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떠나기 전에
지온은 며칠 동안 집집마다 작별을 고했다.
지씨 가문, 외가인 한씨 가문, 정국공부, 태사부…… 그리고 조방궁.
장씨 부인이 물었다.
“정세가 정말 그리 험악하니? 너희들이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온은 숨김없이 말했다.
“예. 지금 같이 다사다난한 시기에는 우리 집안도 몸을 낮추고 있어야 해요. 상황이 좋지 않으면 셋째 숙부께서도 벼슬을 그만두고 부잣집 노야로 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장씨 부인이 품위를 갖추고 말했다.
“장이의 혼사도 미뤄야겠구나.”
지온이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아직 젊으니 혼인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천천히 2, 3년 정도 지켜보다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생각해봐도 괜찮을 거예요.”
한편, 그녀가 간 후 위씨 부인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혼란스러워했다.
“따지고 보면 저 계집애가 멀리 갔으니 내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하지?”
이노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카사위가 이렇게 가버리면 이제 나를 대신해서 문서를 베껴 줄 사람이 없어지겠구나.”
비록 자기 집과 지온의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그의 친조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이 반년 동안 루안의 세력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 * *
한씨 가문에서는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헤어지게 된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지온은 두 외숙부에게 재차 당부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태사부에 가서 유 대공자를 찾으세요. 그 사람은 우리 친구라 믿어도 좋아요.”
한 노부인도 진심으로 서운해했다.
“북양이 그리 먼데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지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외할머니, 건강 잘 챙기셔야해요. 온이가 꼭 다시 뵈러 올게요.”
“그래, 그래!”
한 노부인은 생각만 해도 걱정스러운지 또 당부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고 모래바람도 세다고 하더라. 너처럼 이리 연약한 아이가 어찌 견디겠니?”
지온이 웃었다.
“외할머니, 잊으셨어요? 제가 몇 년 동안이나 스승님과 유랑했는데 안 가본 데가 어디 있겠어요? 걱정 마세요. 그깟 모래바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 * *
정국공부 쪽에서는 경소소가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안 가면 안 돼?”
그 모습을 본 정국공 부인이 호통을 쳤다.
“소소! 점잖게 굴어라!”
딸이 곧 태사부에 시집갈 예정이었고 문신 가문에서는 예절을 중시했기 때문에 정국공 부인은 최근에 그녀를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
경소소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
지온이 그녀의 손을 두드리며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우리가 전에 했던 일들이 별로 좋지 않아서 지금 가지 않으면 골치가 아파져. 바람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정말이야? 다행이다! 지온 언니, 거짓말이면 곤란해!”
지온은 돌아서며 대답을 회피했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것 같아요. 백부님과 경 오라버니께서 어쩔 수 없이 출정해야 할지도 모르니 부디 준비를 잘해놓으시고 항상 조심하세요.”
정국공 부인은 그녀의 조언에 감사 인사를 했다.
지온이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저희 양어머니도 잘 좀 보살펴 주세요. 큰 원한을 갚았으니 양어머니께서 갑자기 동력을 잃고 예전처럼 변하실까 걱정이 되네요.”
정국공 부인이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소소에게 자주 들여다보라고 하마.”
* * *
마지막은 조방궁이었다.
지온이 입을 열고 말했다.
“사매 두 분은 저와 함께 북양으로 가는 게 어때요?”
청옥과 함옥이 깜짝 놀랐다.
“사저, 무슨 일입니까?”
지온이 솔직하게 말했다.
“강왕이 도망갔어요. 황위가 평왕부에 떨어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 뻔하니 분명 깃발을 들고 반란을 일으킬 거예요. 이 전쟁이 일어나면 두 사람은 의지할 곳이 없잖아요.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청옥과 함옥은 깜짝 놀라 서로를 마주보았다.
함옥이 말했다.
“우리는 경성 안에 있는데 그렇게까지 문제가 커질까요?”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평왕이 이긴다면 당연히 아무 문제 없겠지요. 하지만 강왕이 쳐들어오면 어떻겠어요?”
함옥은 책에서 읽은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청옥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저…….”
청옥은 잠시 망설였다가 점점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저, 저는 안 갈래요.”
“왜요?”
지온이 물었다.
청옥이 말했다.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분명 많은 백성들이 재난을 당할 거예요. 우리 조방궁이 궁정을 모시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백성들의 공양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요? 경서에서 이르기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도를 행하는 일이고 사람의 목숨은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 했어요. 재난이 발생 할 테니 당연히 제가 남아 백성들을 도와야지요.”
지온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청옥 사매, 정말 많이 발전했네요.”
청옥이 조금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제가 이 조방궁의 주지 자리에 앉은 건 사실 사저가 저를 대신해 자리를 만들어 준 덕분이에요. 덕행이든 수련이든 전 아직 칭찬받을 만한 것이 없어요. 이렇게 사람을 살릴 기회가 생겼는데 제가 어찌 도망을 치겠어요?”
지온이 안심하며 말했다.
“사매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나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을게요. 스스로를 잘 보호하고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요.”
“예, 사저.”
* * *
비림(碑林)에서 유신지가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변화가 클 줄은 몰랐네. 이번에 가면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겠구먼.”
루안이 웃었다.
“얼마 안 걸릴 걸세.”
말속에 다른 뜻이 숨어있는 것 같아 유신지가 물었다.
“어찌 그리 자신하나?”
루안이 반문했다.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진짜 용이 될 상인 것 같나?”
유신지는 잠시 망설이며 대답하지 못했다.
루안이 말했다.
“얼마 안 있어 우리가 돌아와 이 국면을 수습해야 할 걸세.”
유신지는 짧게 고민하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네들 전부터 다 계획을 세워뒀던 건가?”
만약 북양이 진작부터 이런 계략을 세워 뒀던 거라면, 그가 본의 아니게 그들을 밀어준 셈이지 않은가? 그건 정말 불쾌한데! 그가 이런 일을 한 것은 친구를 돕기 위함이었지 결코 누군가의 야심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루안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황릉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예측할 수 있었을 거로 생각하나?”
‘하긴…….’
유신지는 조금 무안해하며 해명했다.
“자네가 너무 덤덤하게 말을 하니 그런 것 아닌가.”
루안 역시 그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내가 한동안 평왕부 쪽을 감시했었네.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하는 동안 마음의 준비를 전혀 안 했다고는 볼 수 없지.”
“역시 그랬군.”
루안이 이어서 말했다.
“내가 떠난 후에 지씨 가문과 한씨 가문을 자네가 좀 돌봐주게. 지씨 가문 삼노야는 성실하시지만 주관이 별로 없으신 분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분에게 직접적으로 조언을 해주게. 이노야는 좀 교활한 사람이지만 다행히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아서 그냥 치켜세워주기만 하면 되네.
한씨 가문은 노부인께서 사리에 밝으셔서 별로 걱정할 것이 없네. 대노야께서 공부를 좀 답답해하셔서 달래드려야 하는 것만 빼면 말일세.”
유신지는 그 말들을 머릿속에 저장하면서도 투덜댔다.
“내가 자네 하인인가? 자긴 도망가면서 나더러 뒷수습하라고 하다니.”
루안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말했다.
“대장공주마마 쪽은 내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자네가 결혼하면 곧 한 식구가 될 테니 말일세. 하지만 정국공부 쪽은 정말 좀 걱정이 되긴 하네.”
그가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자 유신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큰 피해를 보았으니 강왕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그가 봉지로 돌아가면 분명 깃발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키겠지.”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분명히 날 걸세. 그때가 되면 정국공과 경 형은 출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 사람들은 대대로 군대를 이끌었던 사람들이라 아무 걱정 안 되네. 그저 양쪽 모두 군주가 현명한 자들이 아니라서 다른 일에 연루될까 걱정인 거지.”
한 마디로 말해서 양쪽 모두 바보라서 출정을 하기도 전에 장군을 참수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럼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유신지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전쟁터의 일은 그가 관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 * *
날이 저물자 두 사람은 비림에서 나왔다.
지온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났다.
“얘기 끝났어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이 유신지를 바라보았다.
“마침 잘 됐네요. 부탁할 게 있어요. 조방궁의 사매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니 잘 좀 돌봐줘요.”
유신지가 자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다들 왜 이러나? 한두 명씩 다 나한테 떠넘겨 버리면 그만인가?!”
지온이 진지한 말투로 대꾸했다.
“누군들 당신한테만 떠넘기고 싶겠어요? 이 경성에서 당신보다 더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맞네.”
루안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네 말고 우리가 또 누굴 찾겠나? 능력이 되면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능력이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네밖에 없지.”
유신지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자네들과 입씨름을 해서 뭐하겠나.”
그의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지온은 루안과 눈을 마주치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 * *
유신지의 유쾌한 기분은 집에 돌아가서도 지속되었다.
마침 유 노태사가 복도에서 바람을 쐬고 있다가 그를 불렀다.
“이 녀석 어딜 갔다 왔느냐? 뭐가 그리 좋아서 웃고 있어?”
유신지는 얼굴을 쓰다듬더니 문득 깨달은 듯 얼이 빠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게? 내가 좋을 게 뭐가 있어? 귀찮은 일들만 더 많아졌는데 말이야?”
유 노태사는 손자 녀석이 얼이 빠진 것을 보고 말했다.
“어째, 장가갈 생각을 하니 기뻐서 마음이 진정이 안 되는 게냐?”
“아니에요!”
유신지가 극구 부인했다.
그는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며 할아버지에게 차를 한잔 올리고 의견을 구했다.
“루안이 떠날 거래요.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 노태사가 부채를 부치며 느릿느릿 말했다.
“아주 잘하는 거지, 그 아이가 대처가 빠르구나.”
유신지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루안이야 훌훌 털고 여기를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경성은 지금 난장판이잖아요. 이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유 노태사가 말했다.
“그 아이는 여기서 떠나야 안전할 게야. 우리 가문이 너무 눈에 띄지만 않았다면 나도 너희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싶구나.”
유신지가 고민하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할아버지, 그러면 안 되지 않나요? 루안은 상황이 특수해서 어쩔 수 없지만 지금처럼 다사다난한 시기에 우리까지 도망가면 누가 조정에서 열심히 일을 하겠어요?”
유 노태사는 손자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 노태사는 손자가 부끄러워하자 말했다.
“이 녀석 평소에는 하나도 어른스럽지가 않더니 드디어 중심을 좀 잡은 모양이구나. 우리 가문은 당연히 도망갈 수 없지. 할애비가 그냥 나오는 대로 해본 말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