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27)화 (27/123)
  • 제27화

    “여기는…….”

    “모종 연구를 위한 온실입니다. 하루에 두 번 관리할 때 말고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게 대체 왜 선물인지에 대해 나는 3초 정도 고민했다.

    “아!”

    옆에 선 라이언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디오니스 경,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두 분의 밀회를 위해 제 핑계를 대시는 줄 오해했습니다.”

    때때로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한없이 진지한 가르침을 고작 그따위로 이용한다면 그의 날카로웠던 태도도 이해가 간다.

    “저는 진심이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기어이 해내시는 모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온실의 문을 열며 그가 말했다.

    “그러니 두 분이 좀 더 편안하게 만남을 즐기실 수 있도록…….”

    이곳을 소개해 주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모양인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다.

    “안에 누가 있는데?”

    라이언의 말에 우리는 숨을 죽이고서 내부를 살폈다.

    저 멀리서 울먹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플로리아 언니다.

    “다들 물러나요.”

    내 손짓에 라이언과 디오니스 경이 물러나고 나는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벌써 이 이벤트가 시작될 줄이야.’

    처음 아스타로테가 불길한 징조를 만나게 되는 건 아빠가 돌아가시고 왕궁 안에 들어온 뒤 얼마 안 된 때였다.

    지능 캐릭터인 카이와의 첫 조우 이벤트는 다름 아닌 플로리아와의 말다툼을 목격하는 곳에서 시작하곤 했다.

    ‘아직 너무 이른데.’

    이대로 못 본 척 돌아가도 되는 걸까. 아니면 벌써 무언가가 시작된 걸까.

    “무슨 일이야.”

    “……우리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두 사람 다 이번만은 내 말대로 해 줘요.”

    어른들에게만큼은 절대로 말하지 말아 줬으면.

    애원에 가까운 내 말에 두 사람 모두 선뜻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가 이런 말까지 하게 되는 데에는,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라이언.”

    “디오니스 경의 배려는 다음에, 인적이 드물 즈음 다시 방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새 장소를 파악했다는 안내 메시지를 애써 못 본 척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때마침 폐하의 시종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스타로테 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서 폐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혼자면 몰라도 둘이라면 무섭지 않다.

    그렇게 다짐했는데.

    “폐하. 아스타로테 할슈타인과 그라나다 소공작 들었사옵니다.”

    “아스타로테만 들라 하라.”

    각오가 무색하게도 폐하는 각개격파를 택했다.

    “잘 다녀와.”

    손을 흔들어 주는 라이언을 뒤로하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홀로 폐하의 알현실로 들었다.

    “자리를 비워 다오.”

    “예, 폐하.”

    시종조차 모두 물리는 바람에 알현실에는 폐하와 나밖에 없다.

    이건 어떤 말을 해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거란 얘기다.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이유를 아느냐.”

    근엄한 폐하의 말씀에 나는 잠시 상태창을 슬쩍 켜 봤다.

    ‘호감도가 80이니까.’

    어쨌든 날 싫어하는 상태는 아니란 거다. 나는 괜히 장난스레 씨익 웃었다.

    “우승했으니까 상을 주시려는 거 아닌가요?”

    “…….”

    아무래도 틀렸나 보다.

    폐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서는 망설임 없이 내 두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으아아아아아아?!”

    “요 녀석. 혼날 소리만 사서 하고 있구나.”

    있는 힘껏 잡아당긴 뺨이 욱신거렸다. 갑자기 공격이라니, 나는 온몸으로 항의했다.

    “아하여(아파요)!”

    “아파야지. 아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혼쭐이 나야지.”

    “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억울하다.

    “그런 게 어딨어요. 무사히 암살자도 처리했고, 곰도 어떻게든…….”

    뭐라고 말을 할수록 폐하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호감도가 깎일 것 같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잘못을 모두 솔직하게 시인했다.

    “……라이언이랑 둘이 있고 싶어서, 저는 호위인 디오니스 경을 따돌리고서 깊은 숲으로 몰래 도망갔어요.”

    “그래서?”

    “잘못했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로는 잘 알고 있는데, 어쩐지 하나도 모르는 것 같구나.”

    진심이라고는 한 숟갈도 들어 있지 않은 내 말의 속뜻을 폐하는 이미 다 눈치채고 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요!”

    “어째서?”

    미간이 찌푸려지고 폐하의 목소리에는 다시 노여움이 가득하다.

    여기서 대답 하나만 잘못해도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터.

    이 게임의 끔찍한 점은, 선택지를 잘못 고르더라도 내 삶을 리셋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실수가 생기더라도 아스타로테는 끝까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가는 제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이들은 그렇게 쉽게 죽어 나가는 게임이지만, 이 시스템은 엔딩 전까지 주인공의 죽음을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니까.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도, 위험한 짓을 자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죽고 폐허가 된 상황에서 아스타가 행여나 스스로 이 세상을 저버리지 못하도록.

    주인공이란 어째서 이리도 잔인한 역할을 짊어져야 하는 걸까.

    하물며 그것이 내 몫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아빠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어요.”

    간절한 내 말에 폐하는 또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인 내 머리 위에 큰 손을 얹었다.

    “너는 제일 중요한 사람을 돌보지 않았어.”

    “예?”

    폐하 본인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설마 라이언일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두고서 폐하의 손은 어느새 꿀밤으로 변했다.

    “윽!”

    “네가 다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아.”

    머리를 한 대 맞아서 그런지 입에서 나도 모르게 돌 터지는 소리가 났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 때문에 나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암살자 때문이라고,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폐하는 아예 무릎까지 숙이고서 한참 작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아니 우리가 그렇게 못 미더운 어른이었던 건가?”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폐하를 믿지 못한다든가, 어른들을 믿을 수 없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폐하라면 충분히 할 수도 있는 생각이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폐하는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으셨으니까.

    “잘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심이구나.”

    뭐든 숨기고 혼자서 해결하려는 내 방식이 잘못된 거라고.

    폐하는 따끔한 질책과 함께 진짜 속내를 슬쩍 드러냈다.

    “내가 설마 그 녀석보다 못 미더운 어른일 줄이야.”

    “그 녀석이라니요?”

    어느새 울먹이는 내 눈가를 엄지로 슥, 닦아 주고서 폐하는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그라나다 소공작을 데려오거라.”

    “부르셨습니까, 폐하.”

    “라이언!”

    계속 밖에서 기다리던 라이언이 들어오기 무섭게 폐하는 앞에 있는 나를 꼭 껴안아 버렸다.

    “이번에는 우리 아이가 신세를 졌어, 그라나다 소공작.”

    그러자 애늙은이답게 라이언은 능숙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서 충성스러운 기사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황공한 말씀을. 그라나다는 폐하의 검.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제가 혼자였던 것도 아니고, 라이언이 있었잖아요.”

    뻔뻔하게 둘러대기 무섭게 폐하의 뺨 꼬집기 공격이 돌아왔다.

    “흐에에에.”

    “요 녀석, 이제는 폐하고 뭐고 없다 이거냐!”

    “에가 어에(제가 언제)!”

    설마 호감도가 떨어질까 싶어 잔뜩 긴장한 순간 폐하는 되레 나를 꼭 품에 껴안아 버렸다.

    “서운하단 말이다! 이래서 딸자식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고 하는 건지.”

    아무래도 폐하는 뭔가 오해한 것 같지만 나는 굳이 정정할 마음이 없다.

    다만.

    “폐하를 정말 아빠처럼 생각하니까 그런 거예요.”

    다 큰 어른도 가끔은 이렇게 응석을 부리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온몸으로 서운해하는 폐하를 이번에는 내 쪽에서 부둥부둥 안아 드렸다.

    “폐하는 제가 아니라도 보살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 폐하의 짐 덩어리가 되기보다는, 하나라도 고민을 덜어 드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꾸미지 않은 내 솔직한 마음을 모두 들은 폐하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너는 아직 어리단 말이다.”

    “어려도 한몫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왜 힘을 가지고 싶었느냐.”

    “언젠가 폐하처럼 강한 어른이 되어서 모두를 지키고 싶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이었다.

    “맨손으로 청둥오리를 때려잡고 바게트 빵을 철근같이 씹어먹으며 달리는 조랑말에서 뛰어내린 우리 폐하는……!”

    “흠, 흠, 녀석, 그만하거라.”

    폐하는 여전히 근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주 잠깐,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신의 아부에 로드리고 국왕의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로드리고 국왕의 호감도 : 83(▲3)/10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