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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9)화 (19/123)
  • 제19화

    마음 같아서는 함께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국왕이라는 자리가 너무 무겁다.

    그래서 한 제안이겠지만, 디오니스 경이라.

    역시 폐하는 센스가 좋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며 나는 폐하의 귀에만 들리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큰아빠.”

    이럴 때가 아니면 쓰지 않을 호칭이다.

    난데없는 기습 공격에 폐하는 폭소를 터트리며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요 녀석이.”

    “헤헤.”

    허물없는 호칭은, 남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말이 있을 때만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눈치 빠른 폐하는 금세 내 마음을 읽어 주었다.

    ‘아빠를 잘 지켜봐 주세요.’

    어리광을 피우는 척하면서 나는 폐하의 귀에 살며시 속삭였다.

    “네 아빠가 붙어 있으면, 아무래도 계속 훼방을 놓겠지.”

    폐하는 내가 라이언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완전히 오해한 모양이지만.

    몽펠리에의 위협에서 아빠를 구할 수 있는 건 폐하뿐이다.

    “그래도 역시 좀 서운하구나.”

    “큰아빠도 참.”

    “암. 큰아빠도 아빠지.”

    아무래도 폐하는 큰아빠라는 호칭이 정말로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사랑스러운 내 별빛. 아빠가 비록 검술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말은 제법 잘 탄단다!”

    어느 틈에 아빠가 말을 탄 날 보러 또 달려왔다.

    폐하는 그런 아빠의 어깨를 짚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다시 한번 말해 보렴, 아우야.”

    “형님!”

    “잔말 말고 너는 날 따라오거라.”

    반짝반짝 빛나는 국왕의 가호 덕분에 아빠는 어쩔 수 없이 폐하의 손에 끌려갔다.

    다시 플로리아 언니 옆에 앉은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할슈타인 대공을 노리는 게 몽펠리에 후작이었어?”

    “응?”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만 보고서 이 애는 벌써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모양이다.

    어차피 한 팀인데 굳이 속일 이유가 뭐 있을까.

    나는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놨다.

    “아빠가 없어지면, 내게 영향력을 펼치기 더 수월해질 테니까. 나쁜 짓을 꾸미고도 남을 위인이잖아.”

    “……나쁜 짓이라.”

    “이 숲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대놓고 아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하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거다.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한 거고.”

    “도와주면 뭘 해 줄 거야?”

    “어?”

    예상치 못한 라이언의 말에 나는 진짜로 놀라 버렸다.

    세상에 공짜가 없긴 한데. 설마 여기서 이렇게 나올 줄이야.

    뭐라고 대답하지?

    “나, 돈 없는데?”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대놓고 정색하는 걸 보니 뭔가 물질적인 걸 달라는 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그게, 그러니까…….”

    “가능하면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게 좋아.”

    “풉!”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어째서인지 라이언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공녀.”

    “갑자기 웬 존댓말이야?”

    “네가 헛다리만 짚으니까 그러지.”

    “그러는 너야말로 바라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해. 뽀뽀라도 해 줘?”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라이언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내가 좀 심했나?

    “농담. 농담이야.”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 라이언의 머리 위로 향했다.

    이쯤 되면 수치가 뜰 법도 한데, 이 애는 정말로 내게 흥미가 없는 걸까. 아니면 공략 불가 캐릭터라서 끝까지 이렇게 되는 걸까.

    속 모를 얼굴을 하고서 라이언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고민이 있어서 그랬어.”

    “고민?”

    어쩔 줄 모르고 입만 뻐끔대던 라이언은 그제야 겨우 표정을 수습했다.

    “집에서 가져온 만년필 잉크가 다 떨어져서.”

    “우리 집에 많은데. 몇 병 가져다줄까?”

    “아니, 그게 아니라…….”

    빙글빙글 돌리고 돌린 후에야 라이언 소년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직접 사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같이 쇼핑하고 싶다는 거지?”

    스무고개를 하듯이 이제야 겨우 원하는 답을 찾은 모양이다.

    라이언은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해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어른 같던 이 애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점이 조금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게 뭐 어렵다고. 바라는 대가가 너무 소소해서 나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아빠한테는 데이트라고 하면 되겠다.”

    까르륵 웃는 나와 달리 라이언은 유독 어쩔 줄 모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랑 데이트하는 거, 괜찮아?”

    “싫을 이유가 있어?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수도에는 맛있는 가게도 많거든.”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마을에 외출도 하고, 신분을 숨기고서 디저트 가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매번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긴 했지만 그래도 외출했을 때의 기억은 제법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았다.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부하들이랑 같이 가면 될 텐데.”

    “나나 내 부하들은 수도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하긴, 그건 그렇네.”

    “정말로 같이 가 줄 거야?”

    다시금 내 손을 꼭 잡고서 라이언은 확답을 원했다.

    “그게 뭐 어렵다고. 데이트 정도는 매일매일 해 줄 수도 있어.”

    “정말?”

    앗, 이건 좀 심했나?

    “농담이고, 사흘에 한 번?”

    너무 자주 만나면 아빠가 훼방을 놓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 무섭게 라이언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사흘이라고?”

    “으, 으응…….”

    얼버무리려는 나를 두고 라이언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혼담이 확정되지 않아서, 나는 지금 본의 아니게 수도에 머무르고 있어.”

    “그거야 그렇지?”

    라이언은 괜히 말의 콧잔등을 만지며 토라진 티를 제대로 냈다.

    “그냥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입술이 어느새 댓 발로 튀어나온 모습을 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틀에 한 번! 까지는 뭐. 노력해 볼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게 내 최선이다.

    노력해 보겠다는 말을 덧붙였음에도 라이언의 눈빛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같이 계속 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 좀 더 혼약자처럼 보일 테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고도의 계산에 따른 정치적 행위긴 하지만.

    끄덕끄덕.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라이언은 평소와 달리 무척 앳된 미소를 머금고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슬슬 출발해 볼까?”

    “응!”

    “잠깐만, 그전에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알려 줘야지!”

    얼떨결에 데이트 약속은 물론 이틀에 한 번씩 만나자는 얘기까지 나왔는데.

    정작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일단 말에 타고 얘기하자.”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법 높은 말 등에 오를 수 있도록 시종들이 발판을 가지고 달려왔다.

    하지만 라이언은 능숙하게 등자를 밟고서 자기 힘으로 말에 올랐다.

    “여기 내 손 잡아.”

    “하오나, 저희가 발판을…….”

    “괜찮겠어?”

    “나를 믿어 줘.”

    할 수 있다고. 내뻗은 라이언의 손을 잡고서 나는 그대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어, 신기해. 몸이 위로 막…… 이, 이게 뭐야!”

    “접니다.”

    손에 힘을 싣고 말에 타 보려는데 갑자기 몸이 휙 하고 들려 그대로 라이언의 등 뒤 자그마한 안장 위에 얹혔다.

    “디오니스 경!”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 옆에 선 큰 키의 디오니스 경의 손을 잡고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린이용 안장을 둘 붙이긴 했는데, 둘 다 체구가 비슷한 상태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라이언의 등에 매달리는 형국이 됐다.

    만약 내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폐하의 말에 탈 걸 그랬나?’

    나야 괜찮다지만 라이언이 힘들 것 같다.

    슬쩍 눈치를 보는데 역시나 디오니스 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 말로 모시겠습니다.”

    아무래도 폐하는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디오니스 경을 붙인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폐하가 달려와 주실 테니까. 어떻게든 [국왕의 가호]가 닿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아스타가 말에 오르는 걸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 이상의 도움은 거절하지, 디오니스 경.”

    “엣, 어째서!”

    “내 어깨를 꽉 잡아.”

    천천히 속도를 내자 꿀렁꿀렁하며 몸이 흔들렸다.

    나는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최대한 라이언의 가까이에 붙어 앉았다.

    “호, 호, 혹시 힘들면 말해. 디오니스 경의 말로 옮겨 탈게.”

    “……날 못 믿겠어?”

    “믿어, 믿는데, 믿기는 믿는데…….”

    발이 허공 위에 떠올라 있는 것 자체에 그리 익숙하지가 않을 뿐.

    그나마 다행인 건 라이언이 말 타는 데 무척 능숙하다는 것 정도.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내가 버거울 법도 하건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로 잘 탈 줄은 미처 몰랐다.

    “안 힘들어?”

    “정말로 무서우면 차라리 내 허리를 꼭 껴안도록 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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