후부터 할슈타인 대공이 따라다니기 시작하자 나쁜 소문이 번졌어.”

“나쁜 소문이요?”

“네 엄마가 두 사람을 저울질하다 결국 왕제(王弟)인 대공을 택한 게 아니냐고.”

“하지만 엄마는…….”

분명 아빠를 싫어했다고 했다.

심지어 아빠와 왕비님 두 사람의 말이 일치하니 틀림없는 사실일 터.

“억울했을 거 같은데요.”

“그래서 더 싫어하게 됐지, 네 아빠를.”

“그럼…….”

아빠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인 열네 살.

여섯 살 연상이었던 엄마의 눈에 아빠가 얼마나 못 미더워 보였을까.

“그랬는데, 대체 어떻게 결혼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게 말이야.”

내가 얻은 키워드로는 여기까지.

음악이 끝나고 왕비님은 어느새 엄마의 친구가 아닌, 엄숙한 왕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멋진 춤으로 모두를 즐겁게 해 준 여러분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로 보기 좋았어요.”

옆에서 함께 박수를 치자 메리와 케이트는 기어코 내 양쪽 팔을 잡고서 무대로 불러내 폴카를 연주해 달라고 했다.

“대체 왕비님하고 뭘 그렇게 속닥거린 거야?”

“그냥 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들었어.”

“오래된 이야기?”

적당히 어울리며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세드릭 쪽을 가만히 지켜봤다.

* * *

몽펠리에가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즈음 국왕의 사자가 그를 찾았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마침 잘 왔군요. 올해 수확제에 대해 논의할 게 있어 불렀습니다.”

“아스타로테 님께서는…….”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국왕은 최근 들어 국정의 중요 이슈는 모두 아스타에게 맡겨 왔다.

“아직 더 가르쳐야 할 부분들이 많아서 좀 더 지켜볼 생각이오.”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날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국왕은 슬그머니 그에게 운을 띄웠다.

“최근 귀족들에게 세 부담이 크다는 원성이 잦았지. 올해는 그래도 큰 돈 들어갈 일이 없었으니 세금을 조금은 감면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할슈타인 대공의 의견이 있었네만.”

“그래 주신다면야, 모두가 폐하의 은혜에 깊이 감복할 것입니다.”

“역시……. 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까는 통 크게 목돈을 내놓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진심으로 돈을 낼 생각은 없었다.

역시나 눈치 빠르게 세금 감면 이야기가 나오니 몽펠리에는 기꺼이 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희야 감사한 일입니다만, 부족한 세금은 어떻게 메우실 계획이십니까.”

“그라나다에서 마수 사냥이 끝나 간다더군. 올해는 역대급의 수확이라 내가 직접 옥션을 개최하기로 했네.”

“옥션이라니…….”

“말 그대로. 국내 물량을 제외한 나머지 분량을 적극적으로 외국에 팔아 볼 생각이야. 옥션의 수수료만으로도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겠지.”

“그건 설마.”

“그래. 새 그라나다 공작의 제안일세.”

과하게 거둬진 마정석은 내부에 담긴 마력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써 버려야 한다.

몇 년은 보관할 수 있다지만 효과는 훨씬 떨어진다.

“그러니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해외에 은혜를 베풀어 두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지금까지는 각국과 개별적으로 협상했지만, 그러다 보니 몇십 년이나 마정석 값만 여태 제자리란 말이지.”

10년 전과 비교하면 빵값만 해도 거의 두세 배는 올랐다.

“이참에 마정석 가격을 현실화하자는 것이 그라나다 공작의 제안이었는데, 공은 어찌 생각하나?”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라나다 공작도 그러면.”

“그래. 이제는 수도로 돌아와야지. 수확제쯤이면 1년이 다 되어 갈 텐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수확제 준비에는 따로 갹출할 필요가 없을 테니, 귀족들에게도 잘 전해 주게나.”

통 크게 세금 감면을 말할 정도를 보니 역시나 그라나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맞다.

그래서 더 손에 넣고 싶었건만 그 꼬마는 어떻게든 제힘으로 버텨 내겠다며 섭정을 거부하고 스스로 공작 자리에 올랐다.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나는 공의 편일세. 그 점은 잊지 말게나.”

국왕은 이미 해 줄 수 있는 것을 다 해 줬다.

핑계를 만들어 라이언을 영지로 보내 준 것도 국왕이었고, 그렇게 생긴 빈자리에 세드릭을 넣어 준 것도 국왕의 배려가 맞다.

하지만.

아직 세드릭은 아스타의 마음을 완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빌어먹을.”

국왕에게 이 이상 도움을 요청하는 건 무리다.

그러니 하루빨리 아스타의 마음을 돌려 라이언이 돌아오기 전에 혼약을 성립시켜야 한다.

조급해진 마음을 안고서 몽펠리에는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버님, 마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따라 세드릭이 먼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매번 혼이 날까 두려워서 눈을 피하기 바쁘던 아이였다.

그랬던 세드릭이 오늘따라 의기에 찬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스타가 제게 그랬어요. 저는 특별한 친구라고.”

“특별하다, 말은 좋지.”

“……저는 친구라는 말이 붙는 게 싫어요.”

사뭇 진지한 세드릭의 태도에 몽펠리에 후작은 화도 내지 않고 아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아스타를 집에 초대하고 싶어요.”

“식사 초대 건이라면 나도 들었다.”

후작의 말에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능하면, 어떤 핑계로든 하룻밤을 머물게 해서라도 지금의 관계를 굳건히 하고 싶어요.”

“무어라?”

그조차도 감히 생각지 못한 과감한 계획에 후작도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세드릭의 의지는 확고했다.

“친구가 아니라, 더 깊은 사이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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