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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38)화 (38/123)

제38화

어딘지 모르게 집착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폭소를 터트렸다.

“뭐래, 얘가 진짜!”

그러면서 그의 옆구리를 힘차게 가격했다.

“윽!”

“뭐야, 엄살은.”

“아니, 진짜로 아프…….”

“괜찮아?”

허리를 봐 주려고 하다 보니 어느새 서로를 껴안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두 분의 사이가 매우 좋으시군요.”

그리고 문제의 손님이 찾아왔다.

“……저 사람이었어?”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물주니까.”

빈민촌 부흥 퀘스트의 마지막 달성 조건.

운영을 도와줄 귀족 찾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역시나 몽펠리에 후작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적도 얼마든지 동지가 될 수 있는 법이건만 그는 여전히 재수 없는 얼굴로 우리 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절 먼저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내 계획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동시에, 날 엿 먹이려고 벼르고 있는 존재.

몽펠리에 후작은 내가 만나자는 연락을 넣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좋다는 회신을 주었다.

“우리한텐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치, 라이언?”

“오랜만입니다, 몽펠리에 후작.”

국무회의 자리에서 실컷 봤으면서 나도 라이언도 오랜만인 것처럼 내숭을 떨었다.

별도로 마련된 티 룸으로 시녀들이 차를 가져왔다.

“저를 굳이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만.”

“배배 꼴 필요 없이 말할게요. 도움을 주셨으면 해서요.”

“도움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하고서 대뜸 이번 계획에 대해 정리한 서류를 그의 앞에 보여 주었다.

“제가 빈민촌 쪽을 재정비하려는 건 이미 들으셨을 거예요.”

“……글쎄요. 저는 처음 듣는 일이라.”

본인 입으로 아빠한테 빈민촌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다 일러바쳤으면서, 뻔뻔한 몽펠리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그쪽 사람들도 살아야 하니까요. 새롭게 삶의 터전을 갖춰 주고 싶어요.”

“그런 자리를 고작 그런 식으로 놀리는 건 너무나 아깝지요. 저라면 차라리 그대로 밀어 버리고 오페라 극장이라도 지었을 겁니다.”

“아아, 그러세요?”

일부러 긁으려는 말을 던져 보지만 나도 라이언도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자 저쪽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슬그머니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 큰돈이 될 거예요. 그래서 공동 투자를 제안드리고 싶어요.”

“……공동 투자라.”

“용돈으로 막아 내기에는 금액이 상당해서요.”

“토목 공사가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참 순진한 생각을 하셨군요.”

너는 그렇게 생각이 없냐 이 멍청아―를 좋게 말한 거지만 나는 뻔뻔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순진하죠.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본인 입으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래서 연륜 깊은 몽펠리에 후작께 도움을 청한 거랍니다. 저희도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유력한 상인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두었답니다.”

거의 다 된 계약의 내역까지 밝히자 후작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서류를 몇 장 더 뒤져 보았다.

“이것도 카이 아펠바움이 시켰습니까?”

“글쎄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안 낚이겠다는 물고기의 발악 따위.

“어차피 우리 계획은 무사히 실행될 거예요. 몽펠리에 후작에게도 기회를 드리는 것뿐이랍니다.”

“……세상일이 그리 아스타로테 님 뜻대로 돌아갈지는 모르겠군요.”

끝까지 토를 달면서도 후작은 서류 한 장 빠트리지 않고 야무지게 챙겨 나갔다.

“저자는 왜 끌어들인 거지?”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나는 팔짱을 끼고서 멀어져 가는 후작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 * *

그리고 며칠 후, 카이 아펠바움이 직접 우리를 찾아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응?”

“잠시 물러나지.”

내 침소에 점심을 먹으러 온 라이언은 눈치껏 사람들을 물려 주었다.

나는 입 안에 남은 토마토 조각을 꼭꼭 씹어 삼키고서 선생님에게 자리를 권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지금 밥이 넘어가게 생겼습니까?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무시무시한 질타에 나는 어깨만 괜히 으쓱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몽펠리에 후작이 개발 건을 가로챈 것, 모르셨습니까?”

“네?”

금시초문이라는 양 눈을 깜빡이자 카이는 황당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어제 그러더군요. 개발 공사 자체는 몽펠리에 후작과 치르기로 했다고.”

“……빠르네. 벌써 도장까지 찍은 거예요?”

“찍었다고 합니다. 피오니 블룸 쪽에서도 이 일을 알고 노발대발 중이라는데, 대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어쩌기는 뭘 어째요. 다 잘 된 것 같은데.”

“예?”

우리 선생님은 참 똑똑한데 아직 내 의도를 파악하진 못한 것 같다.

이렇게 맛있는 계획을 내가 왜 굳이 몽펠리에 후작을 통해서 설명한 걸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나는 아직 어린걸. 직접 할 수는 없는데, 아쉽게도 우리 아빠는 사업에 소질이 없어요.”

꽃처럼 곱게 곱게 자란 아빠의 자랑거리는 오로지 미모뿐.

그 외의 것들은 솔직히 말해.

딱히 쓸모가 없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일단 몽펠리에 후작이든 누구든 촌장님과 계약한 상대는 내가 수배한 상인이에요. 그 사람은 폐하께 소개받은 사람이고.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죠?”

“……예.”

“우리가 확인했던 건 그 사람과 촌장님 사이에 오간 계약서에요. 독소조항도 모두 빼고서 상당히 괜찮은 조건으로 합의에 다다랐죠.”

“그런데 몽펠리에 후작이…….”

“후작을 어떻게 찜 쪄 먹을지는 상인의 역량에 달린 거죠.”

어차피 마을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거래를 맡기는 건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상인을 대리인으로 삼았다.

“상인이 바가지를 씌워서 등쳐 먹든지, 오히려 몽펠리에에게 골수까지 뽑혀 먹히든 저쪽에서 마을에 지불해야 할 대가를 바꿀 수는 없죠. 그건 계약 위반이니까.”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이룰 수 있고, 상인은 그걸 다시 몽펠리에에게 팔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 법으로는……!”

“응. 빈민촌을 개선하려면 법을 바꿔야 하는데, 거기에는 몽펠리에 후작의 협조가 필요하고요.”

자기 이익이 걸린 문제가 함께 걸린다면, 그것도 내 뒤통수까지 함께 칠 수 있다면 악의로 똘똘 뭉친 몽펠리에 후작은 분명 내 미끼를 물게 될 것이다.

“그쪽은 어떻게든 이익을 뽑아내기 위해 열심히 팔아 줄 거예요. 중간 과정이 어떻게 되든, 피오니 블룸의 기술은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지만요.”

“어차피 사람들 눈에는 똑같은 장난감일 뿐입니다.”

자기 고향의 일을 굳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며 나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모조품과 진짜는 품질에서 차이가 나요.”

“누가 그런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단 말입니까?”

“플로리아 언니는 알아봤어요.”

내 입에서 플로리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는 금세 입을 꽉 다물고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인기 투표 꼴찌. 못나디못난 사내지만 언니가 고른 남자니 일단은 형부가 되는 셈이다.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어 주고 싶진 않으니까 나는 딱 잘라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빈민촌이 빈민촌이 아니게 된다면 카이 선생님도 더는 언니를 밀어낼 이유가 없어지겠죠. 안 그래요?”

“하오나 공주께서는 왕위 계승권이…….”

“언니가 국왕에 걸맞는 인재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촌철살인 같은 내 추궁에 카이는 금세 입을 다물고 고뇌에 빠졌다.

“그건…….”

“언니의 행복은 언니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짜 맞춘다 한들 언니가 기뻐할 것 같진 않아서요.”

신분을 핑계로 물러나려는 그의 핑계는 이미 뻔할 뻔 자다.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긴 한숨과 함께 카이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릅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어떻게 아펠바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건지까지, 전부 다.”

단언하는 나를 두고 카이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과거가 그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플로리아가 죽고 몇 년 후.

[당신을 좋아해요!]

플레이어는 고백 버튼을 선택하지만, 캐릭터는 주어진 대화를 벗어날 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과연 어떤 심정으로, 아스타로테의 고백을 받아들인 걸까.

카이 루트는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비극이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당신이 대체 뭘 안다고.”

“알고 있어요. 전부 다.”

카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신분의 차이에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일부러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밀어냈지만, 플로리아는 눈치채고 말았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신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까지도.

“언니는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도 버리겠다고 했어요.”

“어찌 그런!”

“그만큼 언니는 진심이라고요!”

그러니 이제는 카이가 결심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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