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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50)화 (50/123)
  • 제50화

    “빌헬름 오라버니?”

    유난히 존재감이 흐린 탓에 그만 오라버니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바로 플로리아 언니의 남동생이자 카이의 친구, 그리고 국왕의 맏아들인 빌헬름.

    다만, 아쉽게도 국왕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오라버니는 왕세자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본인이 흥미가 없다고 봐야 할 테지만.

    “오라버니께서 여기는 웬일이세요?”

    “또다시 북부 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났단다.”

    나는 곧장 눈을 돌려 슈덴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살폈다.

    그가 왕궁에 들어온 이후로 멈춘 줄 알았는데, 오라버니는 심각한 얼굴로 사태를 전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니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토벌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라나다 소공작.”

    오라버니와 라이언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슬쩍 집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슈덴인가 그 애는 어때요?”

    “제가 성심껏 돌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에게 날을 세웠지만, 이제는 제법 잘 따르더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집사님은 좋은 사람이고 슈덴은 정이 고픈 아이니까.

    나는 증오하더라도 집사님이라면 분명 아버지처럼 잘 따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제는 매일 아침 저를 위해 꽃을 꺾어 와 주는 착한 아이랍니다. 양자로 들일까도 고민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예요?”

    “노예로 평생 살게 하는 건 너무나 가엾으니 말입니다.”

    집사 아저씨. 정말 좋은 사람이었구나. 진짜 이대로 아저씨의 양자가 되는 걸로 슈덴의 괴로움이 끝나면 다행일 텐데.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문밖에 트레이가 놓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집사는 반가운 얼굴로 나가서는 트레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잘 도착했군요.”

    새로 우린 따뜻한 차와 찻잔 세 개를 본 순간 나는 빠르게 뛰어가 문밖을 확인했다.

    “이걸 가지고 온 사람이 누구야?”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

    설마. 아니겠지. 불안을 안고서 나는 가볍게 향을 맡았다.

    ‘젠장.’

    옅은 아몬드 냄새. 이건 분명 독의 향기다.

    “라이언.”

    심각한 내 표정에 그 역시도 찻잔 앞에 다가와 향을 맡았다.

    “맞지?”

    “맞아.”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가 의심하는 대상을 정확히 짚어 냈다.

    “슈덴을 불러와.”

    * * *

    며칠 사이 슈덴은 완벽한 왕궁 시종 차림으로 자리했다.

    “부르셨습니까.”

    빌헬름 오라버니를 먼저 돌려보내고 방 안에는 나와 라이언만 남았다.

    “잘 지내나 궁금해서 불렀어요. 마침 찻잔이 세 개기도 하고요.”

    나는 손수 차를 따라서 그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었다.

    “한낱 시중드는 이에게 과분한 대접이십니다.”

    “또래 친구끼리 그런 말은 너무 서먹하네요.”

    “친구라니요. 한낱 노예에게 그런 호칭은 가당치 않습니다.”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직접 할 줄이야.

    아니, 슈덴 공략을 할 때도 그는 언제나 아스타로테의 충실한 노예 노릇을 자처해 왔다.

    주인이 누구든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걸까.

    저런 말이 로맨틱하게 들렸던 건 아무래도 내가 콩깍지가 너무 많이 씌어서 그랬던 것 같다.

    “라이언이 잘해 줘요?”

    나의 물음에 슈덴은 영혼 없는 대답의 정석을 선보였다.

    “아주 잘해 주십니다.”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그것이…….”

    “천천히 얘기해 봐요. 나는 직접 당신 입으로 듣고 싶은 거니까.”

    내 강요 아닌 강요에 슈덴은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정확하게 지시해 주시는 점에 감사합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저같이 미천한 자에게도 대등한 보상을 내려 주시는 것 역시 감사합니다.”

    “모두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이네요.”

    “그럴 리가요. 노예에게는 모두 과분한 처우입니다.”

    슈덴은 두 손을 모은 채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서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내 질문이 끝나고 이번에는 라이언이 물었다.

    “최근에 있었던 테러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

    “알고는 있습니다만 제가 관여한 바는 없습니다.”

    “그래?”

    “같은 북부 출신이라 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억울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길이 없습니다.”

    자기는 정말로 억울하다고. 죄가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를 앞에 두고 나는 찻잔을 가리켰다.

    “그럼 마셔요.”

    “예?”

    “마시라고요. 당신이 직접 내온 차니까. 아무 문제 없겠죠?”

    현재의 타임라인에서는 누구도 슈덴을 의심하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이미 그의 적개심을 알고 있다.

    나와 라이언, 그리고 빌헬름 오라버니까지. 주요 인물이 셋이나 모인 기회를 저 애가 절대 놓칠 리가 없다.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인정하지 않는 그의 속을 떠봤다.

    라이언에게는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있나 싶었지만 방금 대답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집사님.”

    “예, 아스타로테 님.”

    “마셔요.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갑작스러울 법한 내 지시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의 집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찻잔을 집어 들었다.

    만약 저 안에 독이 있다면 그는 죽게 될 터.

    “아무래도 오해를 산 모양입니다, 슈덴.”

    “집사님.”

    만약 이대로 차를 먹였다면, 모든 살인 누명은 집사님이 당하게 됐을 터.

    그랬을 사람이 자신을 믿어 준다면. 스스로의 졸렬함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도 집사는 슈덴을 곁에 두고서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이 사람이 당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풀 수 있도록, 도움이 된다면 좋겠군요.”

    “……!”

    그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려던 찰나, 슈덴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찻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슈덴?”

    “어째서 찻잔을 내친 거지?”

    대놓고 물어보는 라이언의 말에 그는 애써 말을 얼버무렸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찔리는 게 없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라이언이 슈덴을 마주했다.

    비슷한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의 기세에 밀린 슈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아직 어리구나.’

    독을 먹고 죽을지도 모르는 집사님을 보며 이 애는 진심으로 손을 떨었다.

    미래의 슈덴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집사님의 죽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죽게 내버려 두고 그 누명을 씌웠겠지.’

    바로 직전이었다 보니 슈덴 루트에 대한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그가 나쁜 일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된 건 몽펠리에 후작과 만나게 된 이후부터였다.

    “슈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해명이라도 해 보세요.”

    “집사님, 죄송합니다.”

    “체포하라.”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달려와 슈덴을 구속했다. 시종들이 달려와 깨진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원래 네가 준비했던 찻잔은 궁정 마법사들이 가져갔으니 곧 검사 결과가 나올 테지.”

    “그렇다면…….”

    당장 독을 먹고 죽을 뻔한 나는 깨진 찻잔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이런 짓을 저지를 거라는 걸.”

    안 그래도 북부 노예들의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슈덴이 정말로 무슨 일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기조로 전환되게 될 터.

    “너는 자칫 사적인 복수심 때문에 네 동포들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었어.”

    한 사람이 이런 짓을 저지르게 된다면 그 여파는 모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퍼지게 된다.

    만약 노예가 주인의 차에 독을 탔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미련 없이 재산 취급되는 북부 포로들을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라이언이 왜 너를 데려왔다고 생각해?”

    “그것은…….”

    “라이언은 네게 기회를 주려고 했어. 북부 출신이라는 선입견 없이, 네가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저는 그런 걸 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습니다.”

    파렴치한 저 말에 순간 뒷목이 뻐근해졌다.

    저 철딱서니 없는 것을 어쩌면 좋을까.

    “왕궁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 당장 우리 저택에서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라이언은 그런 기회를 네게 준 거야, 네 스승인 포카치아의 부탁을 받고서.”

    “그건…….”

    “타인의 호의는 공짜가 아니야. 세상 모두가 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지만, 정작 너 역시도 남이 준 기대마저 짓밟고 있어.”

    슈덴이 만약 마음을 달리 먹었다면, 이번 기회는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런 주제에 누굴 원망해? 결국 모든 기회를 저버린 건 너 자신인데!”

    매섭게 몰아붙이는 내 말에 슈덴은 긴 한숨을 쉰 후 고개를 떨궜다.

    “나는…….”

    “데려가.”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서 나는 라이언의 집무실을 살펴보았다.

    화려한 기색 하나 없는 검소한 방은 차분한 마호가니 목재 가구 몇몇만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포카치아에게 제보를 받았어. 데리고 있는 북부 포로 출신 노예 아이가 수상하다고.”

    “그럼 설마 처음부터…….”

    “너무 순순히 인정한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건 조사를 더 해 보면 알게 되겠지.”

    본인은 왕이나 뭐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 애 역시 보통은 넘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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