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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86)화 (86/123)

제86화

아르그란드 저택을 나와 우리는 곧장 마차에 올랐다.

말이 달리고 바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외에, 우리 사이에는 한참 적막이 흘렀다.

“대모님께서 저러실 줄은 몰랐어.”

충격에 빠진 세드릭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난 정말 괜찮아.”

“……너무해.”

마음 약한 세드릭의 눈에는 벌써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아마, 아르그란드 부인은 지금 같은 상황을 가장 두려워했을 테지만.

‘그러게, 엄마한테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신 분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받은 만큼은 갚아 줘야 하는 법이니까, 나는 새로 얻은 키워드 이야기를 꺼냈다.

“[배신]이라고 했지?”

대체 뭐가 배신이라는 건지. 솔직히 말해 적반하장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

엄마 이야기에 마음이 급해진 탓일까.

나는 그만 유난히 말문이 줄어든 세드릭의 상태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 * *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새로 얻은 키워드를 어서 써먹어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왕비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어쩔 수 없지. 내일 다시 와 보는 수밖에.”

오늘은 온종일 정말 어마어마하게 돌아다녔으니까.

생각이 난 김에 나는 세드릭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 나중에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

“우, 우리 집에?”

“응. 가끔은 남의 집에 놀러 가 보고 싶은데 아빠가 허락해 줄 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말이지.”

“하긴. 아스타는 친구가 없으니까.”

“뭐라고!”

내가 왜 친구가 없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그러니까 내 친구는!”

“그라나다 공작에 검술 스승이었던 디오니스 경. 플로리아 공주님과 그 약혼자 정도뿐이잖아.”

“아니거든. 사회 체험할 때도 잘 지냈었거든.”

“귀족 친구가 없다는 말인데.”

“……내가 친구 없는 데 뭐 보태 줬어?”

차기 국왕 후보가 귀족들과 사사로이 얽히면 그것도 문제인걸.

철없는 소리에 눈을 흘기자 세드릭은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서 뭐라고 웅얼대기 시작했다.

“뭐, 그래서 나한테 기회가 온 거겠지만.”

“방금 뭐라고 했어? 내 욕 한 거지?”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 실례할게. 외박 건은 아버님께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니까.”

“말 잘 전해야 해. 괜히 화나게 만들지 말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고서 나는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해가 질 것 같아요, 아가씨.”

“……시간이 꽤 늦긴 했네.”

정신이 없어서 오늘은 분수대에 가지 못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피곤함을 견디고서 분수대 주변으로 향했다.

저 멀리에 후드를 쓴 그림자가 보였다.

‘저건…….’

드디어 마지막 공략 캐릭터가 등장한 걸까.

제대로 만날 약속을 잡지 않으면 또다시 랜덤한 확률에 몸을 던져야 한다.

“여기서 기다려.”

“아가씨!”

미나를 내버려 두고 나는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겨우 분수대 앞에 섰다.

거기에는 망토를 뒤집어쓴, 나와 비슷한 체구의 아이가 앉아 있다.

“안녕.”

“……안녕.”

인사를 나눈 후 아이는 가볍게 후드를 벗었다. 신비로운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내게 물었다.

“숨을 좀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그래, 그래야지.”

드디어 만난 덕분일까. 긴장이 풀린 탓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주저앉을 뻔했는데.

[액티브 스킬 ― 공중 부양]이 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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