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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67)화 (67/123)

제67화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세력을 펼쳐 나가던 친 북방파가 이번 일로 완전히 실각했다.

이번 화재 사건 후 노예라는 빌미로도 수도에 함부로 북부인을 출입시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다.

북부 인구를 받아들이자는 의견 역시도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모두 몽펠리에의 계획대로다.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이지?”

아스타로테의 행적을 보면 어쩐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사람 같다.

그녀의 우수함을 알아보고 제 세력에 넣어 보려고 유혹도 해 봤건만 그 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엉뚱한 선택을 하곤 했다.

이슈발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그곳에 신경을 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슈발 몽펠리에. 대외적으로는 몽펠리에 후작의 조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후작이 결혼하기 전에 낳은 사생아다.

비록 이슈발 모친의 출신이 워낙 미천하여 정식 아들로 거두지 못했지만, 머리가 워낙 탁월해 몽펠리에 후작은 그를 조카로 꾸며 자신의 성까지 물려주었다.

“너를 정식으로 소개하지 못하게 된 것도 그 아이 때문이었지.”

“……그 일은 이제 잊었습니다.”

어쨌든 조카로 입지를 다져 놓았으니까. 필요에 따라 아들로 입양한 척하는 일은 숨쉬기보다 더 쉽다.

하지만 몽펠리에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뭔가 있어, 분명히 뭔가가 있어.”

속내를 떠보고 싶지만, 아스타로테는 예전부터 쉽지 않은 상대였다.

어릴 때는 그래도 표정으로나마 성과라도 있었건만, 이제는 제법 노련해진 덕분에 예전처럼 생각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모로 평범한 아이라고 보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 버렸다.

어디 그뿐일까.

할슈타인 대공을 살해하려 했을 때도 플로리아 공주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도, 매번 아스타로테의 훼방으로 실패하곤 했다.

“앞으로 어찌하실 겁니까?”

“글쎄, 다른 아이였다면 진작 내 손으로 쳐 내려 했을 텐데 아무래도 그냥 없애 버리기에는 아깝고.”

장기적으로 봐서는 왕실은 결국 제거해야 될 대상이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스타로테는 쉽게 내던지기 어려운 카드다.

“몇 년 전만 해도 누가 알았을까. 그 아스타로테가 차기 국왕 후보로 거론될 거라는 걸 말이다.”

기껏해야 유력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여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는 정도가 최선일 줄 알았다.

설마 아스타로테 본인이 전면에 나서는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폐하는 조만간 정식 후계자로 삼는다는 말과 함께 약혼 이야기를 꺼내실 거다.”

“그라나다의 애송이 말씀이십니까.”

“애송이라는 호칭을 붙이기에는 너무 약았지.”

몽펠리에 후작 본인은 라이언의 기량을 정확하게 파악해 냈다.

“하지만 기량만 뛰어나다고 해서 궁정의 흐름까지 혼자 어찌할 수는 없을 게다.”

“그 아이를 내보내실 참이십니까?”

“그럼. 내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지. 그 또래 여자아이라면 이 유혹을 견뎌 내기는 힘들 테니 말이다.”

후작의 부름에 곧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비율의 미소년은 빛이 날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세드릭, 앞으로의 일은 네게 달렸다.”

“예, 아버님.”

절대로 아스타로테를 그라나다 따위가 독차지하게 둘 수 없다.

몽펠리에 후작이 몇 년간 공들여 키워 낸 비장의 무기가 드디어 출동할 때가 왔다.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불탔던 가게를 재건하고 어느덧 반년 후.

나는 드디어 길고 긴 서민 생활 체험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일을 그만둔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축하해 주었다.

“너는 전설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남을 거란다, 아스타.”

“그러게 말이야. 귀하신 분께서 이렇게 직접 일하는 모습을 보니까 감격스럽기도 하고.”

“사장님, 그만 우세요.”

“흐어어어어어엉!”

처음에는 그렇게 까칠했던 사장님은 이제 완전히 나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어 버렸다.

“내가 너 없이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럼요. 사장님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요. 제가 이렇게 다들 잘 가르쳐 줬잖아요.”

새로 뽑은 아르바이트생들은 다들 잘 가르쳐 놨으니까. 그렇게라도 해 두지 않았다면 사장님은 정말 나를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미련이 남은 사장님에게 이별을 고하고 나는 드디어 길고 긴 아르바이트 생활을 마쳤다.

“이건 우리가 준비한 선물이란다.”

“궁에 돌아가서도 힘내렴.”

품 안에 가득 선물을 받아 들고 나는 미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궁으로 돌아가시는 거죠?”

“그래야지.”

“대공 전하께서 서운해하실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를 이어 나가는 동안은 계속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제 다시 궁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가장 아쉬움을 드러낸 사람은 역시 아빠다.

“결국은 이런 날이 오고야 마는구나.”

“아빠도 참, 이래서 반대하지 않으셨던 거죠?”

빵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둔 이유는 역시나 아빠 본인의 욕심 때문이었다.

나도 알고 아빠 본인도 알고 있지만 우리 둘 다 굳이 말하진 않았다.

“형님께서 그러시더구나. 아스타의 결심이 선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정식 후계자 발표를 하시겠노라고.”

드디어 이 길고 길었던 퀘스트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온 모양이다.

“저는 좋아요.”

이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 많은 고생들을 해 왔던 거니까. 담담한 내 반응에 아빠는 조금은 서운한 듯 괜히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빨리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단다.”

“어른은 무슨. 전 아직 아빠의 응석받이 아스타인걸요.”

행여 아빠가 서운해지면 곤란하니까 나는 두 팔을 벌려 아빠를 있는 힘껏 꼭 끌어안았다.

고작 그 정도 스킨십만으로도 아빠는 행복한 듯,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랑한단다, 아스타로테.”

“저도 사랑해요, 아빠.”

“오늘 밤은 아빠랑 같이 잘까?”

아빠의 달콤한 유혹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 아빠의 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큰 변화가 없다.

커튼의 색깔도, 벽에 걸린 장식도. 그림도. 침구 하나까지도. 아빠는 벌써 10년이 훌쩍 넘도록 똑같은 환경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살아가고 있다.

“엄마가 이렇게 훌륭하게 큰 네 모습을 보면 정말로 기뻐했을 텐데.”

깊은 밤, 나를 꼭 안고서 아빠는 정말 오랜만에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어쩐지 엄마 이야기는 무척 오랜만이라서, 나도 조심스레 아빠에게 엄마에 대해 물었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동안은 엄마에 대해 제대로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는 여전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아빠는 플레이가 시작한 지 1년 안에 금방 죽어 버렸으니까.

이렇게 아빠와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내 물음에 아빠는 금세 애틋한 미소를 머금었다.

“달빛 같은 사람이었지. 어두운 밤에도 길을 잃지 않도록 길을 알려 주는 아름다운 달빛이었단다.”

아빠는 늘 나를 별빛이라고 불렀다. 결국은 그 별빛도 커다랗게 뜬 달 앞에서는 너무나도 흐릿한 빛일 뿐이다.

어릴 때는 그 호칭이 꼭 사랑의 크기 같았다.

아무리 별이 빛난다 해도 달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저도 엄마가 보고 싶어요.”

“그러게 말이야. 정말로 그랬다면 어땠을까.”

나는 아빠의 품에 꼭 안긴 채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빈민촌에 갔을 때 거기 촌장님이 그랬어요. 나는 아빠가 아니라 엄마를 더 많이 닮았다고.”

“……빈민촌이라.”

“제 미모는 아빠랑 꼭 닮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얘기를 한 걸까요?”

“아스타가 엄마를 많이 닮긴 했지.”

당시에는 그렇게 싫어했던 아빠도 이제는 담담히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네 엄마도 그곳에 관심이 많았단다.”

“엄마가요?”

생전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빠는 쓸쓸한 미소를 띠고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봉사 활동을 오래 했었거든. 네 엄마도 그곳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 했어.”

“그래서 촌장님이…….”

“네가 나섰을 때, 억지로 말리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단다.”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아무도 말해 주지 않으니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굳이 내색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네가 내 눈치를 보며 자라는 건, 나도 싫단다.”

만약 아빠의 눈치를 보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다고 말조차 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

나는 아빠의 손을 꼭 잡고서 방긋 웃었다.

“역시 아빠의 딸로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요.”

“이젠 정말로 의젓해졌어.”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또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아빠와 함께 지내며 다시금 실감했다.

나는 이제 내 손에 거머쥔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전 정말로 훌륭한 왕이 되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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