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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82)화 (82/123)

제82화

퀘스트의 설명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세드릭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몽펠리에 후작이라니.

“내가 왜!”

“네가 뭐라고?”

“제가요, 아니. 제가 그러니까 우선은 후작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는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

“새로운 드레스 덕분에 오늘 주인공이 저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남아 실감했답니다.”

여러모로 해석될 수는 있지만 어쨌든 공격성은 많이 줄었다.

모두 당신 덕분이라고 폐하 앞에서 공을 돌리는 내 말에 몽펠리에 후작은 흡족한 듯 웃었다.

“그렇게 받아들여 주신다면야, 저 역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잘 됐구만. 참 잘 됐어.”

대놓고 기뻐하는 폐하와 달리 몽펠리에의 호감도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몽펠리에의 호감도가 한참 올라 있는 것부터가 미스터리에 가까웠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 채 폐하는 흡족한 듯 이야기를 더욱 진행했다.

“두 사람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그거야 당연히 세드릭과는 메인 공략 캐릭터답게 외모 합이 잘 맞는다.

게다가 얌전한 세드릭은 아무래도 날카로운 인상의 라이언보다는 어른들의 호감을 샀다.

일단은 햇볕 정책. 햇볕 정책을 유지하자.

“세드릭이 어찌나 싹싹한지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하더라고요”

그런 점은 참 좋다. 문제는 그거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지만.

“아비로서는 그런 유약한 점은 고쳤으면 합니다.”

세드릭의 칭찬을 해 줘도 이 인간은 그걸 또 고깝게 받아들였다.

“그럼 당분간 세드릭은 계속 아스타로테를 수행하는 것으로 하지요.”

“저희 역시도 부족함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어쩐지 완전히 한 팀이 되어 버린 어른들의 속을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밀담이 오간 걸까.

수상한 움직임이 못마땅한 나는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 * *

[보고 싶은 라이언에게.

네가 보내 준 아기 여우는 지금도 내 무릎에 잠들어 있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고민 중이야. 그리고 내게는 이것보다 더 큰 고민거리가 생겨 버렸어.]

몽펠리에 후작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그 방법이 뭐가 있을까,

라는 말을 라이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져서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서 이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렵다, 어려워.”

혼자 생각해 본다 한들 답이 나올 리가 없다. 나는 결국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카이 선생님을 찾으러 공주궁으로 향했다.

“나의 꽃, 플로리아. 당신을 사랑합니다.”

“카이,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 지금 뭐 해요?”

공주궁에 들어서자마자 염장을 지르는 두 사람을 보니 또다시 두통이 밀려왔다.

“아, 그것이…….”

“아버지가 슬슬 결혼 날짜를 잡고 싶다 하셔서 말이야!”

“결혼…….”

“아버지가 포기하셔도 조정에서 또 뭐라고 할까 봐 나도 무서웠는데, 의외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아.”

“귀족들이 조용하다는 건…….”

“평소라면 문제 삼았을 누군가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단 뜻이지요.”

몽펠리에가 작정하고 두 사람의 사이를 반대했다면 온갖 진흙탕 싸움이 됐을 거다.

사정을 모른 채 마냥 기뻐하는 언니와 달리 카이는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세드릭을 파트너로 삼은 건 정말로 현명한 선택이셨습니다.”

“그건…….”

“그라나다 공작이 자리를 비운 지금은 세드릭과 함께 다니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사교계에 두루 인망이 높으니까요.”

뭘 해야 할지는 몰라도 왜 해야 하는지, 이유는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나는 퀘스트 창을 열어 다시 조건을 확인했다.

“가면의 시련이라더니 진짜네.”

몽펠리에가 해 온 짓을 생각한다면 지금도 속이 뒤틀리지만, 방법이 없다.

별궁에 돌아온 후 나는 쓰다 만 편지를 마저 채워 나갔다.

[당분간은 몽펠리에와 연합 전선을 펼쳐야 할 것 같아. 나는 세드릭과 함께 사교계 활동을 하게 될 거고.]

쓸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이를 악물고 다음 문장을 채워 나갔다.

[분명 다들 내가 세드릭을 택했다는 식으로 말하게 될 거야. 네가 걱정했던 것처럼.]

라이언은 대체 어디까지 앞으로의 일을 예측한 걸까. 몇 번의 회귀를 거친 나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진 탓에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하지만 나는 이제 알 것 같아. 네가 없으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너무 외로워. 보고 싶고.]

돌이켜 보면 정말 라이언에게 의지해 여기까지 왔다. 폐하의 말대로 혼자서는 힘들었을 테니까. 나는 고운 편지지 구석에 나와 라이언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이 잘 수습되면 어서 돌아와 줘.]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데 한없이 먼 거리가 조금은 야속하기까지 하다.

“정신 차려, 아스타.”

나는 두 뺨을 매섭게 때리고서 날짜를 헤아렸다.

“아. 오늘도 가야지.”

* * *

마지막 공략 캐릭터는 참 좀처럼 만나기 힘들게 설계되어 있다.

역시나 텅 빈 분수대를 보며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바보. 대체 언제쯤 나오려나.”

“누굴 기다리시는 건가요?”

후드를 쓴 어른이 내게 물었다. 복장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이 사람은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애는 내 또래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이내 얼버무렸다.

“그냥요. 고민거리가 있어서 그래요.”

“무슨 고민이실까요?”

궁중 마법사들이 쓰는 보랏빛 망토 자락을 분수대 난간에 깔고 그는 기꺼이 나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 사람한테 털어놔도 되려나……. 뭐 어차피 이 사람은 나랑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괜찮겠지.

나는 그의 친절에 감사하며 지금 내 고민을 돌려 상담했다.

“원래 친척 아저씨랑 사이가 되게 나빴거든요.”

“저런, 곤란하셨겠네요.”

“응. 그런데 그 아저씨가 요즘 들어 조금 이상해졌어요.”

“이상해지다니요?”

“이상할 정도로 저한테 잘해 주고, 우리 언니한테도 잘해 주는 것 같고. 그 사람은 원래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뭘 하든 훼방만 놓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데, 마법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계셨군요.”

“기왕이면 더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 사이가 나빠지는 법은 알아도, 사이가 좋아지는 법은 도통 모르겠어요.”

“어려운 문제네요.”

반쯤은 횡설수설한 내 말도 그는 무척이나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정 그렇다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떤가요?”

“본인한테요?”

“아니면 가족에게라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만.”

하긴. 뭐가 문제인지는 몽펠리에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

어차피 부딪칠 거라면 본인과 직접 부딪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마법사에게 대놓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지금 바로 물어보려고요!”

그래. 미룬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나는 곧장 몽펠리에 저택으로 달려갔다.

* * *

몽펠리에는 눈앞에 앉은 아스타로테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요. 보고 싶어서 왔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저 당돌함은 정말로 ‘그 사람’을 빼닮았다.

“세드릭은 잠시 외출 중입니다.”

그 말만 하고 자리를 비우려고 했는데 아스타로테는 뜻밖에도 그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아니요. 세드릭 말고 저는 오늘 후작을 뵈러 온 거예요.”

“저를 말입니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후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순간, 아스타로테는 움찔하더니 후작의 소매를 놓고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혹시나 제 말을 안 듣고 이대로 떠나 버리실까 봐,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요.”

건방진 아이는 싫어하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아이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가 언짢은 마음을 풀자 아스타로테는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방긋 웃었다.

“갑자기 저를 왜 만나고자 하신 겁니까?”

배운 어른답게 몽펠리에는 달갑지 않은 손님에게도 응접실로 데려가 기꺼이 차를 내주었다.

아스타로테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서 지난번 파티 얘기부터 꺼냈다.

“드레스 고마워요. 덕분에 책봉식에서도 무사히 빛날 수 있었어요.”

“딱히 당신을 위해 한 일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새로 개발한 원단을 홍보하고자 함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제일 예쁘게 보인 건 사실이니까요.”

또다시 방긋, 당당하게 웃는 미소에 또다시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놈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저 애도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뭐 그렇게 됐습니다.”

후작이 아스타로테를 보는 시선에는 애증이 담길 수밖에 없다.

끔찍하게 증오하는 남자를 판박이처럼 닮았지만 크면 클수록 제 엄마를 닮아 가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세드릭을 저한테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스타로테의 말에 몽펠리에는 머금고 있던 차를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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