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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6)화 (6/123)
  • 제6화

    잠시 시간을 거슬러서.

    아스타로테가 막 태어나고 얼마 후까지만 해도 전쟁 영웅인 왕의 권력은 귀족들을 통솔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사병을 돌려받은 귀족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키워 나갔다.

    귀족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왕의 명을 받들고 충성하는 파와 귀족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파.

    귀족파의 수장이 몽펠리에 후작이라면, 왕당파의 수장은 북부에 있는 개국공신 그라나다 공작 가문이 대대로 맡아 왔다.

    ‘설마 이 애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그동안 줄곧 어른이 된 후에나 만났으니 그라나다 공작을 이 나이에 만나는 건 처음이다.

    “할슈타인의 별빛께 인사 올립니다.”

    한쪽 무릎까지 꿇는 정중한 인사를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왕실이 점점 쇠약해지고 권력을 잡은 몽펠리에 후작이 그나마 눈치를 봐야 하는 존재.

    위태로운 아스타로테의 지위를 매번 지켜 준 건 왕가의 충성스러운 수호자였던 그라나다 공작의 존재 덕분이었다.

    물론 멀리 있어서 매번 도와주러 올 수는 없었던 게 큰 흠이었지만.

    “……일어나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앞을 지키듯 끼어들어 몽펠리에 후작과 마주 보고 섰다.

    주인을 지키려고 선 충견처럼.

    대를 이어 왕가에 충성한 지도 벌써 30대째, 차기 그라나다 공작이 될 어린 소년은 말 그대로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아직은 꼬맹이지만.’

    분명 어른이 되고 나서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커다란 체구의 소유자였던 것 같은데.

    그 역시도 지금은 고작 열 살의 꼬맹이다.

    “폐하께서 공을 찾고 계시더군요.”

    “그렇다면 저는 이만 실례해야겠군요.”

    소공작의 말에 몽펠리에 후작은 순순히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며 그는 굳이 한마디를 덧댔다.

    “아스타로테 님. 아까 전의 약속을 부디 잊지 마시길.”

    끝없이 음흉한 눈빛을 보내며 몽펠리에 후작은 내게 확답을 원했다.

    끄덕, 하자 몽펠리에 후작은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재수 없는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질 때쯤 소공작이 먼저 물었다.

    “저자와 무슨 약속을 나누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상황을 얼버무리려다 그만 너무 대놓고 정색해 버렸다.

    “그, 그게. 나랑 동갑이라고 들어서, 초면인데 참 반갑기도 하고. 말 놔도 되지?”

    어떻게든 별일 아닌 양 넘어가려고 얼버무렸다. 다행히 그라나다 소공작은 정색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감히 어떻게 아스타로테 님께 말을 놓겠습니까.”

    ……부담스럽게 왜 이러니. 나야 어른이니 그렇다 쳐도 이 애는 열 살치고는 말투가 너무 애늙은이 같다.

    “몽펠리에 후작은 신뢰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거야 그렇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네가 관여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한없이 진지한, 게다가 어른처럼 말하는 열 살짜리 아이를 앞에 두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방긋 웃었다.

    “그래도 귀족파의 우두머리니까. 왕가의 일원으로서 예를 차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 세상에 당신보다 귀한 분은 안 계십니다.”

    얘가 왜 이래. 왕족에게 충성을 다하는 건 알겠는데, 그런 것 치고는 아부가 좀 심한 것 같다.

    “폐하께서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살짝 스커트 끝을 들고서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머금었다.

    “소공작은 참 재밌는 사람이네.”

    겉모습만은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리따운 아스타로테의 몸에 들어와 있으니까.

    이렇게 하면 혹시나 호감도가 뜰까 싶어 테스트해 봤지만 역시나 소년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아쉽게 됐네.’

    아무래도 공략 불가 캐릭터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굳이 길게 상대해 줄 시간이 없다.

    “그럼 이만 실례하죠. 평안한 하루 되시길.”

    솔직히 좀 아쉽긴 하다. 저 애가 공략 대상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설마 아예 논외일 줄이야.

    “다음에 볼 때는 말 편하게 놔도 괜찮아!”

    그래도 친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갑작스러운 내 탈출 계획에 시녀는 걱정에 휩싸였다.

    “정말로 가실 거예요?”

    “그럼. 물론이지.”

    “들키면 전 정말 잘릴지도 몰라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시녀를 달래고서 나는 당당히 아빠에게 갔다.

    “아빠, 저 잠시 쉬다 올게요.”

    “휴게실에 있을 거니?”

    “아뇨. 사람 없는 곳에서 잠깐 산책을 하려고요.”

    “거긴 좀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혼자 가는 것도 아닌걸요.”

    시녀들이 뒤따른다는 걸 확인하고서도 아빠는 내심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거기에 예쁜 꽃 많긴 하지. 물론 우리 별님보다 예쁜 꽃은 없겠지만.”

    “아빠도 참!”

    “잘 다녀오렴.”

    그래도 다행히 내 설명은 잘 먹혀들었다.

    물론 선뜻 허락한 아빠를 보며 시녀 미나는 더욱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아가씨, 저 무서워요. 이 사실을 아시면 대공 전하께서 분명 혼쭐을 내실 거예요.”

    “……에이, 설마. 우리 아빠가 그럴 리가 없잖아?”

    “제가 걱정하는 건 후작님 쪽이에요!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아가씨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회귀를 거치는 동안 내 옆에 있으며, 미나 역시도 몽펠리에에게 온갖 괴로운 일을 겪어야 했다.

    그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걸까?

    미나의 걱정과 달리 지금은 [국왕의 가호]가 발동되어 있으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설마, 자기 아들을 보내겠다 해 놓고 날 해쳐 봐야 얻는 게 없잖아.”

    “그런 걸까요?”

    “몽펠리에가 그렇게까지 멍청할 리가 없지. 아까 내가 그라나다 소공작을 만난 건 자기도 알 텐데. 그 애에게 들킬 일을 저지르진 않을 것 같은데?”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핑계를 들먹인 후에야 미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서 얌전히 내 뒤를 따랐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독 어두운 데다 불빛도 없네요.”

    그나마 저 멀리 보이는 별빛에 의지해 우리는 세드릭이 기다리고 있을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저기 있다.’

    어둠 속에서도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가 보인다. 그 아래에는 아직 어린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파이팅!”

    귀여운 미나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갔다.

    세드릭 몽펠리에를 드디어 만나는구나. 어느덧 인기척을 느낀 소년이 내 쪽을 보려고 했다.

    “잠시만, 거기에 그대로 멈춰서 들어줘요.”

    내 말에 소년은 그대로 멈춰 섰다.

    만약 그 애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괜히 또 마음이 흔들릴 테니까.

    나는 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며 손부터 내저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할게요.”

    심각한 상황에 혀라도 꼬이면 곤란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미리 준비했던 말들을 하나씩 읊어 나갔다.

    “저는 폐하의 후계자 시험에 도전해 보려고 해요.”

    “…….”

    세드릭은 귀가 얇다. 그러니 어떻게든 다다다 몰아붙이면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는 편이다.

    “쉽지 않은 길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걸 알기에 제게는 곁에서 줄곧 힘이 되어 줄 반려자가 필요하답니다.”

    호방한 성격 탓에 귀족들과 조금은 불편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로드리고 국왕 폐하를 지탱해 주는 것이, 귀족 부인들을 필두로 사교 모임을 주선하며 왕실의 품위를 몸소 실천하던 로제타 왕비님인 것처럼.

    “당신이라면, 귀족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힘이 되어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내게 청혼하는 거야?”

    갑자기 웬 반말이지, 싶지만 차라리 서로 터놓고 말하면 얘기가 빨라진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으니 나도 편하게 말을 놔 버렸다.

    “응, 말 그대로 내 계획이 성공하게 된다면, 내 남편 될 사람에게도 충분한 명예가 주어지게 될 거야.”

    나는 그가 가장 솔깃할 만한 보상부터 내밀었다.

    내가 국왕이 되면 남편은 국서, 아무것도 없는 세드릭에게도 일단은 공작이라는 호칭이 붙게 될 테니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둘째에게는 제법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다.

    “그건 마치 내가 데릴사위가 되라는 말로 들리는데?”

    “아빠랑 상의할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기꺼이 기다려 줄 수 있어.”

    계산이 빠른 몽펠리에 후작도 이 정도라면 바로 내치기 힘든 조건이다.

    물론 그렇게 들뜨게 한 후에, 진짜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해 버리는 것으로 내 복수는 완성될 테지만.

    솔직히 말해 내 계산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혼은 평생 함께할 상대를 결정할 문제인걸. 아버님께 상의를 드리지 않아도 나 혼자 충분히 결정할 수 있어.”

    “그래?”

    앳된 목소리치고는 단호하고 어딘지 모르게 애늙은이 같은 말투가 귀에 익은 건 기분 탓일까.

    나중에 말을 바꾸면 곤란하니 나는 다시금 확인차 물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만약 나와 결혼한다면 네 아빠의 뜻과 관계없이 백 퍼센트, 내 편이 되어 줘야 해!”

    “네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는 것이 내 숙명이겠지.”

    “……어?”

    아무래도 뭔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파파보이인 세드릭이 제 아버지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저렇게 단언하는 게 요상할 따름이다.

    “그래, 좋아. 기꺼이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그 순간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달빛이 정원을 비췄다.

    환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건 뜻밖에도 세드릭이 아닌 그라나다 소공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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