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71)화 (371/385)
  • 371화. 있어선 안 되는 사람

    유신지는 역시 둘러대는 솜씨가 단연 일등이었다.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군, 루안, 이해해 주게.”

    루안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지는 코를 만지작거리고 무안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양쪽으로 떨어져 각각 입구를 지키고 섰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싸우지 않자 매우 유감스러워했다.

    ‘유신지는 황제의 신임도 얻었고 뒷배경도 있는데 왜 이렇게 담이 작은 거야?’

    다른 한편에서는 강왕세자가 강왕의 막사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강왕은 문객과 대국 중이라 고개도 들지 않고 느릿느릿 말했다.

    “내일 있을 대제(*大祭: 대제사, 큰 제사)는 괜찮겠느냐?”

    이것은 그가 다친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가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강왕세자는 그의 관심에 내심 놀랐다. 

    “예, 소자의 상처는 이제 괜찮습니다.”

    하지만 강왕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내일 쓸데없는 일을 저질러 폐하를 난처하게 하지 마라.”

    강왕세자의 얼굴에 띄워져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부왕은 내 상처에 관해 물은 것이 아니고, 그저 내가 사고를 쳐서 여섯째의 체면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어 물은 것이란 말인가?’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를 억누르며 다시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강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가리켰다.

    “앉아라.”

    강왕세자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앉아서 그들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제전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고 태후가 눈물을 훔치며 대장공주를 위로했다.

    “내일도 제례가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게. 부마가 그리 자네를 아꼈는데 자네가 우느라 몸이 상하면 저승에서 슬퍼하시지 않겠나.”

    대장공주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올케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그녀는 또 고개를 돌려 황후에게 말했다.

    “태후를 모시느라 네가 수고가 많구나. 태후께서 너무 많이 우시게 하지 말거라.”

    “예.”

    황후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자.”

    대장공주가 말했다. 

    “내일은 아마 많이 피곤할 것이야, 자네들도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하게.”

    “예.”

    태후와 사람들을 보내고 대장공주는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을 천천히 닦았다. 그녀의 표정은 점차 차가워졌다. 

    “우리도 그만 돌아가자.”

    지온이 대답했다. 

    “예.”

    다 같이 제전을 빠져나올 때 지온은 일부러 한 걸음 뒤떨어져 루안과 동행했다.

    “태후마마께서는 괜찮으신 거요?”

    루안이 물었다.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좋지 않아요.”

    루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온이 말했다.

    “사실 태후께서는 4년 동안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어요. 마마께는 선대 황제가 승하하고 선대 태자가 죽은 게 모두 아직 진행 중인 일일 거예요. 이런 슬픔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어요?”

    루안은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한참 있다가 그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 감정을 알고 있다오. 기억 속에는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사라져버렸지. 사고가 일어나고 다음 날엔 하루하루 날짜를 세어가며 떠올려봤다오. 하루 전에는 그들과 함께 끊임없이 토론했었고 이틀 전에는 죽을힘을 다해 논쟁했었지. 3일 전에는 함께 바다로 나갔고, 4일 전에는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시를 지었고, 5일 전에는 서각(书阁) 안에서 남들 몰래 공을 차고 놀았소…….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고 그저 추억이 되어버렸지. 영원히 메울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게 된 거요.”

    지온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애해각에 난리가 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옥종화였던 지온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다에 빠져버렸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땐 그 기억과 현재 사이에 이미 긴 시간의 공백이 놓여 있어 슬픈 감정이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온은 충분히 루안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시간의 홍수는 세차게 흐르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휩쓸고 가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만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지온은 루안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농담을 하며 기분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온은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다.

    “내가 서각에서 공을 차는 당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어쩐지 당신이 가지도 않고 계속 공을 차더라니!”

    루안은 지온의 바람대로 웃었다.

    “당신이 처음 훔쳐볼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 서각 창턱에 갑자기 화분이 나타나더니 그 뒤에 바로 당신이 숨어 있더군.”

    지온이 기억을 떠올렸다.

    “맞아요, 당신이 그러는 건 처음 봤어요. 정말 그때 딱 한 번이네요. 난 당신이 수상 축국(水上蹴鞠)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그의 가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땐 나한테 보여주기 싫었나 봐요. 이제는 나한테 봐달라고 부탁해야 할 텐데.”

    막사로 빽빽한 주위를 군사들이 오가며 순찰을 돌고 있었다.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도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 루안은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그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

    “양갓집 소년을 훔쳐보다니 참으로 법도를 잘 아는 아가씨군.”

    지온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양갓집 소년들은 아마 내가 보러 가주기를 간절히 바랐을걸요?”

    “…….”

    침묵하던 루안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볼 필요 없소, 나만 보면 되오.”

    “지금은 많이 봐서 별로 흥미롭진 않아요.”

    말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루안은 인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긴 선대 황제의 무덤인데, 너무 경박하지 않은가!

    루안은 뭔가 말을 하려다 갑자기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왜 그래요?”

    지온이 루안을 바라보니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루안은 한참을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일이 좀 생겨서 내가 가서 처리해야 할 것 같소. 당신은 얼른 대장공주마마께 돌아가시오. 되도록 밖에 나오지 말고 나올 때는 꼭 장모님과 함께 나오시오.”

    ‘왜 이렇게 진지한 거지? 무슨 일이 생겼나?’

    지온이 미처 물어볼 새도 없이 그는 황급히 가버렸다.

    * * *

    루안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한등을 불렀다. 

    “강세안은?”

    한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히 경성에 있겠지요. 제가 이씨한테 잘 감시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시 확인해봐. 당장 경성으로 사람을 보내서 강세안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봐.”

    “예.”

    한등은 서둘러 일을 보러 갔다.

    루안은 한밤중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밖에 나가 돌아다녔지만, 애석하게도 그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루안은 마지막으로 유신지를 만났다. 유신지는 행궁에서 나와 거들먹거리며 인사를 했다. 

    “루안, 아직 안 자고 있었나?”

    루안은 그를 쓱 보고는 여전히 길가의 돌 위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신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앉을 곳을 찾아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한밤중인데 안자고 뭐 하는 건가?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렸군, 이렇게까지 진심인가?”

    루안은 자신의 안색이 창백한 것은 독약에 몸이 침식되었기 때문이라 천천히 좋아질 거라고 해명할까 했지만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폐하는 괜찮으신가?”

    유신지가 웃으며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지금 류 첩여가 모시고 있는데,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루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일이 제례인데, 그런…….”

    유신지가 손을 내저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닐세, 그저 폐하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야.”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그는 강왕부 출신의 황제가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황족의 인재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나서 루안은 오히려 황제를 좀 더 용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황제는 그 당시의 일과 무관했고 본성이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들 도토리 키재기이긴 했지만, 그나마 그가 가장 황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자네 뭘 기다리는 건가?”

    유신지가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았다.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나?”

    루안이 말했다.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네. 내가 잘못 본 거였으면 좋겠군.”

    안타깝지만 그럴 확률은 아주 희박했다. 루안은 한 번이라도 봤던 사람, 들었던 소리, 맡아본 냄새를 전부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한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공자님!”

    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등이 그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루안의 표정이 확 변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이씨한테 이동하라고 해라. 가게 쪽도 마찬가지고. 만일에 대비야 해.”

    한등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소인이 이미 이동하라고 말해두었습니다.”

    루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신지를 바라보았다.

    유신지는 그가 쳐다보자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왜 그러나?”

    루안이 말했다.

    “자네도 조심하게. 주변에 사람을 좀 데리고 다니고. 여기는 안전하지 않네.”

    그러더니 루안은 그냥 가버렸다. 

    유신지는 영문도 모른 채 루안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무슨 소린가? 말을 제대로 해줘야 할 거 아닌가!”

    유신지는 투덜대며 되돌아갔다.

    ‘루안, 이 자식은 정말 갈수록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구먼. 무슨 꿍꿍이수작을 꾸미는지 모르겠네. 안전하지 않다고? 금군 수비병이 이렇게 많은데 안전하지 않을 리가 있어? 북양왕가가 대문을 활짝 열고 북방의 민족을 중원으로 들이지 않고서야…….’

    그는 갑자기 놀란 듯 몸을 움찔하더니 우뚝 멈춰 섰다. 

    “설마?”

    유신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그래도 루씨 가문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 더구나 북양은 최전선이라 그런 짓을 하면 자기 집이 제일 먼저 박살이 나지 않겠는가? 그럼 대체 무슨 일일까? 그가 부하들에게 이동하라 한 것은 누군가가 노리고 있다는 뜻인가?’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 사인(舍人).”

    유신지는 한창 생각에 빠져 있다가 느닷없이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통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 재상이었다. 

    “자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전 재상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나?”

    유신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전 재상이셨습니까, 하관이 방금 루 통정과 잠깐 대화를 하였는데, 마음이 불안해져서 그랬습니다!”

    전 재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자네를 위협했나? 그래서 두려운 것인가?”

    유신지가 이렇게까지 쉽게 루안에게 놀란다면, 루안을 쓰러뜨리는 건 말해 뭐 한단 말인가?

    하지만 유신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정에서 정정당당하게 우열을 가리는 것이라면 당연히 하관도 두려워할 것이 없지요. 하지만 재상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북양왕가 출신이라 활을 잘 쏘고 군마도 몰 줄 아는 사람입니다. 타고난 천성대로 굴면 문약한 선비인 하관으로서는 솔직히 조금 두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

    전 재상은 그의 말을 듣고 북양왕부의 용맹스러운 가풍이 떠올랐다. 

    ‘만약 루안이 이 자리에서 사람을 때리려 했다면, 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무력이 강한 사람이 이렇게 분해하며 참고만 있었겠는가? 무슨 암살을 하겠다는 둥 협박을 한 건 아니겠지? 하긴 루안이 예전에 형부의 낭중으로 있을 때 뒤로 손을 써서 죽인 사람이 꽤 많긴 했지…….’

    전 재상은 하늘이 어두컴컴한 것을 보고 내심 당황하며 말했다.

    “됐네, 내일은 대제가 있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시간이 없을 거네. 분명 피곤할 테니 얼른 가서 자도록 하게.”

    유신지는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인 듯 대답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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