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68)화 (368/385)
  • 368화. 쓸만하다

    강왕세자가 루안을 불러 세웠다.

    “루안, 자네가 토사구팽 당하는 게 두렵지 않다고 해서 집에 계신 어머니와 부인도 아무 걱정 안 할 거라고 생각하나?”

    루안이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강왕세자는 더욱 분발하여 말했다.

    “본 세자는 자네가 어떤 처지인지 잘 알고 있네. 이미 그리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샀으니 폐하가 자네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분명 자네한테 돌을 던지겠지. 북양 쪽과도 한참 전에 등을 돌려 서로 원한을 품은 상태이지 않나.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 어머니는 도망갈 수 있겠지만, 자네 부인은 어쩔 텐가? 정말로 대장공주께서 그녀를 친딸처럼 여긴다는 것에만 기대를 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루안이 고개를 돌려 강왕세자를 바라보았다. 루안의 눈빛이 잠시 흔들린 것 같았지만 루안은 결국 말없이 뒤돌아 떠났다.

    시위가 나와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자 전하, 이대로 그냥 보내시는 겁니까? 설마 어디 가서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강왕세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말한다고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이냐? 황제가 그를 냉대하고 있는데 이런 말을 한다고 다시 신임하기라도 하겠느냐?”

    강왕세자는 남은 차를 한 모금에 털어 마시고 일어나 옷깃을 다듬었다. 그는 마음속에 모든 계획이 다 서 있었다. 

    “조급해할 것 없다. 조만간 승낙할 거야.”

    시위는 반신반의했다.

    이 루안이라는 자는 그들이 귀경한 이후, 필사적으로 세자를 괴롭혀 왔는데 어디 그리 쉽게 칼을 반대로 고쳐 쥐겠는가? 

    * * *

    하지만 며칠 후, 쪽지 한 장이 우여곡절 끝에 강왕부에 도착했다. 강왕세자는 일전의 그 시위를 데리고 광명사로 갔다.

    루안은 불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 전하,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강왕세자와 만난 다음 날, 통정사에서는 상소문 한 부를 잃어버렸다. 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죄는 결국 루안이 뒤집어썼다.

    일전에 조 통정이 한 그런 작은 장난질로는 전혀 루안을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증거의 연관성이 충분했고 통정사(通政使)마저 수수방관하는 걸 보니 조 통정의 작품 같지 않았다. 

    강왕세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 일은 본 세자가 한 짓이 맞네. 그저 자네에게 고립무원이 어떤 기분인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자네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샀어. 그들은 자네가 정말 폐하의 신임을 잃었다는 확신만 들면 복수하려 들 걸세. 그때가 되면 이렇게 작은 일로 그치지 않겠지.”

    “당신……!”

    “교(乔) 낭중이 적과 내통한 사건은 자네가 처리했지?”

    강왕세자가 말했다. 

    “그의 동생 교홍(乔宏)은 한참 전에 서남(西南)에서 떨어져 나와 그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같은 상황이었지. 작년 서남 대란 때 교홍은 전공을 세우고 칭찬을 받을 기회를 이용해 그 일을 병부에 고소했네. 지금 조정에서 사람이 필요한 참이라 그의 누명을 벗겨줄 생각을 하고 있지. 그가 다시 기용된다면 자네한테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나?”

    루안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강왕세자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소식은 아직까지는 기밀일세. 본 세자가 자네에게 성의를 보이려고 특별히 알려주는 걸세. 자네도 잘 생각해 보게.”

    그가 몸을 돌려 계단 입구로 걸어가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강왕세자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루안을 바라보았다.

    루안은 눈을 내리깔고 마치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세자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됐구나!’

    강왕세자가 다시 돌아와 말했다.

    “요 몇 년 동안 자네가 여섯째를 도와 난장판을 정리하느라 많이 힘들지 않았나? 그는 자네의 고생을 모르지만 나는 이해한다네.”

    루안의 말투는 평온했다.

    “신하로서 온 힘을 다해 군주를 보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강왕세자가 칭찬하듯이 말했다. 

    “본 세자는 정이 두텁고 의리를 중시하는 자네의 그 성격을 좋아한다네.”

    사실 이 말은 그저 루안을 안심시키려고 했던 말이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다. 루안이 이렇게까지 여섯째를 도와주는 것은 솔직히 말해 바로 그 정과 의리 때문 아니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루안의 능력으로 볼 때 여섯째는 벌써 루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을 터였다. 

    강왕세자는 생각할수록 만족스러웠다.

    루안이 멍하게 말했다. 

    “세자 전하, 하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단 한 가지, 저는 폐하를 시해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강왕세자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섯째를 죽여서 뭘 한단 말인가? 그는 내 친동생이기도 하지 않나! 다만 황제라는 자리가 그에게 너무 버거울 뿐이라는 말이지. 생각해보게. 등극한 지 벌써 4년이 지났는데 그가 무슨 성과를 냈나? 정사당조차 장악하지 못했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한가한 왕족으로 자유롭게 사는 게 낫지 않겠나.”

    루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보고 응시했다.

    “만약 정말로 그날이 오면, 전하께서 폐하를 한가한 왕족으로 살게 해주실 겁니까?”

    강왕세자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의 능력이 어떤지 자네나 나나 잘 알지 않나. 봉지를 주어 멀리 보내 버리면 그가 하늘을 뒤집을 엄두나 낼 수 있겠나?”

    루안은 한참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저는 세자 전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정말 그날이 온다면, 세자께서는 반드시 미리 제게 백지 밀서(*密旨: 황제의 비밀 명령서)를 한 통 주셔야 합니다.”

    강왕세자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그리함세.”

    지금은 무얼 승낙하든지 상관없었다. 어쨌든 아직 자신의 손에는 아무것도 쥔 것이 없었다.

    루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표정도 누그러졌다. 

    “세자께서는 지금 뭘 하고 싶으십니까? 얼마 전에 곤장을 맞은 일을 모두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꺼내자 강왕세자는 불쾌해졌다.

    “그게 다 자네 때문이 아닌가! 지금 본 세자가 이렇게 망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 부왕까지 불쾌하게 만들었네. 자네 생각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

    루안이 말했다. 

    “당연히 도광양회(*韬光养晦: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다)하셔야지요. 지금 세자 전하 앞에 놓인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에 일으켰던 일이 너무 커져서 조정 관료들과 백성들에게 이미 안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겁니다. 둘째, 전하께서 세자에게 불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좋은 인상을 만들어 나가야지, 절대 급하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문제를 생각해보면 전하께서 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자께서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사사로운 득실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자께서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잘 따르신다면 언젠가 전하께서 자연히 마음을 돌리실 겁니다.”

    루안은 몇 마디의 말로 강왕세자의 처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겠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불탑에서 비밀 모의를 했다. 그러고 나서 강왕세자는 만족스러워하며 돌아갔다. 

    어쩐지 여섯째가 그를 신임하더라니, 루안은 정말 쓸만했다. 

    루안은 불탑 위에 서서 떠나가는 강왕세자의 뒷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 * *

    강왕세자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느냐?”

    그가 고개를 돌리자 강왕이 대청 안에 앉아 손에 차를 들고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강왕세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줄곧 부왕의 훌륭한 조력자였던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경계의 대상이 된 걸까? 자신이 마치 쓸모없는 여덟째가 된 것 같았다. 

    “소자, 광명사에 가서 무비 대사의 경전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왕세자가 깍듯이 대답했다.

    강왕은 아무런 이상도 눈치채지 못하고 눈빛을 점차 누그러트렸다.

    “상황이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니 될 수 있으면 밖에 나가지 말거라. 지금 같이 한가할 때 건(建)이 공부도 좀 들여다보고.”

    “예.”

    강왕세자가 집으로 돌아오니 세자비가 아이를 가르치고 있었다.

    세손(世孙)은 이제 여섯 살이었다. 기초 공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세자비는 그에게 책을 외우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모처럼 같이 잇던 소현주는 강왕세자를 보고 한껏 움츠러들었다. 

    남동생이 달려가며 다정스럽게 그를 부르는 것을 보고 소현주도 용기를 내어 우물거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강왕세자의 눈에 혐오감이 일었다. 강왕세자는 소현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세손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현주는 고개를 떨궜지만, 감히 울지는 못했다.

    세자비는 유모에게 아이를 데려가라고 한 뒤 강왕세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 세 식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현주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유모가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소현주, 시간 끌지 말고 얼른 돌아가시지요.”

    만약 예전에 누군가가 감히 소현주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면 아마 진즉에 끌려가서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소현주는 욕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처지라 그저 우울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소현주를 데려다준 유모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소현주는 홀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집안은 조용했고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소현주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돌려 외지고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왕부는 아주 컸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이는 높은 담 근처에 도착했다. 그쪽에서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축에게서 나는 악취가 훅 느껴졌다.

    “일을 열심히 하라고, 게으름 피우지 말고!”

    관리인이 이렇게 호통치고 있었다.

    “예, 예.”

    하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 관리인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갔다. 

    소현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을 주워 던졌다.

    잠시 후, 말을 기르는 하인 복장을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담장을 넘어 소현주의 앞에 섰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그자의 눈매는 일찍이 소현주가 보았었던 눈매였다.

    사내는 아이를 보더니 기뻐하며 앞으로 걸어왔다. 

    사내의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소현주는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고 뒤로 움츠러들었다. 

    이에 사내가 멈춰 서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무슨 일 있었느냐?”

    소현주는 토할 것 같은 걸 억지로 참느라 말이 아주 거칠게 나왔다. 

    “아무 일 없으면 오면 안 되나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와도 된단다. 이 아비는 그냥 네가 걱정스러워 그렇단다.”

    소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심지어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에 본의 아니게 이 사람과 맞닥트렸을 때 소현주는 이 사람이 자신을 죽도록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밖에도 이 사람은 전혀 나무라지도 않고 자신에게 잘 지냈느냐고 물었다. 

    그때 소현주는 놀란 마음에 도망을 쳤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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