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81)화 (81/123)
  • 제81화

    “아이고, 삭신이야!”

    억지로 환하게 웃었더니 입꼬리가 떨려서 죽을 것만 같다.

    휴게실에 들어오자마자 나와 파트너인 세드릭은 사이좋게 각각 소파를 차지하고서 그대로 드러누웠다.

    “다과를 가져올까요?”

    “아니. 아무것도 안 먹고 싶어.”

    피곤함이 하늘을 찌를 수준이 되니 정말로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보다 못한 미나와 시녀들이 달려와 손수 구두를 벗겨 줬다.

    “이대로 올라가시겠어요?”

    “안 돼. 이따가 잠깐 또 얼굴 비춰야 하잖아.”

    정말로 잠깐 쉬러 들어온 거니까 곧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긴 해야 한다.

    라이언의 말대로 오늘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나.

    세상에서 제일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된 데는 이 드레스의 공이 크긴 했다.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좀 괘씸하네. 왜 이렇게 잘해 주나 했더니 설마 날 홍보의 수단으로 삼을 줄이야.”

    피로연에서 내가 입었던 반짝이는 드레스는 몽펠리에 후작이 준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세드릭과 커플룩으로 입으라고 그런 줄 알았더니.

    몽펠리에는 새로 개발한 원단을 내 피로연 드레스로 내보내며 막대한 홍보 효과를 챙기게 됐다.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던 빈민촌 개발 사업도 대신 해 줬으니까, 아버지께서도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

    이른바, 지난번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빈민촌 개발을 넘긴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거다.

    그래도 뭐 딱히 내가 손해 볼 건 없긴 하다.

    “그냥 서로 윈윈인 걸로 해 두는 건 어때?”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일단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까 이대로 잠이 들려는 순간…….

    뀨!

    발밑에서부터 꿈틀대며 올라오는 부스스한 털의 감촉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악!”

    “뭐, 뭡니까!”

    내가 비명을 지르니 세드릭도 덩달아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뀨?”

    “아 뭐야, 너였어?”

    내 가슴팍 위에 떡하니 앉아 귀를 쫑긋대고 있는 이건 일명 아기 여우.

    진짜 여우는 아니고 여우 사촌인 자그마한 동물이라는데, 그라나다에서는 제법 유명한 애완동물이라고 했다.

    “그, 그, 그건!”

    “아까 아빠가 주고 가셨어. 라이언이 보내 준 애완동물이래.”

    혼자 쓸쓸하지 말라고 이런 걸 보내 주다니. 라이언의 마음 씀씀이에 다시금 감동했다.

    “괘, 괘 괜, 괜찮은 겁니까! 물리는 거 아니에요?!”

    겁 많은 세드릭은 눈물까지 흘릴 기세로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역시 위기의 순간에 제일 먼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뺄 것 같은 캐릭터 순위 1위에 빛나는 얼굴 원툴 세드릭답다.

    “괜찮을 것 같은데. 잠시만.”

    라이언이 보낸 편지를 다시 읽으며 나는 아기 여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척.

    크기가 작길래 아기인가 했더니 이미 훈련이 다 되어서 온 아이라 앞발을 내주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나는 편지 속 설명대로 명령을 외쳐 봤다.

    “앉아!” 

    “엎드려!”

    “꼬리 흔들기!”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척척 해내는 묘기에 세드릭도 조금은 안심한 듯 아기 여우의 묘기를 구경했다.

    라이언의 편지에 적혀 있던 대로 나는 마지막 명령을 외쳤다.

    “죽은 척하기!”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기 여우는 꼬리를 쫑긋 세우고서 이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세상에. 완전 귀여워.”

    내 가슴팍에 폭, 하고 쓰러지고서 앞발로 드레스를 살짝 거머쥐는 것까지.

    동물이라고는 정말 믿기지 않는 연기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드릭은 깜짝 놀라 소파까지 박차고 일어서 내게 다가왔다.

    “이럴 수가 있어요?”

    “나도 신기하니까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왔지. 이렇게 똑똑한 대신 혼자 두면 외로워한다잖아.”

    영차, 하고 몸을 일으키고서 무릎에 얹어 놓으니 아기 여우는 금세 내 곁이 만족스러운 듯 몸을 웅크렸다.

    대체 이 짐승의 정체가 뭔가 싶어서 받자마자 [간파하는 눈] 스킬을 이미 써 봤지만…….

    [레벨이 낮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라이언이 보내 준 거니까, 적어도 내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터.

    나는 라이언의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그라나다에서 이 여우는 주인을 지켜 주는 영험한 동물로 여겨지고 있어. 비록 나는 곁에 없지만, 이 짐승이 나쁜 것들로부터 널 지켜 주기를 빌고 있을게.]

    “귀여워.”

    그 바쁜 와중에도 이걸 보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게다가 어마어마하게 귀여우니까. 보드라운 털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자 아기 여우는 기분이 좋은 건지 갸르릉 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내가 만져 주니까 좋아?”

    내가 누구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기 여우는 내 쪽을 빤히 보며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날름 내 손을 핥았다.

    개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데 어쩜 이리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하는지.

    겁 많은 세드릭도 이제는 만져 보고 싶은 건지 괜히 내 옆을 기웃거리며 눈치를 줬다.

    “만져 보고 싶어?”

    “뭐, 정 그렇게 권하신다면야…….”

    그냥 만져 보고 싶으면 만져 보고 싶다고 말을 하면 될 텐데. 굳이 말을 빙빙 돌리며 내가 먼저 권해 준 것처럼 말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이 애는 아닌 것 같아.’

    좋은 친구나 협력자로서는 충분히 괜찮을 테지만 연인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최소한 내가 넘어질 것 같으면 도와주려고는 해야 하는데. 비명이 들리자마자 내빼기부터 하는 걸 보고 나니 오히려 집 나간 이성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정말 귀엽네요.”

    그래도 복숭앗빛으로 두 뺨을 붉히고서 자그마한 동물과 놀고 있는 세드릭은 그냥 이 모습 그대로 박제해 놔도 되겠다 싶을 만큼 눈이 부시다.

    역시 관상용으로는 이 애를 따라갈 사람이 없는데.

    마치 화면 속 아이돌 같은, 뭐 그런 느낌으로 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열등반 여섯 명이 모두 멋지게 사교계 데뷔에도 성공했고 무기력하던 왕비님의 생활에 나라는 폭탄이 던져졌으니 빌헬름 오라버니의 공백도 어떻게든 메워졌다.

    비록 반년 동안 참 어지간히도 고생했다지만 이제 진짜 퀘스트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남은 건.

    “아, 맞다. 잠시만!”

    아직 드레스를 입은 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헉, 헉, 헉.”

    왕궁에 들어온 뒤로 거의 매일같이 분수대 주변을 살피고 있지만 역시나 오늘도 그곳은 텅 비어 있다.

    아무런 수확 없이 나는 풀이 죽은 채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뛰어가는 나 때문에 줄줄이 따라온 시녀들도 덩달아 당황했다.

    보다 못한 미나가 물었다.

    “아가씨, 여기에 뭔가 있나요?”

    “왜?”

    “아니 그냥, 입궁하고 몸이 불편하신 날만 빼고는 거의 매일 한 번은 여기에 오시는 것 같아서요.”

    “별건 아니야. 어서 돌아가자.”

    그 짧은 다리로 힘껏 날 따라온 아기 여우를 품에 안고서 나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벌써 3년 가까이 허탕이라니…….’

    아스타로테가 공략했던 다섯 캐릭터 중 마지막, 넬은 조금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만 공략할 수 있는 캐릭터다.

    지난번에는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만나서 그나마 좀 수월했다지만…….

    넬을 공략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만나기 힘들어서’다.

    사람을 싫어하는 마법사 넬은 평소 걸어 다닐 때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투명 마법을 써서 돌아다닌다.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사건 사고가 없는 한 그 애를 찾아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찾아야 해.’

    지난 공략을 겪으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디오니스 경, 카이 선생님, 그리고 노예 슈덴까지.

    특히나 슈덴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냥 그대로 밀어내려고 했는데, 뜻밖의 성과를 겪고 나니 나도 조금은 욕심이 생겼다.

    세드릭은 내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 애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친구로 지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다.

    왕의 자리는 포용하는 거라고 하셨으니까.

    내가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린 건지 세드릭은 휴게실로 돌아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녀왔어?”

    “그래. 연회장으로 돌아가자.”

    아기 여우를 미나의 품에 넘겨주고 드레스 자락을 다듬은 후 나는 다시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 폐하와 몽펠리에 후작이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스타, 잠시만.”

    실례를 무릅쓰고 세드릭은 살며시 손을 뻗어 내 손끝에 묻은 아기 여우의 털을 떼 줬다.

    “완전 고마워.”

    “별말씀을.”

    눈빛을 교환하는 우리를 두고 몽펠리에 후작은 어쩐지 매우 흡족한 미소로 내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침 잘 왔구나, 아스타로테.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그리고 눈앞에 새 퀘스트 창이 떴다.

    [(new)서브 퀘스트 ― 가면의 시련 Ⅳ]

    당신의 속내를 숨기고 숙적과의 관계를 개선하시오.

    달성 조건 : 몽펠리에 저택에서 하루 자고 오기

    세드릭 몽펠리에의 호감도 70 이상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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