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80)화 (380/385)
  • 380화. 기억하는 향

    정씨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 피가 묻은 관인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내관이 그것을 가져다 태후, 상용 등 사람들 앞에 가서 한 명 한 명 확인시켜 주었다. 사람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정해군 지휘사의 관인이다!’

    루안은 몸을 굽혀 상자 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이것은 돌아가신 장인이신 지 대인께서 남긴 편지입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4년 전 4월에 마침 평천현에서 공무를 맡았는데 한밤중에 어떤 사람이 이 관인을 들고 찾아와 연유를 설명해주었다 합니다. 원래 이 관인은 살아남은 해적이 훔쳐 갔던 것인데 그 해적이 평천현 경내로 도주했다 붙잡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해적을 추적하며 이 관인이 중요한 증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천현에서 이걸 상부에 보고하면 누군가에 의해 중간에서 파괴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이 물건을 다시 훔쳐서 우리 장인어른에게 가져다주었고, 장인의 손을 빌려 황제에게까지 전하려 했다 합니다.”

    지원의 편지는 아주 정갈하게 쓰여 있어서 필적을 조사해보면 바로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이 관인은 너무도 확실한 물증이었다.

    태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 아들이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구나!’

    상용을 비롯한 사람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소달이 해적으로 변장했던 것이 증명되었으니 선대 태자는 뜻밖의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강왕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황제의 제위 계승의 합법성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제국의 지축을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진실이었다!

    루안이 강왕을 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예상하지 못하셨던 일이었겠지요? 전하께선 나중에 이 일을 알고 관인을 보낸 사람을 죽이고 또 지 대인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이렇게 끝난 줄 아셨을 겁니다.”

    정씨 부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감께서 돌아가신 후에 소첩은 누군가의 감시를 받아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최소 반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감시하는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루안이 냉담하게 말했다. 

    “증인과 물증이 모두 있습니다. 전하, 아직도 부인하실 겁니까?”

    강왕의 시선이 천천히 강세안, 정씨, 그리고 그 관인을 훑고 마지막에 루안에게로 가서 멈췄다.

    “자네는 이것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한 것인가? 본왕이 도대체 어디에서 자네한테 미움을 샀길래 이렇게 애써 본왕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하는가?”

    루안이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 전하께서는 왜 시치미를 떼십니까?”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지만, 누구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이때 내관이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태후마마, 황후마마, 북양태비께서 밖에 무릎을 꿇고 강왕 전하를 고소하겠다고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북양태비는 또 뭘로 강왕을 고소한다는 거지?’

    ‘북양왕가가 정말 기세등등하구나! 강왕부와 사생결단을 낼 모양이야!’

    태후가 즉시 말했다. 

    “들라 하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북양태비가 지온의 수행을 받으며 정전으로 들어왔다. 고부 두 사람은 옷을 이미 소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아주 눈꼴시어했다. 

    북양태비는 무릎을 꿇고 가지고 온 혈서를 올렸다. 

    “북양왕 루혁의 어미인 소첩 곽여단, 돌아가신 부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돌아가신 부군인 전대 북양왕 루연은 평생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소인배의 계략에 넘어가 비명에 죽었습니다. 

    태후마마의 주관 아래 각 대인께서 제 부군의 죽음을 명확하게 조사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루안은 어둡고 냉담한 표정으로 강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제가 왜 전하를 괴롭히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쉴 수는 없지!’

    * * *

    루안이 경성에서 힘들게 적들과 교전을 하고 있을 때, 루혁도 한가하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는 내부 첩자를 잡아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증거를 수집해 놓고 언젠가 원한을 갚을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드디어 그날이 왔다. 

    북양태비가 들고 온 혈서 소장을 제외하고 북양의 시위가 거의 두 상자는 족히 되는 자백서와 각종 기록 서류들을 전부 옮겨 왔다.

    이건 루혁이 상경할 때 선물로 위장하여 함께 들고 온 것들이었다.

    증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루안이 말했다. 

    “왕야께서 이래도 인정을 안 하신다면, 저희 형님이 증인을 데리고 즉시 상경할 겁니다.”

    강왕이 싸늘한 말투로 다른 말을 했다. 

    “알고 보니 자네 형제가 반목한 것은 다 가짜였군. 도망쳐서 상경했다고 하더니 사실 마음속으로는 딴생각을 품고 있던 거였어.”

    강왕이 북양에 심어둔 첩자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죽어야 할 놈들은 이미 다 죽었는데 루혁이 잘못을 발견한다고 이제 와서 뭘 어쩐단 말인가? 황위를 이미 손에 쥐고 있으니 황제가 멀쩡하기만 하면 루연을 죽인 일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북양에서 일러바치려고 해도 어디 일러바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황제가 갑자기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그로 인해 원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사소한 문제들이 이제는 모두 큰 문제가 되어버렸다.

    강왕이 멀리 봉지에 있던 4년 동안, 그의 경성에 대한 영향력은 날로 쇠약해졌다. 강왕세자를 미리 상경시켰던 건 이 장악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도리어 소달 장군만 헛되이 잃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금군이 정국공의 손에 떨어진 것은 강왕부로서는 팔을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조정 쪽은 상용의 태도가 애매모호했다. 정사당 안에서는 오직 전 재상만이 그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원래 천천히 사람들을 굴복시켜 나갈 생각이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루안이 한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딴생각을 품었다 하셨습니까? 그 말은 왕야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더 맞을 것 같군요. 우리 루씨 가문은 북양에 틀어박혀 왕야를 방해한 적이 없는데 왕야께서는 어째서 그리 심혈을 기울여 부왕을 죽이신 겁니까?”

    “바로 그것일세!”

    강왕세자가 소리쳤다. 

    “무슨 일이든 동기가 있게 마련이지! 북양왕 루연을 죽이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득이 된단 말인가? 자네가 말하는 증거는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겠지!”

    루안은 피식 웃더니 강왕세자의 등이 시릴 정도로 차갑게 노려보았다. 

    “동기요? 있습니다!”

    그가 과거를 돌아보며 말했다.

    “부왕을 죽이고 우리 형제를 이간질 시키면 북양은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경성에서 병력을 보내 황실을 도와달라는 조서를 보내도 돌아볼 겨를이 없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강왕 전하?”

    이 말이 나오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솜털이 곤두섰다. 상용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놓쳤고 설 상서는 한술 더 떠 의자를 발로 찼다.

    ‘루안 이 자식, 일을 이렇게까지 벌여 놓고도 아직 만족이 안 되는 건가! 기어코 더 큰 소동을 피우려는 게야? 시해, 그가 지금 황제의 시해를 암시하고 있어! 안 돼, 이럴 때 입을 열면 진짜로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는 거야!’

    전 재상이 소리쳤다.

    “정말 함부로 지껄여대는군! 루안, 자네 지금 이간질을 하려는 겐가!”

    루안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전 재상, 매번 재상께서 함부로 지껄인다고 할 때마다 결론은 항상 진실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체면만 상하시려고요?”

    “자네…….”

    상용이 말했다. 

    “루 통정, 그런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네. 증거가 없으면 무고가 되는 것이니 잘 생각해 보게.”

    루안이 바로 말을 이었다. 

    “만약 제게 증거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상용은 자기도 모르게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는 이제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뼛속까지 스밀 정도의 한기를 온몸에서 내뿜고 있었다. 그녀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말해라!”

    “감사합니다. 마마.”

    루안이 공수하며 인사하고 말했다. 

    “신, 다시 증인을 불러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불러와라!”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강호를 유랑하고 있던 능양진인이었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이전의 고인다운 풍모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태후마마,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루안이 말했다. 

    “능양진인, 알고 있는 것을 말해보십시오.”

    “예.”

    능양진인은 일찍이 지온에게 놀라 간담이 서늘해 진 적이 있어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목조목 말했다.

    “귀인 여러분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빈도가 전에 조방궁을 관장했을 때 조향의 기예를 배웠습니다. 4년 전 선대 황제께서 병석에 누워 계실 때 강왕비마마께서 조방궁에 와서 어떤 향환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희첩이 왕비마마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며 자기도 모르게 중독되면서도 증상이 경미해서 맥을 짚어 보아도 확인할 수 없는 그런 향환을 만들어 달라 하셨습니다…….”

    그녀가 말을 할수록 궁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빈도는 강왕비마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평생 동안 배운 걸 종합해 향환을 만들었고 한 상자를 보내드렸습니다. 나중에 선대 황제께서 병이 심각해져서 빈도가 궁에 들어가 복을 빈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 향 냄새를 맡았습니다…….”

    쨍그랑!

    대리사경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현장은 고요했고 모두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향환을 선대 황제에게 사용했다면 선대 황제의 죽음도 역시 누군가가 사주했다는 뜻이었다.

    시해, 이건 황제가 명백하게 시해된 것이라는 의미였다!

    강왕세자만이 아직도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런 도인이 멋대로 지껄이면 그게 사실이 되는 겁니까? 증거도 없이 거짓말만 지어내는 걸 누가 못한답니까?”

    루안이 말했다. 

    “세자께서 말씀하시는 증거야 아주 쉽지요. 당초에 선대 황제께서 병석에 누워 계실 때 태후마마와 대장공주마마께서 시중을 드셨지요. 상 수상을 비롯한 중신들도 전부 안에 들어가 문병을 하였을 테니 분명 그 향에 익숙하실 겁니다. 지금 능양진인을 불러왔으니 그 향환을 만들어서 향을 맡아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능양진인이 급하게 품에서 향주머니를 꺼내 바쳤다. 

    “빈도가 가지고 왔습니다!”

    루안이 지시를 청했다. 

    “마마, 확인해보아도 되겠습니까?”

    태후가 지시했다. 

    “향을 피우고 태의를 불러오라!”

    내관이 앞으로 나가 향주머니에서 향환을 꺼내 향로에 넣었다. 

    향기가 피어오르자 상용과 대신들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태후와 대장공주는 더욱 비통해했다. 

    그들은 모두 이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대 황제가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맡았던 향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태의는?”

    태후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태의가 곧 도착해 향환을 검사한 후 말했다.

    “마마, 이 향에 독성이 있긴 하지만 아주 가벼운 정도입니다. 정상인은 오래 맡으면 좀 불편한 정도겠지만, 환자라면 깊이 잠들어 깨어나기 힘들 겁니다…….”

    태후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강왕세자는 약간 맥이 빠진 것 같았다. 

    “이것도 우리가 보낸 거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루안이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약간 비웃듯이 능양진인을 흘겨보았다.

    “말해 보시지요?”

    능양진인은 감히 숨도 크게 못 내쉬고 엎드려 말했다.

    “강왕비마마께서 그 물건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나중에 빈도에게 몇 번 더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는 항상 왕부의 희첩들이 병이 났습니다…….”

    이번에는 강왕의 안색까지 변했다.

    ‘그 미련한 계집이! 내 진작에 그 여자를 내쫓아 버렸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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