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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1)화 (1/123)
  • 제1화

    아스타로테 할슈타인은 불과 열여섯 살의 나이에 세상을 손에 거머쥐었다.

    꿈에서도 원해 본 적 없던 왕관을 앞에 두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손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대신들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박복한 제 운명을 곱씹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할슈타인 대공의 갑작스런 죽음을 시작으로 왕족들은 하나씩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어느새 왕실의 핏줄이라고는 오직 하나, 아스타로테만이 남았다.

    오랜 논의 끝에 귀족들은 분쟁 대신 어린 소녀의 어깨에 짐을 지우는 길을 택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음 왕위에 오를 이를 선택해 주십시오.]

    온 세상 남자들이 왕위를 얻기 위해 그녀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수많은 남자 중 차기 국왕감을 골라 결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스타로테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 * *

    10년 전 출시된 풀보이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그대에게 왕관을>.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박복한 여주인공 아스타로테가 되어 다섯 명의 남자 캐릭터 중 하나와 호감도를 쌓고 결혼하는 게 목표다.

    “얘 진짜 잘생겼어.”

    그중에서도 내가 이 게임을 사려고 마음먹은 부분이 있었다. 다름 아닌 게임 커버에 그려진 화사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운 소년, 세드릭 때문이었다.

    첫 입고 당시부터 한동안 난리인데 패키지만 판매하다 보니 새벽까지 줄을 서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난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후 금방 단종되어 버려서 10년이 지난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환상의 게임이 되어 버렸다.

    “나도 꼭 해 보고 싶었는데.”

    오랜만에 갑자기 생각이 나니 괜히 또 아쉬워졌다. 그렇게 길을 걷던 중 귤 하나가 또르르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아이고, 이것 참!”

    아스팔트 도로 위로 찢어진 비닐 봉투에서 떨어진 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들 폰만 보며 걷는 사이 당황하는 할아버지를 본 나는 제일 먼저 달려가 귤을 줍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아이고. 이걸 어째. 우리 할망구가 어서 사 오라고 했는데.”

    “이거 쓰세요.”

    폰과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에코 백을 내밀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고마워, 학생. 저기, 저기 가게까지만 가서 금방 돌려줄게.”

    이제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 폐업 직전이 된 오래된 서점은 연세 많은 부부가 운영하시는 곳이었다.

    귤을 산 할아버지가 이 서점의 주인이셨다.

    나도 어릴 때는 제법 자주 놀러 왔었던 것 같은데. 책은 물론 게임 같은 것도 함께 팔았지만, 요즘은 찾는 사람이 뜸해진 흔적이 역력하다.

    “진짜 오랜만에 와 봐요.”

    “다들 인터넷으로 시킨다고 하니까. 우리도 다음 주에 가게 접기로 했어.”

    “정말요?”

    “답례라고 하긴 뭣하지만,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져가도록 해.”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할아버지는 내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셨다.

    대단히 한 건 없지만 그래도 주신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매대에 남은 게임 CD를 둘러봤다.

    “어?”

    그곳에서 나는 그만 마주하고 말았다. 이제는 구할 수도 없다는 환상의 게임을 앞에 두고 나는 떨리는 손을 내뻗었다.

    “할아버지, 이, 이, 이거!”

    이게 대체 무슨 횡재일까. 할아버지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애써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져가. 이제 우리한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니까.”

    “이거 엄청 비싼 거예요. 단종이라 인터넷에서는 백만 원 넘게 받을 수 있어요!”

    “잘 됐구먼. 학생이 가져가. 어차피 오늘내일하는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할 줄을 몰라서라도 못 할 일인 것을.”

    “할아버지.”

    그 말을 하고서 할아버지는 먼지 묻은 귤을 깨끗하게 닦아 내게 내밀었다. 내가 귤을 받아 들자 할아버지는 기특하다는 듯 그런 내 손을 꼭 잡았다.

    “너는 참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구나.”

    “제가요? 아닌데, 저 진짜 이기적이고 못됐어요.”

    “못됐으면 애초에 이 늙은이를 도와주러 여기까지 와 줄 리가 없지. 그 게임은 네가 가져가렴.”

    생각지 못한 선물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임을 주며 할아버지는 싱긋 웃었다.

    “행운을 빈단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게임 패키지를 꼭 끌어안은 채 집으로 걸어왔다.

    뜯지도 않은 게임 CD를 보며 호흡부터 골랐다.

    “잘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집에 오자마자 나는 곧장 게임을 시작했다.

    * * *

    황궁 후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던 아카시아 아래에서 한 남자를 만난 순간 아스타로테는 이 만남이 운명임을 깨닫는다.

    [저는 몽펠리에 후작의 둘째 아들, 세드릭이라고 합니다.]

    어두운 달빛 아래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년.

    흩날리는 꽃잎 아래 만났던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래, 바로 이거야!”

    사흘째 밥도 안 먹고 게임만 플레이한 덕분에 드디어 나는 세드릭 엔딩 직전까지 도착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좋아요.

    ▷제겐 다른 사람이 있어요.

    ▷잠시 시간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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