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78)화 (378/385)
  • 378화. 누구의 사람인가

    문과 창문이 꽁꽁 닫혀 있어 행궁의 편전 안은 어두컴컴했다. 

    어떤 그림자 하나가 허리를 굽히고 제사상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호 공공, 밤새 난리도 아니었는데 배고프시지요? 집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좀 가져왔으니 아직 안 바쁠 때 얼른 배를 채우세요.”

    호은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의심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소희?”

    “맞아요!”

    소희는 접시를 꺼내 하나하나 놓고 빙그레 웃으며 먹으라고 청했다.

    호은은 웃음기 없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들어왔나?”

    황제는 호은이 불러낸 것이었다. 비록 자객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사안이 중대했기 때문에 호은은 여전히 갇혀있었다. 바깥에서 지키는 사람은 정국공의 사람인데 외부인이 어찌 들어올 수 있었을까?

    소희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호은은 결국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앉았다.

    소희는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지금 술을 마시는 것은 좋지 않으니, 차로 술을 대신하시지요.”

    호은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다 마시길 기다렸다 소희가 말했다.

    “호 공공께서는 제가 드린 차에 독이 들어있을까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호은은 동작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또 웃었다.

    “물론, 차에 독은 없습니다.”

    호은은 눈살을 찌푸리고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집었다.

    그가 거리낌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소희가 갑자기 말했다.

    “호 공공께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군요. 결국 죽게 될 거란 걸 알고 계시는 거죠?”

    호은이 음식을 삼키고 말했다. 

    “폐하께서 자객에게 당하셨으니 내가 져야 할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하지 않겠나. 태후께서 날 죽이시더라도 나는 아무 원망도 없네.”

    소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무성의하게 칭찬했다.

    “호 공공께서는 정말 충성스러우시네요.”

    호은은 소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묵묵히 먹고 마시기만 했다.

    소희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건 태후께서 공공을 죽이는 게 아니라 강왕이 공공을 죽인다는 의미였습니다.”

    호은이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희는 계속 웃고 있었다. 

    “공공께서는 어떻게 죽을 작정이세요? 음독? 아니면 자결? 혹시 무슨 증거라도 가지고 있나요? 때마침 강왕부를 가리키는 건 아니고요?”

    호은은 더는 식욕이 없었다.

    “자네는 강왕부 사람인가?”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강왕부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공공께서 누구의 사람인지가 중요하지요.”

    소희는 찻잔을 탁자 위에 놓고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공공께서 폐하의 곁에 이렇게 계시는 동안 저는 줄곧 공공이 강왕부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지요. 호 공공, 제가 정말 공공을 과소평가했군요.”

    이 말을 듣고 호은은 마음을 놓았다. 

    “자네, 강왕부 사람은 아니군.”

    소희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가 몇 마디 말로 날 떠본다고 해서 나한테서 무슨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착각은 하지 말게. 난 황실의 노비일세. 죽고 사는 건 당연히 내 주인께서 결정할 문제야.”

    “오, 황가(皇家)란 말이군요!”

    소희가 빙그레 웃었다. 

    “호 공공은 폐하께 딴마음을 품고 계셨군요. 강왕부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황가인가요? 제가 맞춰볼게요…… 평왕부?”

    호은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셨다. 

    소희는 웃으며 공수했다.

    “정말 감탄을 안 할 수가 없네요. 죽을 걸 알면서도 여전히 이렇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니요. 저는 정말 발끝도 못 따라가겠습니다.”

    호은은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몸인데 말을 더 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차를 마셨고 소희가 또 말했다. 

    “호 공공께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마음속에 분명 어떤 믿음이 있으신 거군요.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시다면 제가 한두 개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몇 년 동안 같이 일한 정이 있지 않겠어요.”

    호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희는 몸을 살짝 기울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공께서 죽은 뒤에 원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실 수 있으신가요?”

    호은은 잠시 침묵을 지켰지만, 여전히 거절하는 모양새였다.

    소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호 공공께서 이리 굳건하시다면 저도 강요할 순 없지요. 어차피 강왕부는 쓰러질 거예요. 그들이 쓰러져야 선대 황제와 선대 태자가 저승에서 편히 쉬실 수 있으니까요.”

    이 말을 한 뒤 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그리고 소희가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뒤에서 소희의 바람대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 * *

    루안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그가 씻고 있는데 한등이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희가 왔습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해라.”

    소희는 막사로 들어와 몸을 굽히며 인사했다. 

    “넷째 공자님.”

    “어떤가?”

    루안이 즉시 물었다.

    소희가 대답했다.

    “마님의 예상이 다 맞았습니다. 단 한 가지, 호은이 죽으려 하는 건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선대 황제의 은혜 말인가?”

    “예.”

    루안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가 헛되이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네.”

    소희는 그에게 깊이 몸을 숙여 인사했다. 

    “소인이 그분을 대신해서 넷째 공자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 * *

    루안은 막사에서 나와 경관걸을 찾아 영패(*令牌: 군령패)를 들고 범인을 가둬둔 곳으로 들어갔다.

    강세안은 꽁꽁 묶여 바닥에 누워있었는데 아주 딱해 보였다. 그의 정신은 맑아 보였지만, 표정은 무감각해 보였다. 

    루안이 몸을 숙여 그와 눈을 맞췄다. 

    강세안은 눈을 슬쩍 움직여 그의 눈빛을 피했다. 

    루안이 한숨 쉬며 말했다.

    “내가 자네 딸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이렇게 큰 위험을 무릅쓴 것인가?”

    강세안은 말이 없었다.

    “자네, 이렇게 가다가는 틀림없이 죽게 될 거네. 그럼 자네 딸은 어떡하나? 그 아이는 강왕부에 속해 있어 강왕부와 함께 멸망하게 될 테지.”

    강세안은 아직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루안은 알아차렸다. 

    “보아하니 평왕부에서 자네 조건을 수락해 줬나 보군.”

    강세안은 깜짝 놀라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평왕부말인가?”

    루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이상할 게 있나? 그들도 다른 사람을 감시하는데 나라고 그들을 감시하지 않을 것 같나?”

    “…….”

    루안이 계속 말했다.

    “내 짐작에 소현주는 지금 처지가 좋지는 않지만, 목숨을 걱정할 정도는 아닐 걸세. 그런데도 자네가 이렇게 큰 위험을 무릅썼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지. 

    첫째는 평왕부에서 자네에게 소현주의 목숨이 안전하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든 거야. 내가 구해주지 않으니 자네가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겠지. 둘째는 자네의 그 딸이 마음속으로 부귀영화를 바라는데 자네는 그렇게 해줄 능력이 없으니 평왕부 쪽에 희망을 건 것일 수도 있겠지.”

    강세안의 반응을 보고 루안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루안은 가볍게 웃었다.

    “안타깝지만 이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네. 첫 번째에 대해서는 세자비가 아주 훌륭한 수단을 썼지. 그녀가 지금 딸을 차갑게 대하는 이유는 강왕세자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걸세. 세자비가 내버려 둘수록 소현주는 더 안전해지겠지. 

    두 번째는 평왕부에서 황권 다툼의 화근을 철저히 없애버리려 할거라는 점이네. 강왕부가 전멸하면 평왕부에서 어찌 소현주를 보호한단 말인가? 신분을 바꾸어 주기라도 한다고 했나? 자네가 죽으면 아무도 이 거래를 모르는데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겠나?”

    루안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속은 걸세.”

    강세안은 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잠시 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 * *

    이틀 후 이른 아침, 호은은 편전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지온은 대장공주와 황제를 병문안하고 있었다.

    류명주는 손에 힘이 빠져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쳤다. 숟가락이 약그릇에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죽었다고? 어떻게 죽었느냐?”

    대장공주가 진노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지켰단 말이냐?”

    소식을 전하러 온 매고고가 말했다.

    “차에 독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지키고 있던 금군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채 태의를 부르기도 전에 독이 퍼져 죽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랬단 말이냐? 알아냈느냐?”

    매고고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호은이 죽기 전에 땅바닥에 글자를 썼는데…….”

    “무슨 글자?”

    “강(康)이라는…….”

    ‘강왕의 강(康)?’

    대장공주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본궁이 가서 봐야겠다!”

    류명주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지온이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안 가요?”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벌써 죽었는데 뭐 좋은 거라고 보러 가겠습니까.”

    류명주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약사발을 내관에게 건네주며 지시했다.

    “약이 식었으니 새로 달여 오너라.”

    “예.”

    내관이 물러가고 나자 안에는 그녀들 두 사람만 남았다. 

    류명주가 천천히 물었다.

    “지온 소저, 폐하께서는 아마 못 일어나시겠지요?”

    지온이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류명주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미 지온을 지씨 부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류명주가 이렇게 예전 이름을 부르니, 마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예전의 류명주는 그저 장락지(长乐池)의 기녀일 뿐이었다. 여러 남자 앞에서 웃음을 팔았고, 사람들 앞에서는 먼저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때의 류명주는 자신이 궁에 들어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남자를 모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며 공손하게 첩여마마라고 부르게 될 줄도 몰랐다. 

    ‘일 년 만에 이 좋은 날들이 끝나 버리는 걸까?’

    지온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온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마마, 후회하십니까?”

    류명주가 담담하게 웃었다.

    “나는 원래 부평초 같은 사람이니 가는 데까지 떠다니면 그만이지요.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도 언제 짓밟힐지 모르는 삶이었는데, 일 년 동안이라도 호강하면서 살았으면 오히려 운이 좋은 것 아니겠어요.”

    지온이 감탄하여 칭찬하며 말했다. 

    “마마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류명주는 지온의 눈빛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류명주는 수건을 들어 황제의 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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