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37)화 (37/123)

제37화

“비둘기라고?”

너무나 촌스러운 호칭에 경악했다.

“응?”

“아, 아니야. 아무것도.”

괴상한 이름과 달리 성능만은 엄청나게 좋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언니의 아기 비둘기가 되어 줄게.”

“아기 비둘기라니!”

내가 지은 거 아닌데.

게임 안에서 진짜 나온 말인데.

“그게 뭐야!”

언니는 그제야 정말로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 * *

98점 리포트를 작성한 덕분에, 폐하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 정도면 계약서 초안을 작성할 정도는 되겠구나.”

“그렇죠, 폐하?”

“그렇다고 너무 촐랑거리지는 말고. 마이너스 2점이 아쉽구나.”

“그건!”

오타 두 개 때문에 감점이지 내용이 별로인 건 아닌데.

억울해하는 나를 두고 폐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잘했어. 정말로 대견하단다.”

폐하는 큰 손으로 내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 주었다.

* * *

“아스타, 이거 받아 왔어.”

“고마워, 라이언.”

나보다 외출이 자유로운 라이언이 빈민촌과의 연락을 맡았다.

기존 계약의 부당함을 충분히 검토한 후 우리는 새롭게 계약서를 만들었다.

그동안은 계약서도 없이 저쪽에서 주는 대로 받아야 했다.

엄밀히 말해 엄청난 부당 계약이 아닐 수 없다.

“아가씨, 상인이 도착했습니다.”

폐하의 소개로 우리는 시장에서 제법 거물이라 불린다는 상인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만남의 장소는 라이언이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잡았다.

“사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폐하의 소개로 만나게 된 콧수염이 달린 상인은 우리 앞에 미리 준비해 왔다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나와 라이언은 협상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아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거랑 이거, 그거 아냐?”

“그렇지. 이것도 마음에 걸리네.”

“충분히 사정을 배려해 드린 계약서라고 생각합니다만?”

싱긋 웃고 있는 상인을 앞에 두고 우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기엔 독소조항이 한가득 들어 있는걸요.”

“호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 겁니까?”

아직 어리다고 대놓고 무시하는 어른을 앞에 둔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예를 들어 여기. 하루 늦을 때마다 가격의 두 배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요. 일주일의 유예기간 이후로 수정해 주세요.”

“저희도 땅을 파먹고 장사하는 게 아닌데, 어찌 그렇게 할까요?”

“그렇다면 타협안을 만들어 보죠.”

어린애라고 우습게 보던 상인은 적절하게 치고 들어가는 조율에 난감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도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동 중에 파손된 물건은 공급자 쪽에서 전액 배상한다.”

“……통상적인 사례가 그렇습니다만?”

“누가 잘못을 했는지 밝혀서 해야죠. 일부러 망가트리고서, 덮어씌워 버리면 어떡해요.”

조목조목 경우의 수를 짚어 나가며 우리는 열심히 계약서를 수정해 나갔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지?”

“그러게.”

“곤란하군요. 저희 쪽에 이렇게 큰 부담을 지우시니, 계약 여부를 다시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리스크가 크다는 말인 거죠?”

이미 달성한 두 개의 조건을 가지고서 나는 철저하게 사업가적 시각에서 설득을 시작했다.

“돈을 들이지 않아도 포장은 이미 업그레이드가 됐고, 모조품도 이제는 제대로 판별할 수 있어요.”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아직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으니까 내 말만 믿고 사업을 시작했다가는 상인도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아예 발을 뺀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나는 그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이번 건은 엄청나게 큰 사업이 될 텐데. 빈민촌 쪽에 돈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당장 수도 안에 개발 호재가 생기거든요?”

“하지만 만약 취소라도 된다면.”

“잘 생각해 보세요. 수도 안에 남은 유일한 미개발 지역이에요. 애초에 건물을 세울 곳이 거기밖에 없다니까요?”

일단 일 처리를 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 법안 통과도 훨씬 수월해진다.

“작정하고 건물을 세우고, 아예 상업 지구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요?”

“반면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역시나. 폐하의 소개답게 절대로 그냥 넘어와 주는 법이 없다.

나는 후후후, 웃으며 귀여운 꽃무늬 가방에서 수표를 꺼내 보였다.

“돈이라면 염려 마세요. 딸 바보인 할슈타인 대공께서 든든한 물주가 되어 주실 테니까요.”

아마 이 순간 아빠는 이상하게 뒤통수가 간지러울 것이다.

팔랑팔랑 흔드는 수표를 앞에 두고 상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스타로테 님은 아직 너무 어리셔서, 어떤 법률적 책임도 지지 못하시는 것을요.”

“그건!”

“물론 이미 알고 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사랑하는 따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실 분이라는 것 정도는.”

호호호호호.

머쓱하게 웃으며 나는 괜히 딴청을 부렸다.

젠장.

내 허수가 모조리 간파당할 줄이야.

난감한 대치 상태에서 라이언이 나섰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 보증을 서지요.”

“라이언.”

“소공작께서 보증을 서신다라. 그건 제법 믿음직스럽군요.”

아직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는 나와 달리, 라이언은 편찮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사실상 공작의 역할을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귀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셨을 테지요.”

“라이언.”

다른 것도 아니고 보증이라니.

만약 실수하면 막대한 손해는 모두 그라나다에서 지게 될 테지만 라이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위해 나섰다.

“저는 아스타로테를 믿습니다.”

“……소공작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나도 좀 믿어 달라고요!”

의견은 믿지만 자금력은 못 미더운 나와, 아예 물주가 되어 버린 라이언.

우리 둘의 성화에 결국 상인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분을 가르친 스승이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해지는군요.”

폐하도 다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다.

나는 뻔뻔스레 씨익 웃었다.

“그거야 물론 카이 아펠바움 선생님 덕분이죠.”

* * *

[히든 퀘스트 ― 빈민촌 부흥]

(완료)우수한 거래처 연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