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69)화 (369/385)
  • 369화. 궁중의 소식

    “윤아?”

    소현주는 방금 받은 냉대를 떠올리고 훌쩍거리며 그에게 따졌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버지는 나를 싫어하고 어머니도 나를 예뻐하지 않아요. 엉엉…….”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윤아,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단다. 너는 크면 클수록 생김새가 그 사람이랑 달라질 거고, 그 사람 마음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겼다면 그는 바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 테지. 그래서 이 아비가 네 안전을 위해 급하게 너를 데려가려고 했던 거고. 네가 죽을 뻔했던 건 알고 있느냐?”

    소현주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란 사람은 벌써 너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중에 또 다른 일이 생겨서 잠시 손을 쓰지 않고 있는 것뿐이야. 그가 요 며칠 동안 너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렴. 너를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는 것 같지 않으냐?”

    소현주는 좀 전의 강왕세자의 태도를 떠올려보았다. 아이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이 말을 거의 믿고 있었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었다. 죽음이란 것은 겨우 열 살짜리 아이에게는 아주 멀리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엄청난 공포감이 밀려왔다. 

    소현주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상……상처는 아프지 않아요?”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벌써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소현주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돌을 걷어찼다. 마침내 소현주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날 또 데리고 갈 거예요?”

    마노가 즉시 말했다.

    “당연하지. 네가 강왕부에 남아 있으면 아버지가 안심이 안 된단다.”

    소현주는 요즈음 받았던 냉대를 떠올렸다. 신분이 탄로 난 후로, 자신은 더 이상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현주가 아니었다.

    ‘이런 대우를 받으며 남느니 차라리…….’

    아이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좋아요.”

    * * *

    지온이 과자가게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소희가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부인.”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진했다면서요, 축하해요.”

    소희가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워했다.

    “다 대인들 덕분입니다.”

    황제는 호은에게 의심을 품고 그 대신 소희를 중용했다. 그는 이미 승원궁의 내관 중에서 두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지온이 물었다.

    “궁 안의 상황은 어때요?”

    루안은 현재 ‘신임’을 잃은 상태라 황제 주변의 소식은 소희에게서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소희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병이 나셨습니다.”

    “네?”

    지온이 관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요?”

    소희가 말했다. 

    “지난번에 강왕을 만난 이후로 태후마마께서 병이 나셨습니다. 약을 계속 드시는데도 영 차도가 없으십니다.”

    지온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작년 말부터 태후는 대장공주와 왕래하며 보양에 신경을 많이 써서 한동안 병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복수를 하려면 본인이 먼저 무너져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일부러 말을 전해 주는 이유가, 태후마마의 병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인가요?”

    소희가 말했다. 

    “소인이 지난번에 우연히 호 공공과 태의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들의 말에 숨겨진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아주 공교롭게도 태후께서는 강왕을 만나고 난 뒤에 병이 나셨지요.”

    지온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궁에 들를 방법을 한번 생각해볼게요.”

    소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연이어 다른 소식들을 전한 뒤 위장을 하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지온은 잠시 앉아 있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문득 떠오른 듯 주인에게 물었다. 

    “강세안은요?”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 계속 두는 건 아무래도 불편해서 상처가 좀 회복된 후에 성 밖으로 보냈습니다.”

    지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저녁이 되어 대장공주는 태후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펄쩍 뛰었다.

    “내 진작부터 그 늙은 영감태기가 가만히 있지 않을 줄 알았어. 이제는 형수까지 죽이려는 게야!”

    지온이 말했다.

    “어머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얼른 의술이 좋은 여의원을 찾아보세요. 우리 궁으로 병문안을 가요.”

    대장공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매고고에게 지시했다. 

    “빨리 가서 찾아보아라.”

    “예.”

    대장공주와 상의를 마친 지온은 방으로 돌아왔다. 지온이 방으로 들어서기 전, 루안과 한등이 대화하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 사람이 강왕부로 갔다고?”

    “예.”

    “어떻게 잠입했지?”

    “그 사람 말로는 인맥이 있답니다.”

    루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를 잘 감시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등이 돌아간 후, 지온이 물었다. 

    “누구 얘기를 한 거예요?”

    “강세안.”

    루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당신이 오늘 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물어봐 준 덕분이오. 이참에 확인해보니 뜻밖에도 강세안이 강왕부에 잠입했다고 하더군.”

    지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 강왕부에 잠입할 수 있을 만한 인맥이 있었다면 애초에 잡히지도 않았을 거예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이오. 대체 누가 도와줬는지 모르겠소.”

    * * * 

    다음날, 대장공주는 지온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갔다.

    대장공주가 청녕궁에 도착하자 태후는 역시 침대에 누워있었다. 태후는 대장공주가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를 썼다. 

    대장공주가 얼른 그녀를 말렸다.

    “올케, 그냥 편히 누워 계세요.”

    태후가 다시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늙으면 영 쓸모가 없네. 전에는 더위를 좀 타는 정도였는데 올해는 그만 병이 낫지 뭔가.”

    대장공주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리더니 뒤에 있는 지씨 가문의 대부인인 정씨 부인을 보았다.

    “마침 온이의 어미가 올케가 자주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네요. 이 사람이 일찍이 명의한테서 안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길래 제가 올케한테 한 번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정씨가 웃으며 인사했다.

    “소첩 그저 조금 할 줄 아는 것뿐입니다. 태후마마께서 불편해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눈치를 채고 웃으며 지시했다.

    “그래, 좋지.”

    대장공주가 분부했다. 

    “왕 상궁, 다들 물러가라고 하게.”

    왕 상궁도 눈치를 채고 바로 사람들을 전부 내보냈다. 

    궁전의 문이 닫히자 태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봉접, 자네 뭔가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대장공주가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일단 조사해봐야지요.”

    정씨는 의술 방면에 정통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객 출신이었기 때문에 독살 방법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정씨는 태후의 맥을 짚고 방안을 뒤적거렸다. 마침내 그녀가 한 곳에 멈춰 서서 지온을 불렀다.

    “온, 이것 좀 보게.”

    지온은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있는 염주를 받았다.

    “냄새를 맡아보게. 무슨 냄새가 나지 않는가?”

    지온은 고개를 숙이고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단향(檀香) 냄새가 너무 진해서 아무것도 맡을 수 없었다.

    ‘루안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개코라 냄새가 조금만 묻어있어도 맡을 수 있었다. 

    태후가 의아해했다. 

    “이 염주에 무슨 문제가 있나?”

    정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구슬에 약이 묻어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예불하는 습관이 있으시니, 하루에 몇 번이나 세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서서히 중독되셨을 겁니다.”

    태후의 눈이 빨개졌다. 그녀는 한참 동안 욕을 했다. 

    “이 개 같은 놈!”

    자신이 이미 이런 신세로 전락했는데도, 강왕부는 자신이 몇 년 더 사는 것조차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대장공주의 얼굴 가득 노기가 서렸다. 그녀는 즉시 칼을 뽑아 들고 강왕부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마마와 양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50년 전의 오래된 사건을 규명하겠습니까? 발본색원(拔本塞源)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강왕세자는 이미 혐의에서 빠져나갔지만, 그 약은 50년 전부터 묻혀있던 것이니 증거가 없더라도 계속 붙잡고 놓지 않으면 시시때때로 세상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었다.

    태후의 화가 극에 달했다. 

    “탐욕스러운 늑대 새끼들!”

    “올케, 화내지 마세요.”

    대장공주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올케가 화병이 나서 몸이 상하면 그놈들이 목적을 달성하는 거예요!”

    “맞습니다. 마마, 이럴수록 몸을 더 돌보셔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위로를 한 끝에 태후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머니, 해독약을 만들 수 있나요?”

    지온이 물었다. 

    대부인이 대답했다.

    “만들 수 있네. 조금 이따가 약방문을 써 주겠네.”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마,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계속 아픈 척을 하십시오.”

    태후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걱정 말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니라.”

    잠시 논의한 뒤 태후는 그녀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대장공주 일행은 궁에서 나왔다. 

    마차 안에서 대장공주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 말했다.

    “온아, 구역질 나는 그 집안 인간들을 정말 더는 보고 싶지 않구나.”

    지온이 대답했다.

    “그럼 어머니께서 그들을 없애주세요.”

    지온이 너무도 가볍게 말하는 바람에 대장공주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아느냐?”

    지온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강왕부는 뿌리가 깊어서 제거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더구나 선대 황제께는 남은 친자식이 없으니 혈통상으로 볼 때 그들이 가장 가깝지요.”

    “그런데도 너는…….”

    대장공주는 마음이 복잡했다. 복수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어려우면 천천히 하시면 돼요.”

    지온이 말했다. 

    “물방울이 돌을 뚫기가 어디 쉽겠어요?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품어야지요.”

    대장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 계집애, 듣기 좋은 말은 참 잘도 하는구나.”

    어쨌든 대장공주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대장공주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다 말했다.

    “온아, 지난번에 네가 했던 말이 맞는 것 같다. 황실의 직계 혈통이 끊기고 나와 올케 이렇게 과부 두 명만이 남았는데 조정 대신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느냐? 우리를 돕는 자 중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내 생각에 우리한테는 아직 무게감 있는 조력자가 부족한 것 같다.”

    지온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말씀은…….”

    대장공주가 물었다.

    “평왕부는 어떨 것 같으냐?”

    지온이 잠시 생각해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대장공주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아닌 것 같아?”

    지온이 솔직하게 말했다.

    “평왕께서는 늘 공명정대하시고 평왕세자도 평이 안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평왕세손은…….”

    자신들과 소달이 원한을 맺게 된 원인을 따져 보면 평왕세손의 탓도 있었다. 

    처음에 자신들은 평왕별원(平王别院)에서 평왕세손이 도발한 것 때문에 소염과 원수를 맺게 되었다. 나중에 자신들은 소씨 가문과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평왕세손은 오히려 발을 빼고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평왕세손이 고의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지온은 본능적으로 그가 싫었다.  

       

    대장공주는 머리가 아팠다. 

    “그 가문 말고는 다른 데도 없단다.”

    지온 역시 탄식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한 왕조가 이백 년 넘게 이어지면, 나라를 좀먹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황실의 적통들은 여러 방면에서 아주 훌륭했다. 선대 황제든 선대 태자든 모두 영재라고 할만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명이 짧아 이렇게 대가 끊겨 버렸다.

    지온이 이런 말을 하자 대장공주도 그들을 믿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본궁이 돌아가서 다시 고민해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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