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84)화 (384/385)
  • 384화. 떠나지 못하다

    ‘뭐야, 또 나를 놀린 거였잖아!’ 

    유신지는 화가 나서 눈을 흘겼다.

    유 노태사는 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 할애비는 몇 년 동안 외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참혹한 일들을 많이 봤단다. 농부가 땅을 잃어 유랑민이 되고, 장사꾼이 세금을 내지 못해 사업이 거덜나고, 집안이 망하고, 자식과 부인을 파는 비극들이 있었지. 

    이 몇 년 동안 각지의 반군이 얼마나 많아졌느냐? 대순은 오래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선황께서 살아 계셨을 때까지는 그래도 수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도 없어졌으니 분명 다시 전복시키려는 세력이 나타날 게야.”

    이건 너무 무서운 말이라 유신지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남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이런 말씀을 하세요?”

    유 노태사가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오히려 노인네보다 담이 작구나.”

    유신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다행히 유 노태사는 더는 말을 얹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튼, 네가 잘 알아서 해라. 자고로 백성은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 했으니 두 패륜아가 집안 재산을 두고 다투는 일 따위에 네가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 백성들의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유신지는 마음이 복잡해서 한참 후에 대답했다.

    “예.”

    * * *

    루안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여강이었다. 

    두 사람은 과자가게에서 만났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여강이 물었다. 

    “강왕은 자네가 일부러 놓아준 건가?”

    루안이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아닙니다.”

    루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덧붙였다. 

    “하지만 강왕세자는 제가 놓아주었습니다.”

    여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럼 됐네.”

    루안이 웃었다. 

    “만약 제가 강왕을 놓아주었다고 하면 사형께서는 저와 등을 돌리실 생각이셨습니까?”

    여강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네. 내가 강왕과 싸우는 자네를 도운 이유는 그가 조정을 어지럽혔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네가 고의로 그를 놓아주고 천하에 대란을 일으키려 했다면 우리 형제의 인연도 거기서 끝인 게지.”

    루안 역시 정색하며 대답했다. 

    “사형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여강이 조금 웃더니 차를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이제 자네가 해야 하네.”

    루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강이 말했다. 

    “자네가 일부러 한 짓이 아니라면 그건 하늘의 뜻이겠지. 황실의 혈통이 끊어졌으니 소인배들이 조정에 화를 불러올 걸세. 도를 잃은 자는 온 천하가 함께 벌할 것이고 덕이 있는 자에게 천명이 거하게 되겠지. 이 나라에서 이런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네. 자네 북양은 평안하고 군대도 강력한데 어찌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단 말인가?”

    “…….”

    루안은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여강이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잘 가시게. 다음에 여기서 자네를 만날 때는 천하가 태평했으면 좋겠구먼.”

    * * *

    며칠 후 깊은 밤, 루안은 대장공주의 도움으로 은밀하게 궁으로 들어갔다.

    일이 없는 사람들을 일찍 돌려보내서 청녕궁은 고요했다. 

    “폐하는요?”

    루안이 물었다. 

    “조금 있으면 올 게야.”

    태후는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비록 당시의 그 일이 현 황제와는 무관하다지만, 결론적으로 그 일로 인해 이득을 본 것 역시 그였다.

    “올케.”

    대장공주가 애처롭게 그녀를 안았다. 

    “슬퍼하지 말아요, 내가 있잖아요!”

    태후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봉접!”

    잠시 후, 소희가 와서 소식을 알렸다.

    “왔습니다. 왔습니다!”

    뒤이어 건장한 내관 몇 명이 가마를 들고 청녕궁으로 들어왔다.

    루안이 앞으로 나가 살펴보았다. 

    황제는 잘 정돈된 모습이었지만 아직도 혼수상태였다. 

    황후가 낙담하며 말했다. 

    “해독된 후 폐하께서 깨어나셨었네. 하지만 출혈이 너무 심하여 원기가 크게 상했기 때문인지 대부분 혼수상태에 빠져 계신다네.”

    사실 그녀는 황제가 살아있기만 한다면 자신은 계속 황후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녀가 바랐던 황후로서의 삶을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강왕은 궁에 화근을 묻어두었고 평왕은 계략에 능했으니 만약 황제가 남아 있게 되면 그는 죽을 것이 뻔했다.

    황후는 그와 4년 동안 부부로 지냈고, 그래도 마지막에 그의 목숨을 지켰으니 부부로서의 도리는 다 한 셈이었다.

    루안이 가마의 발을 걷어 수행 궁녀의 얼굴을 보더니 어리둥절해했다. 

    “류 첩여?”

    안에서 고개를 든 사람은 바로 류명주였다. 그녀는 온화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뜻을 받들어 폐하를 모시고 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류 첩여는 없습니다.”

    루안은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빨리 가자.”

    태후가 재촉하며 말했다. 

    “궁에는 사람이 많고 보는 눈도 많으니 오래 지체하면 소문이 새어 나갈 게야.”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장공주와 함께 밤을 틈타 궁을 빠져나갔다.

    * * *

    이때 평왕부에서는 늘 일찍 잠자리에 들던 평왕이 아직 깨어있었다.

    그는 쇠약해진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들에게 물었다.

    “궁을 나갔느냐?”

    “예.”

    “준비는 다 했느냐?”

    “걱정 마십시오!”

    평왕세자는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핑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궁에 들어갈 것이니 잊지 말고 상용을 불러라.”

    “예.”

    * * *

    지온은 성 밖에서 기다리며 캄캄한 황성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마라. 별일 없을 게야.”

    북양태비가 그녀를 위로했다.

    지온은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으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저 평왕 쪽에서 약속을 지켜 안전히 떠나게 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인기척이 있다!”

    대부인 정씨가 갑자기 경계하며 말했다.

    성문 저쪽에서 가볍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큰 가마 두 대가 뒤따라 나왔다.

    지온은 큰 가마가 모퉁이를 돌아 그들 앞에 멈춰 설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았다. 

    루안이 맨 앞의 가마에서 내려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태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른 시위들에게 말했다.

    “빨리 준비해라.”

    지온은 뒤에 있는 큰 가마에서 대장공주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코끝이 찡해졌다. 

    “어머니.”

    대장공주는 오히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북양은 모래 바람이 많이 분다던데 네가 적응하기 힘들까 걱정이구나. 내가 매고고한테 준비하라 한 물건이 너희 마차에 있을 게다. 도착해서 혹시라도 루안이 널 괴롭히면 네 시어머니를 찾아가거라. 미운 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리는 아는 사람이란다.”

    지온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만 있으면 정말 어머니와 함께 가고 싶어요.”

    대장공주가 위엄을 내려놓고 다정하게 말했다.

    “온아, 난 제국의 공주다. 나라가 위험에 빠졌는데 어찌 떠날 수 있겠느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단다.”

    그녀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형세가 호전되면 너도 돌아올 수 있을 테지. 우리 모녀는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게야.”

    “예.”

    지온이 눈가를 훔치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를 뵈러 꼭 다시 돌아올게요.”

    미소 짓던 대장공주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곽여단!”

    그녀는 북양태비를 보며 전에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 딸을 자네한테 맡김세.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북양으로 가서 다 죽여버릴 게야! 정말 가만 안 둬!”

    북양태비가 눈을 부라리며 덩달아 쏘아붙였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뭐하러 하나? 우리 집에서 며느리들을 보물같이 대하는 거 모르나?”

    오래된 두 친구는 결국 또 한바탕 말다툼을 한 뒤 마차에 올랐다. 

    지온은 점점 멀어지는 대장공주를 바라보며 서글퍼졌다.

    ‘곧 뵙기를 바라요, 어머니.’

    * * *

    경성을 빠져 나오자마자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마차는 날이 어슴푸레 밝았을 때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길을 서둘러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마중하러 나온 야우를 만났다. 

    사람들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마침내 느슨해졌다.

    야우가 와서 보고했다. 

    “왕야께서 북양의 경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는 누가 쫓아오든 제때에 도착할 수 있으니 사공자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야우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여는데 이어서 루안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전에 도망갔던 건 우리 다시 한번 따져봐야지.”

    이 말을 들은 야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공자, 공자께서 결혼을 하셨으니 제 임무는 다 완수한 것 아닙니까…….”

    “큰 형님이 경성에 가면 내 지시를 따르라고 했을 텐데, 내가 언제 가라고 했지?”

    “…….”

    그는 할 말이 없었다. 

    한등이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때리며 호통을 쳤다.

    “공자님 말씀 못 들었어? 아직도 잘못을 안 빌고 뭐 하는 거야?”

    야우는 한껏 풀이 죽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공자님,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가 이렇게까지 귀엽게 구는 모습을 보고 루안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됐다. 가서 야간당직이나 서라.”

    “예.”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야우는 얼른 달아났다.

    루안은 이때가 되어서야 마침내 짬을 낼 수 있었다. 그는 매무새를 정리하고 황제를 보러 갔다. 

    큰 마차에 오르니 지온이 벌써 와서 류명주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소희가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사공자.”

    그도 이번 기회를 빌려 궁에서 따라 나왔다. 

    “좀 어떠신가?”

    황제를 보살피기 위해 뽑혀 온 태의가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걱정했다.

    “하관이 무능한가 봅니다. 어찌된 일인지 폐하께서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십니다.”

    루안은 몸을 돌려 마차의 발을 걷어 올리고 지시했다. 

    “고찬을 불러와라.”

    시위가 대답하고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찬이 왔다.

    “자네가 좀 살펴보게, 맥에 무슨 문제가 있나?”

    지온이 작은 목소리로 류명주에게 설명했다.

    “저 사람 집이 북양에서 대대로 군의관을 지낸 집안인데 특히 외상이나 중독을 잘 본대요.”

    류명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한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찬은 맥을 짚으며 점점 더 눈살을 찌푸렸다. 

    류명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폐하께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건가요?”

    고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하듯이 공수하고는 루안을 향해 눈짓했다. 

    류명주가 뭔가 잘못 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만류했다. 

    “여기서 말해요. 부탁이에요.”

    그녀의 간절한 얼굴을 보고 루안이 한숨을 쉬었다.

    “말해보게.”

    고찬이 말했다.

    “폐하의 원래 독은 해독이 됐는데, 또 새로운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류명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녀가 도움을 청하듯 태의를 보며 말했다. 

    “말도 안 돼요, 그렇죠?”

    그녀는 태의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고찬에게 물었다.

    “중독된 게 확실한가요? 언제 중독이 됐다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고(*蛊: 고대 전설에서 여러 독충을 한 그릇에 넣어 두어 서로 잡아먹게 한 후 최후까지 살아남은 독충)입니다.”

    고찬이 침착하게 말했다.

    “최소한 닷새는 됐습니다.”

    닷새, 그럼 궁에 있을 때였다. 

    류명주는 눈앞이 캄캄해져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해독할 수 있나요?”

    고찬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게 어떤 독충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 독이 이미 폐하의 혈기를 다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류명주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결국 목 놓아 울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놈들이 폐하를 무사히 떠나게 해줄 리가 없다는 걸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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