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카이를 앞에 두고 나는 일갈했다.
“이건 모두 언니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그걸 위해서라면, 그 악독한 몽펠리에 후작의 손도 잡아야 한다.
내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라이언이 말을 거들었다.
“차도살인지계, 라고 하죠.”
어차피 해치울 거라면, 굳이 직접 나설 필요가 뭐 있겠느냐고.
필요하다면 몽펠리에의 도움조차 마다하지 않겠다는 내 뜻에 카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저는…….”
“지켜보세요, 선생님.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선생님은 당신이니까요.”
당신이 행복해지지 않으면 나도 행복해질 수 없으니까.
나는 라이언의 손을 꼭 잡은 채 의젓하게 섰다.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럼요. 물론이죠. 대신 선생님도 약속해 주세요. 언니의 진심을 피하지 않겠다고.”
매번 도망친다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단언하는 나를 앞에 두고 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여기까지 왔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카이가 돌아갈 때까지 라이언은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지켜봤다.
그러고는 단둘이 된 후에야 물었다.
“……그래서 몽펠리에의 손을 빌리기로 했단 거지.”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로 도와줄 위인이 아니니 말이야.”
“흥미롭네.”
라이언은 가벼운 박수와 함께 내 쪽을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 설마 거기까지 계산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나는 네가 말한 것 같은 대단한 건 몰라.”
나는 무심하게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
미처 돌려주지 못한 사랑에 매달린 채 카이는 결국 아스타로테를 버렸다.
“……저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언니가 아주 조금은 부럽긴 했지.”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은 너무나 예쁜 추억으로 그의 마음속에 남아 변함없이 살아갈 텐데.
플로리아의 그림자를 볼 때마다 나는 언니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지금 나한테는 네가 있으니까.”
무미건조한 내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라이언의 입꼬리가 가볍게 위를 향해 휘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러니 너만은 내 믿음을 배신하지 말아 줘.”
“당연하지. 언젠가 네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그날을 위해.”
라이언은 기꺼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 * *
수업의 발표 과제로 드디어 첫 법안이 만들어졌다.
[15―2구역 개편 방안에 관한 법률]
일부러 빈민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카이는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우리가 만든 법안을 하나하나 첨삭해 줬다.
“설령 통과되지 않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어린애 장난 같은 이 안건이 평의회에 올라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니까요.”
“훌륭한 선생님한테 배웠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까르륵 웃는 내 반응에 카이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거라면 즐겨도 좋을 텐데.
나는 라이언의 손을 잡고서 폐하를 만나러 갔다.
“요 꼬마 녀석들 덕분에 선생만 바짝 말라 가는구나.”
오늘 우리가 낸 건이 나온다는 소식에 내부는 벌써 술렁이는 공기로 가득 찼다.
오늘따라 유독 화색이 도는 몽펠리에 후작은 일부러 우리를 찾아와서 친한 척까지 했다.
“만반의 준비를 기하셨다 들었습니다.”
“뭐 그렇게 됐죠.”
“기대가 큽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일부러 골치 아픈 일을 떠넘긴 줄도 모르고 몽펠리에 후작은 한 방 먹일 생각에 잔뜩 들떴다.
내색조차 하지 않고 웃고 있는데 라이언은 그런 내 모습을 그저 빤히 바라만 볼 뿐이다.
“왜 그래?”
“아니, 좀…… 낯설어서.”
뒤통수 한 번 맞는 걸로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거면 좋은 게 좋은 것 아닐까.
라이언은 그런 내 모습을 어쩐지 학부모라도 된 것처럼 흐뭇하게 바라봤다.
“과연. 왕의 그릇이라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내부에 들어서자 벌써 싸늘한 시선들이 매섭게 내리꽂혔다.
언젠가 누군가는 건드려야 할 뇌관이라지만 다들 자기 대에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왜 굳이 이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시는 건지.”
대놓고 혀를 차는 귀족들도 적지 않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앞만 바라봤다.
“오늘은 다들 알다시피 특별한 안건이 준비되어 있음이니.”
폐하의 인도 아래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이곳이 수도의 흉물로 버려지는 것보다는 개발을 통해 수도 내로 편입시키는 것이 이롭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빈민촌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법안의 개정.
현재는 빈민촌을 개별 구역으로 묶어 두었기에, 반대로 그곳을 개방할 때도 결국은 법을 바꿔야 한다.
“아무리 두 분이 공부하시는 과정이라 하나 이는 실제로 효력이 있는 법안입니다.”
“잘 알고 있어요. 우리 역시도 장난으로 준비해 온 게 아니니까요.”
거들먹거리는 귀족의 시비에 나 역시 강하게 응대했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 속에 국무회의가 시작됐다.
“왜 장난감입니까? 그 땅을 정말로 이용할 거라면, 차라리 오페라 하우스를 짓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회의 시작부터 맹렬한 반대가 시작됐다.
수도의 숙원사업인 오페라 하우스 건설을 언급하는 이 사람도 그렇고.
“이미 잘 굴러가고 있는 사업을 굳이 법까지 바꿔 가며 간섭하는 건 좀 무리한 처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토를 다는 저 사람도, 죄다 피오니 블룸의 관계자들이다.
맹렬한 반대 의견이 쏟아지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몽펠리에 후작 쪽을 힐끔 바라봤다.
“확실히, 빈민가에서 만든 장난감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꺼리는 부모들도 있겠지요.”
교활한 그의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까요? 그저 재미나게 가지고 놀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을요.”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긴 합니다.”
갑자기 내 말에 수긍하는 후작의 모습에 맹렬히 반대하던 귀족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몽펠리에 후작?”
“투표 전에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게 있을 텐데 말입니다만. 왕국 법에서 해당 사업과 관련된 자는 표결에서 제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내가 하면 참 곤란했을 말도 몽펠리에 후작이 하니 캐릭터가 제법 잘 맞다.
물론 그는 내가 하려는 사업을 빼앗을 생각으로 도와주는 거겠지만.
“저는 전적으로 아스타로테 님의 말씀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자기가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후작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제가 할 말을 후작께서 다 해 주셨으니, 무어라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몽펠리에 후작도 잘 이용하니 제법 쓸모가 있다.
마지막으로 라이언이 한마디를 보탰다.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절대로 같은 편이 될 수 없을 것만 같던 우리가 한편이 되었으니 뭐가 무서울까.
대놓고 반대하던 관련자들을 빼고 나니 투표의 결과는 2 대 1 비율로 압승이다.
그렇게 우리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 * *
“후우. 힘들었어.”
마지막 표결이 끝날 때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스타로테 님.”
싱글벙글하는 몽펠리에를 보내고서 나는 라이언과 함께 어수선한 귀족들의 모습을 둘러봤다.
“이번 건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리를 꼬고 앉아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표결에서 쫓겨났던 귀족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몽펠리에 후작은 벌써 사업 이야기로 정신이 없다.
“너무 순조로운데.”
그래서 오히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연 카이 아펠바움의 입김이 대단하군요. 저 어린 분들을 내세워서 기어코 법안을 통과시키다니.”
“저 인간이!”
뭐라고 하려는 나를 라이언이 막았다.
“아스타, 잠시만.”
“왜?”
조용히 해 보라는 그의 신호에 나도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몽펠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플로리아 공주를 정말 그 미천한 자와 결혼시키시려는 모양입니다.”
어쩐지 신이 나 보이는 그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흡족함을 숨기지 못했다.
“차라리 잘된 일 아닙니까.”
저 인간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걸 보면 보통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다.
섬뜩함을 안고서 나는 몽펠리에 후작에게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
대수롭지 않게 꺼낸 내 말에 그는 선심 쓰듯 히죽 웃었다.
“이번 기회에 귀찮은 짐 하나를 덜어 드렸으니,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심히 불길한 말에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곧장 미나를 찾았다.
“미나, 언니는, 플로리아 언니는 지금 어디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