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제사
집으로 돌아온 후 지온은 이 일을 루안에게 알리고 물었다.
“내 생각엔 양어머니 생각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루안이 지온을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지온은 잠시 멍해졌다.
“설마 벌써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루안이 말했다.
“물론이오. 황권에 맞설 수 있는 건 오직 황권밖에 없지. 신하가 하면 그건 황좌의 찬탈을 도모하는 것밖에 안 되오. 나도 평왕부를 생각하고 몇 년간 지켜보긴 했지만, 별로 믿을만한 것 같지는 않소.”
“왜요?”
“잘 모르겠소, 그냥 직감이오.”
루안의 직감은 늘 정확했기 때문에 지온도 덩달아 걱정이 되었다.
* * *
황제는 격일로 청녕궁에 문안을 갔다. 태후는 그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물었다.
“태후마마, 왜 그러십니까? 짐이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요, 황상은 참 선한 분이시지요.”
태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왠지 모르게, 혹여 오랫동안 아파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꾸 옛일이 생각나는구려. 어젯밤에는 선대 황제와 근이 꿈을 꿨습니다.”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어머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아바마마와 형님은 하늘에서 잘 계실 겁니다. 어머니는 좋은 생각만 하세요.”
“황상의 말이 맞소, 그런데 나는…….”
태후는 또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황제는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 비슷한 위로의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왕 상궁이 입을 열었다.
“선대 황제 폐하의 기일이 곧 다가오는데 폐하께서는 올해 황릉에서 제사를 지낼 생각이십니까?”
황제가 이 말에 비로소 깨달은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아바마마께서 꿈에 나타나신 것은 아마 어머니를 뵙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올해 제례를 좀 더 성대하게 치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태후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황상이 너무 곤란해지지 않겠소?”
황제가 얼른 대답했다.
“곤란하다니요? 짐도 아바마마와 태자 형님이 그립습니다. 이따가 짐이 예부의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같이 황릉에 가서 제사를 지내시지요.”
* * *
선대 황제의 제사는 사소제(四小祭) 중의 하나였는데 평년에는 관리를 파견하여 예를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올해는 황제가 친히 가기로 했기 때문에 경성은 한동안 부산스러워졌다.
황제와 태후가 전부 간다는데 종실에서 안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조정 관료들 역시 따라가서 제사를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이 행차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정사당에서 누군가 불평했다.
“특별한 일도 없는데 왜 갑자기 제사를 지내러 간다는 겁니까? 요 몇 달 동안 할 일도 많은데 입추(立秋) 후에 가도 되지 않습니까!”
“태후께서 병이 나셨다고 하네. 선대 황제가 생각난다고 하셔서 폐하께서 허락하신 걸세.”
“역시 그랬군요. 하지만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 거 아닙니까…….”
상용이 때마침 당직실에서 나오다가 이 말을 듣고 꾸짖었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지금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을 부적절하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관리들은 즉시 입을 다물고 예, 예 하고 대답했다.
사실 상용도 짜증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일 년 내내 이딴 일로만 바빴다. 하지만 정사당은 그렇지 않았다. 정사당은 전국의 정무를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루가 24시간만 있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만약 이것이 황제의 엉뚱한 제안일 뿐이었다면, 상용은 벌써 돌아가자고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후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태후는 이제 겨우 반백이 넘어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4년 전의 그 고난을 겪고 나서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태후는 몸에 생기가 없이 늘 골골거렸다.
상용은 마음이 약해져 바로 동의했다.
상용은 태후가 모든 걸 내려놓고 편안하게 노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강왕 쪽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사람을 시켜 행차 준비를 했다.
하지만 강왕세자는 루안을 만나자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네 생각에는 여섯째가 대체 왜 그러는 것 같나? 이제 겨우 7월인데 황릉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니, 원래 입추 이후에 가는 거 아닌가! 난 이제 겨우 회복하여 몸이 아직 허약한 상태라 온종일 무릎을 꿇고 있으면 너무 힘들단 말일세. 설마 그 생각을 하고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
침묵하던 루안이 말했다.
“태후께서 선대 황제의 꿈을 꾸셨답니다. 폐하께서 효성이 지극하셔서 황릉에 제사를 지내러 가시는 겁니다.”
강왕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섯째는 시치미를 잘 떼지. 태후가 병이 난 이유를 여섯째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정말로 효심이 지극했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루안은 이 말을 듣고 웃었다.
‘그야 그렇지.’
“세자 전하 좀 참으십시오. 이런 말은 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됩니다. 강왕께서는 지금의 폐하께 아주 만족하고 계십니다. 세자 전하께서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도리어 화가 될 겁니다.”
강왕세자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저 이러한 상황이 달갑지 않을 뿐이었다.
“황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네. 상소문의 결재까지 다른 사람한테 판단해 달라고 한다고 들었는데 부왕께서는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드신다는 건지 모르겠군.”
루안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그런 장점을 가지고 계시니 좋으시겠지요.”
‘그게 장점이라고?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것인가?’
강왕세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루안은 그를 방해하지 않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강왕세자가 분개하며 책상을 내려칠 때쯤 루안이 말했다.
“지금은 예전과는 다릅니다. 아직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을 때는 전하께서도 조력자가 필요하셨을 겁니다. 물론 일을 잘하면 잘할수록 좋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세자 전하께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강왕 전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세자께서는 이걸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강왕세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기분도 아주 언짢아졌다.
“알겠네.”
루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좀 계시다 나오십시오.”
“알겠네.”
강왕세자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냉소를 그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권력욕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말 잘 듣는 꼭두각시를 찾은 것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아버지는 여섯째가 못할수록 만족스러워하고 오히려 나는 하는 일마다 눈엣가시로 여기시는 것이겠지.
예전의 나는 너무 순진해서 부왕의 후계자가 될 거라고 착각했지. 허허, 권력을 쥐고 있는 제왕이 어디 늙어서 죽기 전까지 권력을 놓은 적이 있던가? 아버지가 제왕은 아니지만, 지금 아버지의 마음가짐은 제왕과 다를 바가 없구나.’
자신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 했다. 본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강왕세자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왕부로 돌아갔다.
* * *
제사를 지내러 가는 날, 루안은 황제를 모시고 따라갔다.
지온은 원래 갈 필요가 없었는데, 대장공주가 가겠다고 해서 그녀를 보살피러 따라갔다.
능산(*陵山: 황릉이 있는 산)에 가까워지자 대장공주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4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오라버니에게 제사를 지내러 오지 않았다. 그립지 않았던 게 아니라 너무 마음이 아파서 차마 올 수가 없었어!”
지온이 그녀를 위로했다.
“선대 황제께서 하늘에 계신다면 분명히 어머니 마음을 아실 거예요.”
돌아가신 오라버니와 조카, 그리고 그 일에 연루되었던 부마를 떠올리며 대장공주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 * *
도착할 때쯤 되자 대장공주는 다시 몸단장을 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황릉 근처의 행궁은 크기가 크지 않아서 태후, 황제, 비빈 정도만 묵을 수 있었다. 대장공주는 지위가 높아서 작은 후원도 하나 배분받았다. 그 외의 왕족들과 조정 대신들은 모두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잘 수밖에 없었다.
짐을 푼 뒤 지온은 대장공주를 따라 먼저 부마에게 제사를 지내러 갔다.
대장공주가 생을 마치면 부마와 함께 이곳에 묻힐 예정이었다.
오랫동안 옛일을 떠올리지 않았던 대장공주는 조금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지온을 데리고 부마에게 향을 올리며 말했다.
“부군, 제가 나이가 들면 의지할 데가 없을까 봐 걱정했던 것 알고 있습니다. 여기 보세요. 내가 찾은 딸이에요. 정말 유능하고 효성이 지극하답니다. 이 아이가 있으니 이제 안심하세요.”
지온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양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 온이가 살아있는 한, 백 년이 지나더라도 어머니를 잘 모시겠습니다.”
대장공주는 잠시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또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부마께서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셨어! 잠깐 갔다가 곧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느냐. 아아, 부군은 나한테 말 한마디조차 남기지 못했어!”
지온은 조용히 그녀를 안고 그녀가 처량하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부마와 대장공주는 정이 깊었다고 들었다. 중년에 이르러 부부가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원통하구나!”
대장공주가 울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몇 년 동안 내가 조방궁에서 두문불출했던 것은 그저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둔 것일 뿐이었다. 오라버니의 원수도 갚을 수 없고, 근이의 원수도 갚을 수 없고, 부마의 원수는 더더욱 갚을 길이 없으니 달리 뭘 어쩌겠느냐. 날 때부터 황족이고 제국의 가장 존귀한 공주인 내가 어찌 그저 문을 닫아걸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단 말이냐!”
지온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자신을 원망하지 마세요. 어머니도 어쩔 수 없으셨잖아요. 황권 분쟁을 어머니 같은 공주께서 어찌 좌지우지할 수 있었겠어요? 그저 어머니께서 사내가 아닌 것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지요. 그랬으면 저들이 이렇게 소란을 피울 여지가 어디 있었겠어요.”
“그래! 내가 사내였다면 벌써 뒤집어엎고 그 자리에 올라갔겠지!”
대장공주가 이를 갈며 말했다.
“지금처럼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었겠느냐!”
밖에 있던 매고고가 갑작스럽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다.
“누가 왔습니다.”
대장공주는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 문 앞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태후가 황제와 함께 왔다.
“올케!”
대장공주가 입을 열자 눈물이 또 흘러내렸다.
태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가슴 아픈 표정으로 말했다.
“내 자네가 여기 있을 줄 알았네. 부마가 돌아가시고 4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나…….”
올케와 시누이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황제는 곁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부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온과 황후도 각자 앞으로 나와 한참 대장공주를 위로했다.
제전(祭殿) 안은 우는 소리로 가득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안은 때마침 유신지와 마주쳤다.
유신지는 황제를 모시고 왔다. 루안은 마침 황제에게 보고할 것이 있어 태후가 제전에 갈 때 황제도 같이 간다는 내관의 말을 전해 듣고 이곳에 왔다.
루안을 본 유신지는 열정적으로 인사했다.
“루안, 오랜만일세!”
루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아침에 봤잖나.”
“…….”
침묵하던 유신지가 말했다.
“우리 같이 한잔한 지도 오래됐구먼. 시간 되나?”
루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황릉에 제사를 지내러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부적절하지 않나?”
이런 둘의 기척에 주위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며 관심을 집중했다.
‘어, 싸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