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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7)화 (17/123)

제17화

“아이라고?”

“우리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영지는 그들에게 맡겨 둘 참이야.”

“아니, 그러니까. 너랑 나랑?”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진짜 그 의미가 맞는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내 물음에 라이언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결혼한 부부가 자식을 두는 게 뭐가 어때서. 너도 그렇게 태어난 거잖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한 살짜리 어린이의 입에서 자식 얘기라니.

‘우리 폐하, 어마어마하게 놀라셨겠네.’

물리적 강함은 폐하를 능가할 사람이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까.

“덕분에 폐하에게 제대로 혼이 났지.”

“뭐라고?”

라이언은 손목에 맨 붕대를 보여 줬다.

“폐하와도 대련한 거야?”

“널 정말로 아끼시는 모양이야.”

이제 겨우 목검을 만지는 나와 달리 라이언은 디오니스와의 대련에서 진짜 검을 썼었다.

“살아 있는 거 맞지?”

“……어떻게든 버텼어. 폐하는 정말 강한 분이시니까.”

담담하게 말을 하지만 진짜 몸 여기저기에 상처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안 아파?”

“이런 건 이미 익숙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어린 나이에 어른들과 대등하게 대결한다는 건 어지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단하네, 검술은 언제 배웠어?”

“아주 오래전에.”

“뭐야, 그게?”

고작해야 열한 살 주제에 이 애는 정말 매번 세상 다 산 어른 같은 소리를 했다.

하물며 이토록 진지한 라이언을 보며 폐하는 분명…….

“폐하, 웃으셨지?”

“너무 웃으셔서 민망했어.”

“당연하지.”

애초에 폐하는 이 약혼을 진짜 결혼까지 이어 나갈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귀족들을 장악한 몽펠리에가 북부의 수장, 그라나다 가문까지 집어삼키는 걸 막으려는 임시 조치일 뿐.

“……그리고는 또다시 플로리아 왕녀와의 약혼을 권하셨고.”

“설마 언니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단 얘기를 한 건 아니지?”

국왕의 적통 왕녀인 플로리아 언니의 결혼 상대는 최소한 공작 이상.

아니면 타국의 국왕 정도는 되어야 한다며 대신들의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참 신분이 떨어지는 카이와의 열애설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런 말은 안 했어.”

“다행이다.”

노골적으로 안심하는 내 태도를 보며 라이언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대신 내가 아스타를 좋아한다고 했어.”

“응?”

난데없는 고백에 놀란 나는 금세 라이언의 의도를 파악했다.

“하긴, 한 번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굳건하다고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

“……뭐, 그렇다고 해 둘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깜짝 놀랐잖아.”

보면 볼수록 느끼는 거지만 이 애는 어쩌면 나만큼이나 어린이답지 않다.

까르륵 웃는 나를 힐끔 바라보고서 라이언이 물었다.

“할슈타인 대공께서는 뭐라고 하셔?”

“……아빠한테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만약 미리 말을 해 버리면 아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만약 그러다가 몽펠리에와 손이라도 잡게 된다면…….

그것만은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다.

“기절할지도 몰라. 우리 아빠는 진짜로 날 사랑하시거든.”

“……그건 충분히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건 그렇고, 사냥 대회 얘기를 하자.”

“아, 맞아. 디오니스 경이 미션을 줬어.”

대놓고 퀘스트라고 하기는 좀 그러니까 나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사냥감을 셋 잡아 오라는 거구나. 그래도 지금 네 실력이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야 그렇긴 한데. 다만 문제가 있어.”

앞에 놓인 배치표를 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바로 이날 아빠가 죽었다.

그리고 내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생겼다.

아빠를 지켜야 하는 것, 그리고 퀘스트도 통과해야 하는 것.

“누군가가 우리 아빠를 죽이려고 해.”

이런 말을 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수도 있지만, 라이언에게만은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사냥 대회라면 그럴 법도 해.”

“너도 그렇게 생각해?”

“무기가 오가는 데다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기도 좋으니까. 할슈타인 대공뿐만 아니라 우리도 조심해야 해.”

“그렇지. 네 말이 맞아.”

다행이다. 내 말이 이상한 취급을 받지 않아서. 나는 다시 좌석표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아빠를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하지?”

“이거대로라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정말?”

“다만 대공을 설득하는 건 어디까지나 네 몫이야.”

어쩐지 쉽지 않을 거란 밑밥을 깔면서 라이언은 내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귀여운 딸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시는 분이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게?”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 나는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냥 대회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아직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난 나는 곧장 발소리를 죽이고서 아빠 침실로 향했다.

“어머,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다들 쉿!”

“쉿!”

손가락을 입 앞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자 다들 비밀을 지켜 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심스레 소리를 죽이고 문을 열자 역시나 아빠는 혼자 잠자고 있었다.

살금살금 침대 위에 올라가 데구르르 파고들자 뒤척이던 아빠의 팔이 자연스레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별님,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걸까?”

“아빠.”

얼굴 부비부비하며 파고들자 아빠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날 꼭 안아 줬다.

만약 오늘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땐 정말 아빠와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

“사냥 대회를 앞두고 많이 떨리는 모양이지?”

“그런 것 같아요.”

진짜 떨리는 이유는 그게 아니지만. 나는 아빠 품에 안긴 채 오랜만에 응석을 부려 보기로 했다.

“잘할 수 있을지 겁이 나요.”

“그동안 열심히 해 왔잖니. 아빠는 언제나 그런 아스타를 응원한단다.”

“그것도 있고요.”

나는 라이언과 준비해 온 작전 실행하기로 했다.

“실은 조금 걱정되는 게 있어서요.”

“걱정되는 거?”

“플로리아 언니가 아무래도 제게 속이 상한 것 같아서요.”

언니한테는 정말로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아빠를 거기에 잡아 둘 방법은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플로리아가?”

“오늘은 라이언도 오는데, 원래 라이언은 플로리아 언니랑 혼담이 오가던 사이였으니까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

언니야 손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을 테지만, 애초에 화가 나도 티를 안 내는 성격이라는 건 아빠도 알고 있다.

그래서 언니로 골랐다.

“언니가 제게 화가 난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빠가 저 대신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그냥 플로리아 언니가 있는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하면 아빠가 절대 말 들을 리 없다. 하지만 이 방법은 다르다.

“아스타가 웬일로 아빠에게 부탁을 다 하다니. 이거 기쁜걸?”

내 부탁에 아빠는 활짝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 줬다.

“아빠 말고는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없는걸요.”

“그럼. 아빠가 최고지.”

만약 오늘 아빠가 죽게 된다면 아스타로테는 꼼짝없이 고아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만은 싫다.

“아빠랑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럼, 물론 그래야지.”

* * *

사랑하는 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아빠는 사냥 대회장에 도착하자마자 폐하를 찾았다.

“오늘은 관중석에 앉을까 합니다.”

“호오, 그러려무나.”

안 그래도 사냥에 소질이 없는 아빠를 알기에 폐하는 흔쾌히 허락해 줬다.

그리고 궁중 서열에 따라 아빠의 자리는 곧 왕비님과 플로리아 언니 사이에 마련되었다.

“어머나, 할슈타인 대공께서 저기에…….”

“와. 저렇게 보니 정말 위화감이 없다고 해야 할지.”

두 여자 사이에 혼자 남자가 앉아 있는데도 꿀리지 않는 미모가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리고 갑자기 거기에 앉은 아빠를 보고서 몽펠리에 후작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대공께서 어쩌다가 저기에 앉아 계신 겁니까?”

“아침에 침대에서 내려오다 그만 발목을 다쳤습니다. 대신 제 몫까지 우리 아스타가 나서 줄 겁니다.”

“공녀가요?”

반신반의, 아니 대놓고 그게 말이 되냐는 몽펠리에를 두고 아빠는 당당히 말했다.

“그럼요. 그걸 위해 1년이나 열심히 공들인 것을요.”

그런 아빠의 믿음에 힘입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괜히 여유를 부렸다.

“아빠, 다녀올게요!”

열심히 손을 흔들고서 출발하려던 나는 디오니스 경에게 불려 갔다.

본격적인 사냥 대회 참여에 앞서 그는 몇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항에 대해 알려 줬다.

“큰 동물을 마주했을 때는 시선을 피한 채 뒤로 물러나십시오.”

“시선을 피해요?”

“눈이 마주치면 먹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살벌한 조언에 나도 모르게 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점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미천한 신분이지만, 제가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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