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82)화 (382/385)
  • 382화. 감옥

    루안은 감방에 들어가 초라한 행색의 강왕세자를 보았다.

    루안의 눈빛은 마치 길가에 있는 하찮은 돌멩이라도 보는 것마냥 차가워 의도치 않게 상대방을 격분하게 했다.

    “뭐 하러 왔나?”

    강왕세자가 원망을 품은 눈빛으로 말했다.

    “본 세자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러 왔나? 배신자 같으니라고! 본 세자는 진심으로 믿었는데 자넨 내 등에 칼을 꽂았어!”

    루안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세자께서 하관을 설득하러 오셨을 때 하관이 폐하를 배신할 수 있으면 당연히 전하 역시 배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너…….”

    강왕세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루안의 이 말은 마치 너는 어찌 이리 멍청하냐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세자께 하관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세력을 논한다면 세자께서 가진 모든 자본은 다 강왕에게서 나온 것일 뿐이고 명분을 논한다면 친왕세자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능력을 논한다면…….”

    그는 차마 더 말을 할 수 없다는 듯이 피식하고 비웃었다. 

    “루안!”

    강왕세자는 앞으로 나가 그의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발악하며 양 손발에 채워진 족쇄와 수갑을 흔들고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저 원망스러운 눈길로 루안을 노려볼 뿐이었다.

    “강왕부를 무너뜨린 게 자네라고 생각하나? 틀렸네, 평왕일세! 그가 일찌감치 정사당 사람들을 매수해두었기 때문에 자네가 이런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게지! 이 일이 끝나면 자네 같은 모난 돌이 제일 먼저 정을 맞게 될걸!”

    루안이 놀랍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고 웃는 듯 마는 듯 속삭였다.

    “세자 전하께서 그걸 다 알아차리시다니요? 정말 괄목상대할 만하군요.”

    강왕세자는 또 다시 화가 폭발했다. 

    그는 처음 볼 때부터 루안이 싫었는데 역시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와 루안은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강왕세자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을 보고 루안이 마침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자 전하 화내지 마십시오. 하관은 비웃으러 온 것도 아니고 세자의 화를 돋우러 온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옛정을 생각해 세자 전하께 퇴로를 열어주러 온 겁니다.”

    ‘계속 허튼소리만 늘어놓다니! 날 화나게 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면서 이렇게까지 화가 나게 만든단 말이야?’ 

    강왕세자는 그의 말을 단 한 마디도 믿을 수 없었다! 

    루안도 그가 믿든 안 믿든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세자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일이 진압되면 하관은 화를 입을 겁니다. 평왕부가 어떤 구실을 찾아 저를 정리해버리기만 하면 이번 일은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지겠지요. 그럼 그들은 아무 허물도 없이 깔끔하게 지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을 듣고 강왕세자는 마음속 의심이 한층 깊어져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자기 스스로도 알고 있으면서 왜 또 이런 짓을 하려고 하는 걸까? 죽고 싶어서 저러나?’

    루안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세자께선 봉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강왕세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루안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관이 이미 매수하여 두었습니다. 아무도 못 들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왕세자는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설마 자네가 나를 봉지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루안이 웃으며 물었다.

    “왜 하관이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왕세자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물었다.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겐가?”

    “방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일이 잠잠해지면 평왕부에서 저를 향해 칼을 겨눌 겁니다. 제가 살려면 그들이 천하를 장악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지요.”

    ‘그런가? 그럴듯하긴 하지만 루안은 북양이라는 뒷배도 있는데…….’

    강왕세자는 고민했다.

    루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저도 꽤 많은 힘을 써야 하니 또 다른 조건도 있습니다.”

    “무슨 조건?”

    “월월홍 해독제.”

    강왕세자는 문득 크게 깨달았다. 그는 내내 루안이 어찌 이리 담이 클까 하고 생각했다. 분명 강왕이 준 월월홍을 먹었는데 독이 발작을 일으켜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한데 알고 보니 이렇게 써먹으려던 것이었구나!

    강왕세자는 자신이 내세울 패가 있는 줄 알고 허세를 부렸다.

    “본 세자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해독제를 그냥 달라고? 흥!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닌가.”

    루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자 전하, 전하께서 해독제를 주지 않으시면 저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전하도 봉지로 돌아갈 수 없으니 역시 목숨을 잃으시겠지요. 세자께선 우리 둘 중 누구의 목숨이 더 소중하십니까?”

    강왕세자는 아무 말도 못 했다. 

    “…….”

    “지금은 흥정하실 때가 아닙니다. 세자께선 지금 중죄인 중의 중죄인입니다. 전하를 몰래 내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세자께서는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틀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루안이 감방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던 강왕세자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루안!”

    루안이 걸음을 멈췄다. 

    강왕세자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약속함세.”

    루안이 웃으며 물었다.

    “해독제는요?”

    강왕세자가 말했다.

    “자네가 종이와 붓을 가져오면 약방문을 써 주겠네. 여기서 나간 후에 자네에게 전달하지.”

    “거짓말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 약은 의원이 만드는 것인데 세자께서 어찌 약방문을 기억한단 말입니까?”

    강왕세자가 말했다.

    “그 물건은 쓸모가 있는 것이라 내가 특별히 외워 두었네. 못 믿겠다면 내가 지금 자네에게 약방문을 써 줄 수도 있어. 다만 구체적인 배합은 여기서 나간 다음에 말해 주겠네.”

    루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등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강왕세자가 약방문을 쓰자 그는 한번 훑어보더니 가져갔다. 

    그가 가는 것을 보고 강왕세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본 세자는 언제 나갈 수 있는 겐가?”

    “때가 되면 누군가 전하를 데리러 올 겁니다.”

    루안이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

    “세자께서 이리 시원스러우시니 하관이 충고를 하나 더 해드리겠습니다. 봉지에 도착하면 사전에 분위기를 조성해서 전하께서 돌아오신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성내로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강왕세자가 잠시 멍해졌다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지만 루안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한등을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남겨진 강왕세자의 안색이 흐려졌다. 

    만약 사람들이 그가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면, 부왕이 그가 경성에서 죽었다고 말해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부왕이 정통성을 되찾으려 한다면 명분이 서지 않는 단 한 가지 이유는…….

    * * *

    루안은 바로 떠나지 않고 여자 감옥으로 갔다.

    강왕세자비는 두 아이와 함께 갇혀 있었다.

    루안이 오는 것을 보고 그녀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찼다. 

    “뭐 하러 왔나?”

    루안은 대꾸하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소현주에게 말했다. 

    “이리 오너라.”

    소현주는 어머니를 한 번 보더니 망설이며 걸어갔다.

    옥졸이 감옥문을 열고 그녀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갔다.

    “무슨 짓이냐?”

    세자비가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내 딸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게야?”

    한등이 비웃었다. 

    “우리 공자께서 이런 어린 소저한테 무슨 짓을 한다는 겁니까? 세자비께선 아이가 좋은 아비를 둔 걸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자기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켰으니 말입니다.”

    세자비는 딸이 머뭇거리며 감옥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 감옥 문을 따라 미끄러지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딸이 자신과 함께 지내며 현주로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겨 왔지만, 마지막에 가서 딸을 지킨 건 그녀가 경멸했던 강세안이었다.

    * * *

    루안이 감옥에서 나오자 평왕세자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나?”

    “다행히 명령은 완수했습니다.” 

    루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 부자가 서로 마음이 돌아섰으니 강왕세자가 봉지로 돌아가면 분명 한바탕 대란이 일어날 겁니다.”

    평왕세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죽이면 강왕에게 핑계를 하나 더 만들어 주는 셈이 되었겠지. 자네의 기지 덕에 오히려 첩자를 하나 심을 수 있게 되었군.”

    루안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일이 끝났으니 하관은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쪽은…….”

    평왕세자가 그에게 비단 주머니를 하나 주었다. 

    “감사합니다. 세자 전하.”

    평왕세자에게 인사를 하고 루안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서 한등이 월월홍 해독제의 약방문을 꺼내며 물었다. 

    “공자, 이건 어떻게 할까요?”

    루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마 그 약재들이 맞을 게다. 분명 배합하는 방법을 고의로 틀리게 알려주었겠지. 고찬에게 가져다 주거라.”

    강왕세자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가짜 약방문을 주어 그를 해치려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루안이 이미 해독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해독제 이야기는 그의 믿음을 얻고자 일부러 했던 이야기에 불과했다.

    * * *

    루안은 궁으로 들어갔다.

    그가 비단 주머니를 태후에게 건넸다.

    “안에 해독제의 약방문이 들어있습니다.”

    태후가 깜짝 놀랐다. 

    “어디서 구했나?”

    “평왕세자께서 주셨습니다.”

    태후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어찌 이걸 주었단 말인가?”

    평왕부는 황제가 죽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황제가 살아나면 오히려 훨씬 골치가 아플 터였다.

    루안이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폐하를 승하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태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자네…….”

    루안이 말했다.

    “마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정에서 용인할 수 있는 건 황제가 죽는 것뿐입니다. 폐하께는 더 이상 살길이 없습니다. 신은 관직을 그만두고 며칠 후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마마께서 괜찮으시다면 그분이 저와 함께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태후의 마음속에 오만 상념이 뒤섞였다. 한참이 지난 뒤 그녀는 낙담하며 말했다. 

    “그 아이는 여섯 살에 궁에 들어와 근이와 함께 자랐고 친형제처럼 떨어진 적이 없었지. 내 그 아이의 친아비에게 원한이 깊고 또 그 아이가 근이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도 원망스럽긴 하지만……. 그 아이가 죽는 것까지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한다면 정말이지 괴롭다네.”

    루안이 위로하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이제 선대 황제와 선대 태자 전하의 억울함을 풀었으니 그분이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태후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안은 사표를 제출한 뒤, 집에서 행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지온은 제일 먼저 대부인 정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외숙부와 같이 가실 거지요?”

    대부인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고민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지온이 다시 물었다. 

    “안 가신다면 혹시 평왕부의 보호를 받으실 생각이세요?”

    정씨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는가…….”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강왕부를 지목하려면 정해군이 가장 중요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이 어떻게 그 관인의 존재를 알게 됐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대부인 정씨는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맞다. 나와 큰오라버니는 일찍이 평왕부의 자객이었지. 자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평왕부로 돌아갔던 적이 있네. 그들의 손을 빌려 자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었거든.”

    지온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일을 평왕부 쪽에 말씀하셨나요?”

    정씨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와 진심을 터놓고 이야기 한 후로 우린 평왕부와 연락하지 않았어. 일찍이 자네 아버지께서 평왕부는 일을 너무 음흉하게 처리해 좋은 주인이 아니라고 하셨지. 

    나와 오라버니에게 반드시 그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당부하셨어. 복수할 방법이 너무 막막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었을 게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그녀의 추측과 맞아떨어졌다. 

    그러니까 평왕부는 일찍이 단서를 잡고 단 한 번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평왕부와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도 우리를 북양으로 데리고 갈 게냐?”

    정씨는 약간 불안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안 될 건 뭐 있어요? 두 분도 괜찮으신 거죠? 우리 아버지께서 어머니랑 결혼하셨다는 건 아버지가 벌써 두 분을 인정하셨다는 뜻이잖아요.”

    정씨는 그녀를 따라 웃었지만 눈가에는 살짝 눈물이 맺혔다. 의붓딸의 인정을 받으니 마치 죽은 남편과의 감정이 아직도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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