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87)화 (87/123)

제87화

“……미안한데, 아스타.”

“응?”

잠시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사이 라이언은 곤란한 듯 내게 말했다.

“그런 거라면 욕실을 잠시 써도 될까?”

“응? 그럼? 물론? 좋지? 아니? 얼마든지?”

아니. 잠시만 그러니까. 어머. 어떡해. 난 몰라.

“내 부하들에게도 쉴 곳을 마련해 줬으면 해. 내가 갈아입을 옷도 함께 준비해 줄 거야.”

“아? 그래? 그렇구나? 그렇겠지? 그런 거겠지.”

“아가씨…….”

자꾸 히죽히죽 웃고만 있는 나 대신 미나가 나서서 모든 걸 처리했다.

“준비 마쳤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스타를 잘 부탁해.”

“헤에…….”

자꾸 웃기만 하는 나를 두고 라이언은 내 방에 딸린 욕실로 갔다.

“아가씨.”

“으응, 미나.”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어?”

그제야 미나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여기서 같이 주무실 건 아니죠?”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두 손을 저으며 나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러고는 애써 딴청을 부렸다.

“그러지 말고 간식 좀 가져와 줘. 따뜻한 홍차랑 시원한 레모네이드랑 쿠키랑 든든하게 샌드위치랑…….”

“……이 시간에요?”

“그러지 말고 오늘만. 응? 오늘만 부탁해.”

잔뜩 응석을 부리는 나를 두고 미나는 혀를 찼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 내가 뭘?”

“아니에요. 아무것도.”

한숨만 가득 쉰 채 미나는 내 부탁을 들어주러 자리를 비웠다.

늦은 시간,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 덕분에 별궁이 소란스러워졌다.

라이언의 시종이 갈아입을 옷을 전달하고 나오자 나는 그를 잡고서 물었다.

“오는 데 얼마나 걸렸어?”

“열 시간이 좀 넘게 걸렸습니다.”

“그런데 쉬지도 않고 다시 돌아가려고 한 거야?”

시종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세상에…….”

역시나, 요즘 들어 어린애 같은 세드릭하고만 붙어 있어서 잠시 잊고 말았다.

라이언이 어떤 앤지에 대해서.

“워낙 먼 길을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지라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도 저희 이야기는 도통 듣지 않으셔서요.”

“……영지 일이 많이 바빠?”

“마수들의 침공이 워낙 거세서 수도에 원군을 청하러 오는 길입니다.”

“그랬구나…….”

도통 연락이 뜸하다고 속이 상했었는데, 어른들이 작정하고 라이언의 근황을 숨기니 저렇게 고생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괜히 원망만 했다.

“오늘은 푹 쉬도록 해. 가능하면 하루 더 쉬고 가도 좋을 테지만…….”

“급한 서한은 제가 전하겠습니다. 모쪼록 주군께서 편안히 쉬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응. 내가 잘 돌봐 줄게.”

“존명.”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신하의 태도만 보아도 라이언이 저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후…….”

“다 씻었어?”

“덕분에, 달콤한 꽃향기가 내 몸에서 나는 게 좀 이질적이긴 하지만.”

“뭐 어때, 나랑 같은 향인걸.”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라이언은 태연히 침대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어.”

“말도 안 돼. 편지도 얼마나 열심히 쓰고 있는데!”

“……다른 녀석들과 즐겁게 논 이야기니까. 부럽기도 하고, 조금은 외롭기도 했어.”

“뭐래. 머리도 제대로 안 닦고서는!”

비스듬히 앉은 라이언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나는 기꺼이 라이언이 머리를 기대게 무릎을 내주고서는 부스스한 머리의 물기를 닦아 줬다.

“이거 봐. 참 손이 많이 가는 애라니까.”

라이언이 평소 하던 말을 그대로 받아치자 그는 금세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건 내가 하던 말 아닌가.”

“넌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돼.”

“이것도, 내가 많이 했던 말 같은데.”

“알면 행동으로 옮겼어야지, 바보야.”

머리의 물기가 다 마를 때쯤 미나가 시녀들과 함께 트레이를 잔뜩 가지고 왔다.

“다과는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드셔요.”

“응. 그럴 테니까 다들 어서 나가 봐.”

“……네.”

호언장담하는 내 기세에 미나도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빈틈이 보이기 무섭게 나는 냉큼 테이블로 달려가 과자가 잔뜩 담긴 접시를 침대에 가져왔다.

“방금 네 시녀가 분명 자리에 앉아서…….”

“입이나 벌려.”

뭐라고 하려는 바른생활 라이언의 입에 과자를 물려 줬다.

“잠시만, 목이 막히, 콜록! 콜록!”

“라이언, 죽지 마!”

부랴부랴 차를 가져다주자 라이언의 입에서는 또다시 비명이 쏟아졌다.

“윽, 뜨거워!”

“맞다! 뜨겁지! 레모네이드, 레모네이드!”

얼음을 띄운 레모네이드로 겨우 혀를 식히며 라이언은 부쩍 피곤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혹시 나한테 지금 화풀이하는 거야?”

“아니다,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 정말.”

“……아프다구.”

“어디가?”

입술에 다친 자리를 보여 달라며 나는 유심히 라이언의 입술 쪽을 바라봤다.

아프다고 칭얼거릴 때는 언제고, 시선이 코끝까지 맞닿자 라이언의 동공이 커졌다.

“어?”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째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게 매우 수상한데.

나는 그런 라이언을 잡기 위해 기꺼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거기 서!”

“잠시만, 아스타!”

아무리 키가 컸다고 해도 힘으로는 내게 이기기 쉽지 않을 거라며, 나는 나무 타기를 하듯 라이언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한참 괴롭혀 준 후에야 라이언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항복, 항복할 테니까 이거 좀 놔줘.”

“헤헹, 싫은데.”

“……못 말려. 정말로.”

“그럼. 누가 날 말리겠어.”

드넓은 침대 위에 우리는 나란히 누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너무 좋으니까. 나는 비스듬히 누운 채 옆에 누운 라이언을 빤히 바라봤다.

“안 가면 안 되는 거지?”

“돌아가야지. 그게 내 의무니까.”

“……그럼 내일 아침이라도 먹고 가.”

“아스타, 졸려?”

온종일 돌아다닌 데다 시간도 늦어서 그런가, 라이언이 뭐라고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니까.”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어느새 부드러운 라이언의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기분 좋아.’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지는데 갑자기 따스한 온기가 멀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라이언의 소매를 꼭 잡았다.

“가지 마.”

절대로 놔주지 말아야지. 혹시라도 잠든 사이에 도망이라도 가면.

그건 정말로 싫으니까.

“나는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다정한 속삭임을 들은 후에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들었을까.

“아!”

눈을 뜨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나쁜 놈이!”

분명 평소와 반대로 누워서 잠이 든 것 같은데 어느새 내 몸은 반듯하게 누워 이불까지 덮고 있었다.

서둘러 손님 방으로 가자 그곳에는 이미 시녀들이 방 정리를 거의 마쳤다.

“라이언은?”

“벌써 돌아가셨죠. 아침 식사까지 야무지게 하고 가셨어요.”

“그럼 날 깨웠어야지!”

“너무 곤히 주무셔서 그러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가씨, 어서 준비하셔야죠. 슬슬 세드릭 님이 올 시간이랍니다.”

“……몰라.”

차라리 꿈이었다면 깨지 않고 싶었는데, 라이언이 없는 침대에 다시 누운 채 나는 몸을 웅크렸다.

어째서일까.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더없이 외로워졌다.

* * *

“……눈이 부었어.”

통통해진 내 눈두덩이를 본 세드릭은 굳이 그 부분을 걸고넘어졌다.

“어쩌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따라 유난히 불편한 내 심기를 이제야 눈치챈 건지 세드릭은 부랴부랴 말을 주워 담았다.

그런다고 이미 한 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는가. 이미 가 버린 것을.

“미안하게 됐어, 세드릭.”

“어? 뭐가?”

“괜히 나랑 얽혀서, 곤란한 입장이 된 것 같아서 말이야.”

나중에 이 애가 결혼할 때가 되면 어른들은 괜히 이번 일을 들먹이며 흠을 잡게 될까.

얼마든지 어긋날 수 있는 사이라고 해도 아르그란드 백작 부인의 말이 좀처럼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는 딱히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다행이고.”

민폐라고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세드릭은 어째서인지 수줍게 두 뺨을 붉히고서는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나야 너만 좋다면…….”

“왕비님께 가자.”

배신이라는 키워드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다행히 왕비님은 아침부터 찾아온 우리를 언짢은 기색 없이 맞아 주었다.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서요.”

“네. 그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세드릭이 웬일로 먼저 나섰다.

“제 대모님께서 할슈타인 대공비에 대한 험담을 하셨습니다.”

“험담이라고요?”

“대공비께서 저희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먼저 믿음을 배신한 게 누구였는데!”

언성을 높이는 왕비님의 모습이 무척 낯설다. 화를 내는 모습을 앞에 두고 나는 냉정하게 사실관계를 정리했다.

“그럼 사실은 몽펠리에 후작이 엄마를 먼저 배신한 건가요?”

“그건…….”

“이슈발 몽펠리에.”

세드릭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쨍그랑.

왕비님의 마음 안에서 또다시 자물쇠 하나가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