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81)화 (381/385)
  • 381화. 귀가

    “이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준 적은 없습니까?”

    루안이 질문했다. 

    능양진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비밀을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몇 년 동안 강왕비마마께만 드렸습니다.”

    루안이 몸을 돌렸다.

    “왕야, 들으셨지요? 지금 강왕부에 가서 수색해보면 아마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대장공주가 참지 못하고 강왕을 가리키며 욕을 했다. 

    “이 배은망덕한 놈아! 오라버니께서 살아계실 때 네 놈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네 집안에 식구가 많다고 일부러 자꾸 상을 줄 이유를 찾으셨을 정도였다! 심지어 자기 개인 창고에서까지 꺼내다 주셨어! 

    네 놈의 맏이도 어렸을 때 친자식처럼 귀여워했고 나중에는 여섯째까지 궁에 들여 키우셨다. 근이가 뭘 어쨌고 오라버니가 대체 뭘 어쨌단 말이냐! 오라버니께서 네 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애써 죽였단 말이냐! 내 부군도 네가 죽였지? 기어코 우리 집안을 몰살시켰으니, 그래, 어디 기쁘더냐?”

    “당연히 천하 지존의 자리를 얻기 위해 그랬겠지요!”

    루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승원궁에도 50년 동안 독을 묻어 놓은 걸 보면 그냥 일시적인 생각은 아니었던 게 분명합니다.”

    태후는 눈을 꽉 감았다 다시 떴다. 그녀는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강왕부가 흉악한 야심을 품고 황제를 시해해 그 권좌를 찬탈했으니 이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여봐라, 저놈들을 잡아들여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당연히 대제는 거행할 수 없었다. 결국 태후의 인솔하에 모두들 제묘(*帝廟: 천자의 사당)에 들어가 절을 하는 것으로 예를 대신했다.

    태후가 대장공주와 서로 얼싸안고 통곡하자 듣는 사람도 다 슬퍼질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 많은 신하들은 속으로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었다. 

    강왕이 황제를 시해했다는 것이 증명되자 현 황제의 황위 계승의 합법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왕을 역모죄로 다스리고 나서 그의 아들을 황위에 계속 앉혀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걸 어찌 세상 사람들에게 해명한단 말인가?

    ‘황제를 바꾼다면 어느 가문으로 바꿔야하지?’

    * * *

    며칠 후, 황제의 상태가 안정되자 태후는 귀경 명령을 내렸다.

    강왕 등 다른 사람들도 정국공의 압송하에 함께 귀경했다. 

    갈 때는 깃발을 드높이며 갔지만 돌아올 때는 침울한 분위기만 가득했다.

    그들이 성 밖에 도착하자 금군이 와서 보고했다.

    “평왕 전하께서 종친들을 거느리고 성문에 마중을 나와 계십니다.”

    평왕은 나이가 많아서 황릉에 따라가지 않았다. 그가 종정으로서 지금처럼 종친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온 것은 법도에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앞에 나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후의 표정이 복잡했다. 

    “평왕…….”

    “올케.”

    대장공주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후가 웃으며 그녀의 팔을 두드렸다.

    “괜찮네.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그녀는 4년 전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일도 다 견뎌내지 않았는가?

    어가가 멈추자 평왕이 와서 인사했다. 

    “황백(皇伯), 예를 거두십시오.”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마마, 수고하셨습니다.”

    다 늙어서 이것저것 따져대는 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평왕은 휘청휘청하면서도 조금도 예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고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태후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대장공주가 대신 말했다.

    “폐하께서 의식이 없으시고 언제 호전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평왕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태의는요? 방법이 없답니까? 그럼 안 되지요. 마마. 황방(*黄榜: 천자의 조서, 칙령)을 붙여서 민간에서 명의를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태의에게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했습니다.”

    대장공주가 말했다.

    “황백, 이리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병중이시니 우선 들어가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평왕은 연거푸 말하며 의전 앞에서 물러났다. 

    “폐하와 마마께 인사드립니다.”

    어가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평왕은 상용을 비롯한 대신들과 인사하며 서로 위로했다. 평소 만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마치 그가 이 황성의 주인인 것 같았다. 

    그다음 일들은 그녀들과는 무관했다. 어가가 궁문으로 들어가자 대장공주는 궁에 남아 태후를 모시기로 하고 지온은 작별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정양대로에서 루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뒤에서 호송하던 병사들의 걸음걸이가 다급해지는 것을 보고 당황하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잠시 후, 루안이 급히 와서 말했다.

    “당신 먼저 돌아가시오. 난 할 일이 있소.”

    “무슨 일이에요?”

    루안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강왕이 없어졌소.”

    지온이 깜짝 놀랐다.

    “왜 없어져요? 정국공은요?”

    루안이 말했다.

    “정국공이 아니라 평왕세자가 압송 임무를 맡았다고 하오.”

    지온은 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연락을 주고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왕이 실종된 것은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가서 일해요. 어머님이랑 나는 먼저 집으로 갈게요.”

    “응, 조심하시오.”

    지온이 고개를 들어 황성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황성의 하늘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 * *

    “어찌 사라졌단 말이냐?”

    평왕세자가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른단 말이냐?”

    선두에 선 장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누군가 바꿔치기 한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평왕세손이 굳이 강왕세자를 보러 가는 바람에 강왕이 탈출할 기회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세손은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는 사람이었으니 말을 하면 미움만 살 것이 뻔했다. 

    다행히 밖에서 때마침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 통정께서 오셨습니다.”

    평왕세자는 화를 누르고 옷을 정리하며 분부했다. 

    “들라 해라.”

    루안이 들어왔을 때 평왕세자는 평상시의 온화한 태도로 돌아와 친절하게 말했다. 

    “왔나? 고생 많았네.”

    강왕이 실각하여 평왕부의 기세가 높아질 것이 뻔한 상황이었으니 지금 평왕세자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루안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고, 심지어 말투는 더욱 냉담했다. 

    “세자께 약속드렸던 일은 이미 처리했으니 세자께서도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강세안으로부터 확실한 정보를 듣고 루안은 평왕세자를 찾아가 면전에서 패를 내보이며 승부수를 던졌다. 

    이것이 강왕을 쓰러뜨릴 가장 좋은 기회였기에 루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기왕 평왕부가 길을 닦아 놓았으니 가져다 써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평왕부 입장에서도 루안이 나서는 것이 직접 손을 쓰는 것보다 모양새가 더 좋지 않은가? 더 나아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 또한 줄어들 테니 나쁠 것이 없었다.

    평왕세자는 곧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수중에 쥐고 있던 패를 넘겼다. 

    황제가 자객에게 당한 일로 호은은 죽게 되었지만 황제는 불과 이틀 만에 경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대장공주가 부마의 고향으로 보낸 능양진인이 어떻게 딱 제때에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실은 평왕부에서 한발 앞서 그녀를 데려왔기 때문에 증거를 댈 수 있었던 것이다. 

    평왕세자는 이런 결정을 내리고도 마음이 불안했다. 그는 루안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공할 줄은 몰랐다. 이제는 평왕세자도 그의 능력을 높이 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루 통정 덕에 이렇게 조정에서 역적을 잡아낼 수 있었네. 이제야 선대 황제와 선대 태자께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어. 본 세자가 반드시 상소문을 올려 루 통정의 공을 널리 알리겠네.”

    루안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제 공을 알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관은 몇 년 동안 너무 열심히 일을 한 탓에 벌써 지쳤습니다.”

    평왕세자가 재차 권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본 세자는 자네가 그저 덕을 쌓는 일을 했다고 여기는 수밖에 없겠구먼. 훗날 생각이 바뀌면 다시 나를 찾아오게.”

    루안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 * *

    집에 돌아오니 지온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안 물어봤소.”

    지온은 잠시 멍해졌다. 

    그들과 강왕부의 원한은 이미 뼈에 사무칠 정도였기 때문에 강왕이 지금 이 고비에서 벗어나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루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우리 북양으로 돌아갑시다. 이런 복잡한 일들은 전부 내버려 두고 말이오.”

    큰 원한은 이미 갚았으니 지온은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는 건 분명 뭔가 있는 거였다.

    “폐하께서 이런 상황이신 데다가 평왕부에서 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경성에 큰 난리가 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제쳐 둔대도 양어머니는 걱정이에요…….”

    루안이 웃었다.

    “양어머니께선 별일 없을 거요. 그리고 그분께서도 분명 당신과 내가 북양으로 돌아가길 바라실 것이오.”

    그가 한 일은 금기를 범한 짓이었다. 신하의 몸으로 가문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황권을 전복시킨 것이다. 그러니 누가 다시 그 자리에 앉더라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북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왕부가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기다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숙청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루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마치 은하수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돈은 이제 거의 다 모았소. 서원 하나 짓는 데는 충분할 거요. 다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아직 상해로 돌아갈 수 없소. 몇 년만 더 기다렸다가 모든 일이 평정되면 돌아가서 무애해각을 다시 짓는 거요. 어떻소?”

    지온은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고쳐 잡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 * *

    철문이 열리자 소름 끼치는 삐걱 소리가 났다.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잇따라 고개를 들고 흥미로운 눈길로 들어온 사람의 신분을 추측했다. 

    강왕이 역모를 꾀한 사건 이후로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잡혀 들어왔다. 이번에는 어느 왕부의 귀족인 걸까?

    그러나 그들의 추측은 틀렸다. 온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 붉은 옷을 입은 고관대작이었다. 

    “대인, 들어오십시오.”

    옥졸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루안은 그를 따라 독방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종친의 자제를 가둔 곳이다 보니 환경은 그런대로 괜찮아 구역질 나는 냄새까지는 나지 않았다. 

    문을 열자 그가 말했다.

    “자네는 가보게.”

    “예.”

    옥졸은 눈치 있게 열쇠를 한등에게 건네주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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