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77)화 (77/123)
  • 제77화

    이번 퀘스트가 왜 가면의 시련일까. 사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속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거구나.’

    그냥 일개 왕족이라면 몽펠리에와 사이가 나빠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 후보는 다르다.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도량이 필요하다.

    라이언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그 애의 손을 잡고 저 멀리 그라나다로 떠나 버릴 거라면 이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을 테지만.

    나는 왕이 될 사람이니까.

    “크게 다친 건 아닙니다. 내일은 어떻게든 준비시켜 내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세드릭이 꼭 참석해 줬으면 해서요. 직접 얼굴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혹시 제 방문이 폐가 되는 걸까요?”

    어쨌든 당장 몽펠리에 후작은 내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못했다.

    시도는 했을지언정 나는 아직 뚜렷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라이언이 그랬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그러니까 웃을 수 있다. 악감정 같은 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는 진심으로 세드릭에 대한 염려를 담았다.

    “세드릭은 처음부터 워낙 잘했으니까요. 지금이라면 저도 세드릭과 스텝을 맞춰 무사히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심입니까?”

    “물론이죠.”

    상대가 거짓말을 판별할 줄 아니까 오히려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진심으로 세드릭이 파티에 와 주기를 바라니까.

    제법 높아진 방어력 때문에 내 마음을 모두 꿰뚫어 볼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몽펠리에 후작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진심으로 제 아들을 이렇게 생각해 주시니, 안으로 들어오시죠.”

    “감사합니다.”

    청산유수 같은 논리를 펼치며 나는 무사히 몽펠리에 후작의 승인을 받아 저택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됐다.

    “아스타로테 님을 뵙습니다.”

    방까지 안내해 주겠다며 선 사내의 얼굴이 어째 낯이 익다.

    분명 후작의 사생아, 대외적으로는 조카라고 되어 있던 사냥 대회 2등이었던 남자.

    “이슈발이라고 했던가요?”

    “이런 미천한 이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아주 잘 맞을 정도로 몽펠리에 후작을 그대로 빼다 박은 사내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에스코트를 받긴 하는데, 손을 얹자마자 그는 엄지로 내 손등을 슬쩍 쓰다듬었다.

    “이렇게 고귀한 왕실의 별을 뵐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세드릭은 저의 소중한 친구니까요. 아픈 친구를 위해서 이 정도도 못 할까요.”

    설마 싶어서 한마디를 해 봤더니 고작 그 한마디에 바로 반응이 왔다.

    “모자란 아이가 괜히 폐를 끼치게 된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모자라다니요. 세드릭은 우리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답니다.”

    까도 내가 까야지, 말하는 본새만 봐도 세드릭이 이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뻔히 보였다.

    이슈발은 기세등등하게 대가 약한 세드릭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을 테고.

    잘생긴 것 외에는 아무 장점 없는 그 애는 뭐라고 찍소리도 못 하고 얌전히 당하고만 있고.

    ‘그러다가 병이 나서 드러누웠구만.’

    불쌍한 세드릭.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는 오로지 하나.

    날 유혹해서 내 남편이 되는 길밖에 없는 이 애를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이쪽입니다.”

    이슈발은 성큼성큼 올라가 노크도 하지 않고 세드릭 방의 문을 덥석 열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던 세드릭은 이슈발의 등 뒤에 가려진 나를 보지 못한 건지 덥석 소리부터 질렀다.

    “들어오기 전에는 노크하라고 했잖아!”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그런 걸 따질까. 못난 놈 같으니라고.”

    “그게 무슨……. 아스타로테 님?”

    이슈발이 끝까지 이렇게 손님 앞에서도 세드릭에게 면박을 준다면 나도 똑같이 되돌려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나는 전에 없던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서 세드릭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남들 앞이라고 예를 차리긴. 그냥 평소처럼 아스타라고 불러.”

    “아, 아스타?”

    “행색이 이게 대체 뭐야. 예쁜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서는.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머리를 쓱쓱 빗는 것도 모자라 세드릭의 여윈 어깨를 꼭 끌어안고서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하는 말에 적당히 맞춰 줘. 저 사람 완전 재수 없어.’

    아무리 세드릭이 바보라도 이런 것까지 못 알아들을 만큼 머저리는 아니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세드릭은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옆자리를 비워 줬다.

    “왕비님께서 보내신 거야?”

    “내가 오고 싶어서 왕비님께 허락을 받았지. 파트너가 없으니까, 도무지 연습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미안해. 걱정을 끼쳐서.”

    깨가 쏟아지는 우리를 앞에 두고 이슈발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그런 그의 속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며 나는 마지막 홈런을 날렸다.

    “이슈발이라고 했었죠. 차를 부탁해도 될까요? 따스한 밀크티에 우유를 먼저 넣어서. 설탕은 두 숟가락만 넣도록 해요.”

    “……설마 저것도 못 외우는 건 아니지?”

    파들파들 목소리를 떨면서도 세드릭은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욱한 이슈발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니 뭐라고 하지 못하고 이내 입을 닫아 버렸다.

    “왜 그러고 있어요. 어서 가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

    상대는 바로 내일 국왕의 후계자로 책봉될 귀하신 몸이니까. 이슈발이 함부로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적을 만난 셈이다.

    “아가씨도 참. 제가 있는데 왜 굳이 그러셨어요.”

    “왜 그러긴 왜 그래. 저 인간이 재수 없으니까 그렇지.”

    완전히 가 버린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괜히 큰 소리로 허세를 부렸다.

    “어차피 2등인 주제에. 내가 1등인데. 내가 바로 무려 열한 살에 곰을 잡은 아스타 님이라고!”

    이슈발이 떠난 후에야 우리는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다시금 의기소침해진 세드릭을 앞에 두고 나는 물었다.

    “내일 파티에 안 오려고 할 것 같아서. 내가 직접 데리러 왔지.”

    “저는 다친 몸이니까요.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 어떻게든…….”

    “후작은 네가 무조건 참석할 거라고 했는데?”

    “아버님께서요?”

    세드릭은 울상을 짓고서 제 발목에 묶인 붕대를 내보였다.

    “이런 다리로 무도회에 나갔다간 분명 발을 헛디딜 거예요.”

    “에이, 별로 붓지도 않았는걸. 고작 이 정도로는 핑계가 안 돼.”

    “대신 실수는 할 수 있죠. 그랬다가는 또다시 아버지에게 혼이 날 테니까요.”

    세드릭이 잘하다가도 갑자기 땅을 파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을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혼자 고집을 부린 것도.

    이 애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라는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가 끝없이 드리워져 있다.

    “분명 또 실패할 거예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떨군 모습이 어째서 아빠와 겹쳐지는 걸까.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역시 모르는 척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도와줘도 그럴 것 같아?”

    “도와준다니. 어떻게요?”

    “잠시만.”

    세드릭에게 말하기 전에, 우선 라이언에게 먼저 뭐라고 얘기할지부터 정해야 한다.

    어쨌든 나한테는 라이언이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니까.

    ‘만약에 그 애가 또 혼자서 슬퍼한다면…….’

    어째서일까. 그 모습만은 정말로 보고 싶지 않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떠나기 전 라이언은 분명 말했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하게 되더라도 자신은 묵묵히 내 앞날을 축복할 거라고.

    “잠시만 기다려.”

    그런 말을 하면 더더욱 제대로 설명하고 싶어진다는 걸 모르는 걸까.

    비록 바보 미련퉁이 소인배지만 라이언은 이제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됐는데 왜 그걸 모르는 건지.

    잔뜩 독이 오른 나는 이를 악물고 라이언의 편지부터 뜯었다.

    “이게 뭐야.”

    “왜 그러세요?”

    [친애하는 아스타로테에게

    보내 준 편지 잘 받았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친구가 많이 생겼다고 하니 기쁩니다.

    나도 당신을 하루빨리 만나 함께 기쁨을 나누고 당신의 가장 영광된 순간을 맞이하는 모습을 직접 보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르노의 잔당들이 댐을 무너트리는 바람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지만, 저는 그라나다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기에 이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깊은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은 잊지 말아 주세요.

    사과의 의미로 당신의 아버지 편에 선물을 보냅니다.

    부디 당신이 무사히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기원하며.

    ―라이언 그라나다 배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