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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25)화 (25/123)
  • 제25화

    “그거야 그렇긴 하다만.”

    한없이 이성적인 내 말에 아빠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누구든 제 남편 자리를 노린다는 점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나와 결혼하면 왕위가 굴러 들어온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왕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설마 그래서?”

    이 이상 말하지 않고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참의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아직 어린 네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요. 아빠가 이렇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전 정말 행복한 아이인걸요.”

    만약 아빠가 사냥 대회에서 죽었다면.

    그랬다면.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상복이었을 테니까.

    “아빠가 다치지 않아서 무엇보다 기뻐요.”

    “어쩐지 오늘은 아스타가 아빠보다 어른인 것 같구나.”

    솔직한 아빠의 말에 나는 방긋 웃었다.

    “그래서 왕궁에 들어가기로 한 거예요.”

    이건 절대로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기 위해 나는 아빠에게 다시금 강조했다.

    “아빠도 궁에서 해 주셔야 할 일이 많은걸요.”

    “아빠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물론이죠. 아빠는 공식적으로 제 도전을 반대하는 줄 알고 있을 테니까, 제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귀족들의 속내를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내가?”

    “응. 제게는 직접 못하는 얘기도 아빠한테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정확히는 전해지는 소문에 가까울 테지만. 이번에 느낀 거지만 아빠는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혹시 알아요? 아빠가 얻어 온 정보가 제게 큰 도움이 될지.”

    “호오…….”

    “여차하면 제가 아빠 핑계를 댈 수도 있는 거고요.”

    이건 정말 아빠가 있으니까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동시에 아빠가 있었다면, 하고 아쉬워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아빠 허리를 꼭 안고서 중얼거렸다.

    “아빠가 없으면 난 낙동강 오리알인걸.”

    “방금 뭐라고 한 거니?”

    “아니, 그러니까 고립무원. 외톨이가 된다는 거예요.”

    진심 어린 내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빠는 나를 꽉 안고서 진지하게 물어봤다.

    “그럼 설마 약혼도 그래서 한 거니?”

    “……아무래도 그렇죠?”

    “그러니까. 암살자를 잡으려고 일부러 사귀는 척을 하고 있다는 거지?”

    이번 기회에 아빠는 또 이상한 쪽으로 머리를 굴리시려나 본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다가 헤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괴로운 일이야.”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 괜찮아요.”

    남한테 뒷담 몇 마디 듣는 게 무서워서야 어찌 큰일을 할까.

    단호한 내 대답에 아빠는 한참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런 면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네?”

    “가끔은 깜짝 놀라곤 해. 아스타는 정말 엄마를 많이 닮았어.”

    “생긴 건 아빠랑 똑같잖아요.”

    “행동이나 말하는 거나, 아빠를 속상하게 하는 점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사랑하잖아요.”

    엄마도, 나도. 아빠를 휘말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테지만, 정작 아빠 본인은 딱히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럼.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

    “아빠를 지켜 주고 싶어요. 엄마도 분명 그러셨을 거 같아요.”

    엄마는 분명 아빠보다 연상이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구멍이 많은 아빠는 아무래도 내 보호자라기보단 내가 보호해야 할 사람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약속했단 말이에요!”

    협력의 조건이었다고 둘러댄 후에야 아빠는 겨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통금은 6시. 하루라도 늦으면 그 이후로는 절대로, 절대로 외출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럴게요. 대신 아빠도 방해하기 없기에요.”

    의젓하게 거래 조건을 맞춰 나가는 날 두고 아빠는 좀처럼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대체 언제 이만큼 자라 버린 걸까.”

    촉촉이 눈가를 적시고서 아빠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빠가 없이 혼자가 되기에는 너무 이른걸요.”

    “그럼. 아직 이르지. 아빠의 소중한 아기 별님은 아직 이렇게 어린데.”

    뺨에 쪽, 입을 맞추자 아빠는 그제야 애써 웃으며 나를 놓아주었다.

    “잘 자렴.”

    “안녕히 주무세요.”

    이야기의 순서대로 집은 떠나게 됐지만 슬프진 않다.

    아빠가 살아 계시니까.

    나는 문을 닫고 나온 후에도 한참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무언가가 변한 거구나.

    “흑, 흑…….”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나는 방문에 기대 주저앉은 채 숨을 죽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 * *

    잠에서 깨고 나니 머리맡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다.

    눈에 익은 이건 분명 아빠의 글씨다.

    [아스타 말을 듣고 밤새 고민하고 결론을 내렸어. 아빠도 한발 먼저 입궁해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단다.]

    혹시나 끝까지 안 된다고 하려나 싶었지만.

    [사랑하는 별빛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고 싶단다.]

    진심 어린 아빠의 말을 보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아빠…….”

    [아빠도 더는 피하지 않을 거란다.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그동안은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고 숨기기 바빴지만, 이젠 아닐 거라고.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쓴 글씨 안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다.

    [의젓하게 자란 널 엄마도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고마워요, 아빠.”

    어째서일까. 또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아가씨. 입궁 준비 모두 마쳤습니다!”

    내가 자는 사이 다들 짐을 챙겼다.

    마차에 짐을 실어 여러 대로 이어지는 행렬을 이끌고 왕궁으로 향했다. 궁 앞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위병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앞으로 아스타로테 님이 머무실 곳입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머물던 별궁에 발을 들이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오랜만이네.”

    앞으로 정말 오랜 시간 보내게 되는 곳이다.

    아빠를 살리고 난 후에도 흐름은 그대로인 모양이라서, 반가운 마음에 응접실에 올라가니 역시나 안에서 플로리아 언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아스타가 와서 정말 기뻐!”

    마치 오늘 같은 일이 있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언니는 활짝 웃으며 아름답게 꾸민 별궁을 보여 줬다.

    “네 방은 내가 직접 꾸며 봤어.”

    “와아…….”

    어마어마한 예술 수치를 아낌없이 발휘한 언니의 솜씨에 나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예뻐, 너무 좋아요.”

    “아직 기뻐하기에는 이른걸?”

    언니는 선물로 화려하게 만든 화관까지 머리에 씌워 주었다.

    “세상에, 진짜 예뻐. 언니가 직접 만든 거죠?”

    “마음에 들어?”

    어차피 내구도 때문에 오래 쓸 수는 없다지만, 고작 화관 따위에 매력 수치까지 올려 주는 옵션이 붙은 걸 보고 진심으로 경악했다.

    언니가 만약 작정하고 부여 아이템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그건 정말…….

    “겨우 이 정도로 뭘. 아스타는 내 하나뿐인 여동생인걸.”

    “빌헬름 오라버니가 서운해하실 거 같아요.”

    “억울하면 자기도 여자로 태어났어야지. 우리 아스타처럼 이렇게 귀엽게 말이야.”

    어릴 때부터 여동생이 가지고 싶었다고 노래를 불렀던 언니는 사촌인 날 친동생처럼 진심으로 아껴 줬다.

    “사냥 대회 우승도 정말 축하해. 응접실도 같은 느낌으로 꾸며 놨어.”

    그 말을 하고서 언니는 이리 오라며 나를 불러 귓가에 속삭였다.

    ‘소공작도 초대해서 데이트도 해. 다른 곳에서는 대공께서 뭐라고 하실 테니 말이야.’

    “고마워요, 언니.”

    “내가 더 고맙지.”

    언니의 방금 대답은 다분히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언니도 라이언과의 약혼이 달갑지 않았을 테니 그게 첫 번째 이유라지만, 두 번째. 왕위 계승권과 관련해서는 언니도 빌헬름 오라버니도 은근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나 언니의 경우에는 더한 게.

    애초에 정치랑은 거리가 멀고 굳이 따지자면 엔터테인먼트나 예술 쪽이 훨씬 잘 맞다.

    글보단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는 걸 더 잘하고, 화려한 성품답게 꾸미는 건 잘하지만 내실은 없는.

    까놓고 말해 국왕하고는 정말로 안 어울리는 성격인데, 내가 있으면 언니에게도 좋은 핑계가 되어 줄 수 있다.

    “언니가 내 편이 되어 줘서 나도 행복해요.”

    “어쩜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진심으로 날 귀여워하는 언니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던 찰나 위병 하나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그라나다 소공작께서 오셨습니다.”

    “라이언!”

    반갑게 일어나는 나를 가운데에 두고 라이언과 플로리아 언니는 묘한 시선을 공유했다.

    “플로리아 공주께 인사 올립니다.”

    “동생을 잘 부탁해요, 소공작.”

    서로에게 호감 같은 건 전혀 없다지만, 궁 내에서는 이미 언니와 라이언의 혼담이 몇 번이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졌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여전히 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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