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차를 한 잔 사다
거의 한 달이나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야 마침내 강왕세자는 정상적으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강왕세자비와 함께 강왕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
길 내관이 마중을 나왔다.
“세자 전하, 세자비마마, 전하께서 지금 손님을 만나고 계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강왕세자는 대수롭지 않게 옆방에 가서 잠시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에 한 젊은 관리가 안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강왕세자가 길 내관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유 태사 댁의 대공자 아닌가? 여길 왜 온 건가?”
길 내관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당연히 전하를 만나러 오셨겠지요.”
그는 더 묻고 싶었지만 길 내관이 입을 꾹 다물고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강왕세자비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일단 아버님부터 만나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왕세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강왕을 만났고 강왕이 담담하게 물었다.
“다친 데는 어떠냐?”
강왕세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강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다시는 남에게 책잡힐 짓은 하지 말거라.”
“예.”
두 부자는 잠시 대화를 나눴고 강왕세자는 곧 강왕의 방에서 물러났다.
강왕세자비가 그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요,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강왕세자가 말했다.
“이 한 달 동안 아버지께서 내 부상에 관해 물어보신 적이 있소?”
그를 돌보는 동안 강왕세자비는 벌써 여러 번 비슷한 위로를 했던 터라 짜증이 나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것에 그만 좀 집착하세요. 아버님께서 이렇게 당신을 보호하려고 애쓰시지 않습니까? 아버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강왕세자는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돌려보내며 강왕세자비가 말했다.
“세자께서는 들어가서 쉬십시오.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강왕세자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그녀가 정원에서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손짓했다.
어디선가 암위가 튀어나와 창문을 사이에 두고 그에게 물었다.
“세자 전하, 분부할 것이 있으십니까?”
“강왕세자비를 따라가서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보아라.”
“예.”
* * *
강왕세자비는 다시 강왕에게 갔다.
“아버님, 제가 이제야 한 가지 일이 생각나 마음이 좀 불안합니다. 그 유씨 가문 대공자가 얼마 전에 정국공부의 아가씨와 약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루안이 소달을 죽인 이유는 금군을 정국공의 손에 넘기기 위해서였지요. 정국공과 대장공주의 관계는 아버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마침 루안의 부인이 대장공주의 양녀입니다.”
강왕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네 말은 그들이 정말로 등을 돌린 게 아니라는 뜻이냐?”
“그저 좀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강왕이 말했다.
“듣자 하니 루안의 부인이 원래 유씨 가문과 혼약이 되어 있었다고 하더군. 유씨 가문의 대공자가 그녀를 흠모했는데 결국 루안한테 시집을 갔지. 전부터 아내를 뺏긴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으냐. 대장공주의 부마는 이미 죽었고 자녀도 없으니 정국공부와의 관계는 진즉에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정국공의 관심도 당연히 새로운 사위 쪽으로 기울지 않겠느냐.”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강왕세자비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신 것 같으니 제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보태지 않겠습니다.”
강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주도면밀하고 세심한 편이니 평소에 담이를 많이 도와주거라. 예전에는 그래도 침착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리 경솔하게 구는지 모르겠구나.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강왕세자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강왕세자비는 자신이 시집가기 전에 정조를 잃은 일을 강왕이 따지고 들지 않는 것은 자신이 아직 쓸모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왕세자는 머리를 써서 휘어잡을 수 있었지만 강왕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이 가장 좋았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강왕세자비가 일을 끝내고 돌아가자 암위도 강왕세자에게 돌아가서 보고를 올렸다.
강왕세자의 안색이 흐려졌다.
“왜 나중에 다시 간 거지? 무슨 일인데 아까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냐?”
암위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며느리가 혼자 시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아무도 그 자리에 동석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강왕세자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부왕께서 막 돌아오셨을 때 자신은 아버지가 오씨를 탓할 줄 알고 오씨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왕은 그 문제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꾸짖었다.
요 며칠 부왕은 그를 보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지만 오씨는 상냥하게 대했다.
오씨 그 여자는 결혼 전에 정조를 잃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 남의 자식을 낳아 황실의 혈통인 것처럼 꾸몄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감히 못 할 짓이 없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애인을 버리고 강왕부로 시집온 것은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는 한낱 세자일 뿐이니, 기왕 권세 있는 사람에게 빌붙으려 마음먹은 바에야 직접 친왕에게 빌붙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자신의 부왕이 왕부 안팎에 거느린 희첩은 얼마나 많은가. 부왕은 지금껏 오는 여자를 막은 적이 없었다. 오씨는 자태가 우아한 데다 며느리이기도 하니 더욱 자극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강왕세자의 머릿속에 갖가지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화가 나서 의자를 걷어 차버렸다.
시녀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급히 들어왔다.
“세자 전하?”
강왕세자가 냉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꺼져라!”
시녀는 이미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익숙해져서 의자도 치우지 않고 나갔다.
암위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잠시 비켜서서 분부만 기다리고 있었다.
강왕세자는 왔다 갔다 하며 방을 빙빙 돌다가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그에게 물었다.
“루안이 황제의 신임을 잃어서 요즘 힘들다지?”
암위가 대답했다.
“통정사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강왕세자가 냉담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근본도 없는 것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더라니, 지금 누군들 그놈한테 돌을 던지고 싶지 않겠어? 당해도 싸지!”
일전에 그는 루안이 강왕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다만 상처를 치료하느라 당장에 달려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달라졌다.
부왕은 여섯째를 편애해서 자신이 이렇게 낭패를 보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강왕세자비는 부왕을 등에 업고 무슨 짓을 했는지 자신을 남편 취급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강왕세자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난 절대로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강왕세자는 이를 갈았다. 싸우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 * *
루안의 생활은 사실 그다지 괴로울 것도 없었다.
그 조 통정은 그가 권세를 잃은 줄 알고 소소한 방해 공작을 펼쳤으나 사실 통정사의 통솔자는 루안도 아니었다.
통정사(通政使)는 나이가 많아서 전부터 고여 있는 물처럼 평온하게 지내고 싶어 할 뿐 이런 일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루안은 평소에 업무를 잘 처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아 왔으니, 지금이라고 유달리 난처해질 것도 없었다. 그저 외부인들이 그가 신임을 잃었다고 생각해 자꾸 빈정거릴 뿐이었다.
그는 평소대로 출근하여 공무를 보고 퇴근했다. 심지어 루안은 오랜만에 광명사로 나들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무비대사를 찾아가 점을 보았다.
무비 대사의 선실(*禅室: 참선하는 방)에서 나오며 루안은 요즘 날씨가 더우니 지온을 데리고 성 밖의 별원에 가서 며칠 머무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다.
“루 통정?”
루안이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두 분께서는 무슨 용무시오?”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히려 강압적인 느낌이 들었다.
“우리 집 어르신께서 루 통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십니다.”
“미안하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거절했다.
“집에 계신 노모께서 아직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셔서 말이오.”
회색 옷을 입은 자들이 그를 놓아줄 리가 있겠는가! 그들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루안의 얼굴에 분노가 일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안, 본 세자가 자네에게 차나 한잔 사려는데 체면을 좀 세워주면 안 되겠나?”
루안이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강왕세자가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자 전하? 전하께서 주시는 차는 하관이 감히 못 마실 것 같습니다.”
강왕세자는 한 달 전에 비해 좀 수척해 보였다. 날뛰던 기세도 많이 수그러들었고 얼굴에는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뭘 그럴 필요까지 있나? 우리가 무슨 깊은 원한을 진 사이도 아니지 않나. 안 그런가?”
* * *
광명사의 선방은 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 때문에 짜증이 날 정도로 시끄러웠다.
강왕세자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루안을 바라보았다.
이런 날씨에 다른 사람들이라면 땀을 비가 오듯 흘렸겠지만, 루안의 몸에는 여전히 먼지 한 톨조차 묻어있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에 병이 났었기 때문인지 얼굴에 전혀 핏기가 없어 원래보다 좀 더 하얗게 보였다. 저쪽에 앉아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옥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얼마 전까지는 루안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미워서 꼴도 보기 싫었는데, 이제 와 선입견을 버리고 다시 보니 문득 황제가 왜 그렇게 그를 신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인물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를 자청하면 어찌 신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마침 귓가에 찻잔을 놓는 소리가 들려와 강왕세자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루안이 고요하지만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세자께서 할 말이 없으시다면 하관은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강왕세자가 웃으며 말했다.
“루안, 알고 보니 자네가 이렇게 인내심이 없었구먼. 전에는 늘 나를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해놓고 자네는 눈 하나 꿈쩍 안 하더니만, 어째, 기분이 안 좋은가?”
루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세자 전하와는 무관합니다.”
“그건 모를 일이지.”
강왕세자는 찻주전자를 들고 직접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어떻게, 본 세자가 자네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루안이 입꼬리를 치켜올렸지만, 확실히 진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강왕세자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에 우리가 서로 적대한 것은 까놓고 말해서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네. 자네는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지. 작은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폐하를 위해 갖가지 장애물들을 제거해주고, 심지어는 자네의 평판이 깎이는 것도 감수하지 않았나. 애석하게도 폐하는 자네를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네. 자네가 폐하를 위해 내 아버지께 미움을 샀는데도, 폐하는 도리어 새로운 사람을 들이고 자네의 처지를 전혀 돌아보지 않았어. 이런 사람에게 자네가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할 필요가 있나?”
그가 이렇게 길게 말을 했는데도 루안은 여전히 무관심하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집에서 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 세자 전하를 더 모실 수가 없겠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