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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362)화 (362/385)
  • 362화. 안 할 겁니다

    강왕은 찻잔을 들고 천천히 마시며 그의 핏줄이 뛰고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루 통정, 이 느낌을 아직 잊지 않았겠지?”

    극심한 통증이 오장육부에 밀려왔다. 루안은 간신히 한 차례 통증의 파도를 이겨내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작은 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이렇게 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강왕이 반문했다.

    “그래서 자네는 폐하께 그렇게 대했단 말인가?”

    루안은 이를 악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께서 제게 이 약을 먹이셨지만 이렇게 저를 협박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진해서 폐하를 도운 겁니다.”

    ‘이 말은……?’

    강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도왔다고?”

    루안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왕 전하, 천하가 폐하의 손에 맡겨졌는데 무얼 하러 돌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세자께서 폐하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는데 그건 전혀 안중에도 없으시다니 이거야말로 신하로서의 본분을 잊은 것 아닙니까!”

    말을 마친 루안은 또 심한 통증이 몰려와 가슴을 움켜쥐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말에 오히려 강왕이 굳었다. 

    강왕은 한참 동안 루안을 쳐다보다가 반문했다. 

    “자네가 이런 짓을 한 게 모두 폐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은 겐가?”

    루안은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그저 차갑게 웃었다.

    월월홍의 발작이 시작되자 마치 천만 마리의 개미가 오장육부를 갉아먹는 것 같아서 통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곧 그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땅에 엎드려 땀만 줄줄 흘렸다. 

    “전하?”

    강왕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자 길 내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왕은 앉아서 잠시 차를 마시더니 손을 내저었다. 

    “편청에 갖다 두거라.”

    “예.”

    두 명의 시위가 루안을 들어 옆의 편청으로 내던졌다.

    오후 시간이 매우 길어서 강왕은 나가서 식사를 하고 돌아와 또 다른 손님을 만났다. 

    하지만 편청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강왕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루안은 어떠냐?”

    길 내관이 보고 와서 아뢰었다. 

    “아직도 발작을 하고 있습니다.”

    강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루연의 아들답게 꿋꿋하군.”

    길 내관도 같이 웃었다.

    강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네 생각에 폐하께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으냐?”

    길 내관이 말했다.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폐하가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을 보면 저는 전하의 생각이 더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강왕은 부채 손잡이로 탁자를 두드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당초 루안이 상경하였을 때, 그는 북양왕부를 분리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황제 성격에 루안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루안을 통제하기 위해 독약을 먹이라고 비밀 명령을 내렸다. 

    후에 루안이 황제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강왕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동창이기도 했고 황제도 누군가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왕의 마음속에서 황제와 강왕부는 하나였다. 루안이 황제의 사람이라면 강왕부에 대해 불경해서는 안 됐다. 루안이 강왕부에 암암리에 손을 댄 것은 그가 황제에게 불충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하지만 루안은 오히려 자신들이 신하로서의 본분을 잊었다고 말했다.

    강왕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 * *

    황제는 미복 차림으로 왔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고 조용히 강왕부로 들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황제를 보며 강왕은 좀 불쾌해졌다. 

    ‘여섯째 놈이 루안 이 자식을 꽤나 신경 쓰고 있구나.’

    “폐하.”

    자기 집이라 강왕은 예를 올리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그저 이렇게 한마디만 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합니다. 황숙.”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고 황제는 지체 없이 물었다.

    “황숙, 황숙께서 루안을 부르셨습니까?”

    강왕은 그를 쳐다보았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앉아서 천천히 차를 마셨다.

    황제는 마음이 급해져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황숙!”

    강왕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겁니까? 내가 그를 해칠까 봐 겁이라도 납니까?”

    황제는 입술을 들썩이다 여강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루안이 소달을 죽이고 형님을 노렸으니 황숙께서 그를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강왕은 콧방귀를 뀌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황제는 강왕이 루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었다.

    강왕은 찻잔을 내려놓고 길 내관에게 눈짓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 두 명이 루안을 끌고 왔다.

    루안은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고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빨갰다. 그는 간신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앞섶은 점점이 피 얼룩이 져 있었다.

    황제는 보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강왕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황숙?”

    강왕은 바로 해독제를 먹이는 대신 그에게 물었다.

    “그가 강왕부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계시지요?”

    황제의 눈빛이 번득였다. 

    강왕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가 전에 했던 일이 모두 폐하의 뜻이었단 말입니까?”

    황제는 고개를 숙였다. 

    강왕은 분노를 억제하기 힘든 듯 갑자기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리 강왕부에서 50년 동안 3대가 심혈을 기울여 폐하를 지존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아버지와 조부에게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한단 말입니까?!”

    황제는 이미 오랫동안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강왕의 노기 어린 표정을 보고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라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다행히 그는 곧바로 현재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고 여강의 말을 되뇌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황숙의 은혜는 짐이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설마 형님이 했던 모든 일을 황숙께서 시키신 건 아니겠지요?”

    강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제는 몸을 곧게 펴고 그를 당당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조정 대신들을 한 사람씩 불러 만났습니다. 소달은 금군통령으로 경성의 관문을 장악한 사람이었음에도 형님의 말만 들었지요. 소달은 관리들의 임명까지 하나하나 형님에게 물었습니다. 

    황숙, 처음부터 당신들이 짐을 황제로 삼고 싶지 않아 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짐이 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왜 이 무대 위에 올려놓고 사람을 가지고 노시는 겁니까?”

    기세라는 것은 이쪽이 올라가면 저쪽은 내려가는 법이다. 황제가 이렇게 기세등등하니 오히려 강왕은 할 말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황제가 한 말들은 확실히 강왕세자가 했을 법한 일이었고 황제가 이로 인해 원한을 품었다고 해도 역시 비난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승원궁에 묻힌 그 비약 말입니다. 황숙께서는 정말 형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황제는 이 기세를 몰아 계속 추궁했다.

    “형님이 권력을 탐한 것까지는 그렇다 친다고 하더라도 짐을 불임으로 만들어 대를 끊으려 하기까지 했습니다. 어찌 이리 잔인할 수가 있습니까? 형님이 저한테 이렇게 하니 짐은 통령을 바꾸고 형님을 경성에서 떠나게 하려 한 겁니다. 그게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실히 지나친 처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폐하,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루안은 발작을 견디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젖어 머리카락이 한데 뭉쳐져 있었고 볼은 비정상적으로 빨갛게 들떠 있었다.

    “루안!”

    황제가 그에게 다가가 부축하려 했다. 

    루안은 손사래를 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강왕 전하.”

    그의 숨결은 약했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세자뿐만 아니라 전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이였는지와는 관계없이 지금 당신들은 모두 신하일 뿐입니다. 당신들이 폐하의 머리 위에 올라서려는 망상을 품고 있기에 저도 어쩔 수 없이 당신들을 제압하려 하는 겁니다. 조정 대신들도 당신들의 그런 망상에 동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말을 끝내자 개미들이 가슴을 파먹는 것 같은 통증이 또 밀려왔다. 루안은 땅에 주저앉아 가슴을 쥐어짜며 피를 토했다.

    월월홍이 발작을 하고 있기에 해독제를 먹지 못하면, 루안은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될 것이 뻔했다!

    황제는 다급해져서 손을 품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길 내관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폐하!”

    옥새!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옥새였다!

    황제가 강왕을 보며 말했다.

    “황숙께서는 짐이 이 물건을 원하는 줄 아셨습니까? 처음부터 당신들은 날 협박했습니다! 당신들은 날 혼자 이 도성에 버려두고 고립무원하게 만들었어요. 4년 동안 내가 혼자 잘 살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겨우겨우 참고 견뎠는데 또 큰형이 귀경해서 괴롭혔습니다. 내가 한 건 그에 비하면 아주 작은 반격에 불과한데 그걸 꼬투리 삼아 당신들은 루안을 죽이려고 하는군요!

    허, 루안이 내 명령에 따라 일을 했으니 이건 결국 나한테 위세를 부리는 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좋습니다. 가져가세요! 이까짓 황제, 난 안 할 겁니다!”

    “폐하!”

    길 내관과 시위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렇게 비분강개하자 강왕은 도리어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강왕은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황제라는 자리가 폐하께서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자리입니까? 그만하세요. 어린애처럼 화내지 말고 옥새를 거두세요. 할 말이 있으면 같이 잘 상의해보면 되지 않습니까.”

    강왕이 그에게 어린애 같다고 하자, 황제는 정말로 성질이 났다. 

    그는 옥새를 꽉 쥐고 물었다.

    “해독제, 어디 있습니까? 황숙께서 아직도 루안을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요? 짐이 4년이나 공을 들여 겨우 쓸모 있는 심복 몇 명을 길렀습니다. 죽이는 것은 쉽지만, 그럼 앞으로 누가 짐을 대신해 일을 한단 말입니까?”

    강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는 황제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이놈 하나 없어지는 게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황제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사람 하나쯤 모자란다고 문제가 될 건 없지요. 그렇대도 그의 목숨은 짐이 결정할 일입니다!”

    강왕은 눈을 반짝이더니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누가 폐하한테서 그를 뺏는다고 했습니까? 이 녀석은 잔인하고 악랄합니다. 본왕은 그저 조금 벌을 내려 순순히 말을 듣게 하려던 것뿐입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손을 흔들었다. 

    길 내관이 즉시 해독제를 꺼내 루안에게 먹였다.

    곧 루안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눈빛도 점차 맑아졌다.

    루안은 한숨을 돌리고 일어나 인사를 했다.

    “폐하께서 이리 저를 구해주시다니 신은 정말 감동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자네 걸을 수 있겠나?”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강왕을 바라보았다.

    강왕은 그저 이렇게 명령했다. 

    “데려다주거라.”

    “예.”

    길 내관은 대답한 뒤 시위 두 명을 거느리고 루안을 부축해 나갔다.

    강왕이 옥새를 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원치 않으신다고 하니 다시 회수할까요?”

    황제는 원하는 것을 얻고 나자 조금 전에 사납게 굴었던 자신이 떠올라 멋쩍은 듯 옥새를 거두어들였다. 그는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황숙…….”

    강왕은 손사래를 치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우리 부자가 지금까지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때마침 자리가 마련됐으니 본왕과 차나 한잔 하시지요.”

    “……예.”

    강왕은 어느새 다시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간 황제를 보고 속으로 아들의 천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마 며칠 전에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맏이가 그를 화나게 하고 괴롭혔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 또한 황제이니 권력을 다툴 마음이 전혀 없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여덟째에게 악랄하게 손을 쓴 것을 생각해보면 루안은 앞으로 절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강왕은 일단 황제의 체면을 세워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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