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61)화 (361/385)
  • 361화. 강왕께서 부르십니다

    루안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본 설 상서는 화가 났다. 아무도 자신들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질책했다.

    “자네 지금 이 늙은이 앞에서 멍청한 척하는 겐가? 강왕이 어디 그런 인간인가? 자네는 조정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겠지만 몇 년 전에 조정에 얼마나 피바람이 불었는지…….”

    그때를 떠올리면 그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4년 전, 황제가 바뀌면서 조정은 한 번 싹 정리되었다.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 중 어떤 이는 직위를 빼앗기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어떤 이는 하옥된 뒤 참수되었고 또 어떤 이는 얼떨결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루안이 한 번도 뵙지 못한 그 장인어른이 이렇게 죽지 않았던가?

    ‘이 녀석, 아직도 이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구나! 그래도 내가 나름 이 녀석의 상사로 몇 년을 지내어, 후배가 목숨을 잃는 꼴을 차마 보기 힘들어 이러는데 말이야. 그것만 아니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리 신경을 쓰겠어?’

    “자네…….”

    설 상서가 몇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설 상서의 눈에 보였다.

    “설 상서, 루 통정.”

    한 늙은 내관이 다가와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설 상서는 그가 강왕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긴장하며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길 공공(吉公公)이시군. 폐하를 뵈러 오셨소?”

    “아닙니다.”

    길 내관은 손사래를 치더니 루안을 향해 약간 몸을 숙였다. 

    “소인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루 통정을 모시러 온 겁니다.”

    설 상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복수를 한다고?’

    루안은 오히려 침착하게 형부상서의 면전에서 은표 한 장을 꺼내 건네며 물었다. 

    “공공께서 좀 가르쳐 주십시오. 강왕 전하께서 무슨 일로 하관을 보자고 하시는 겁니까?”

    길 내관은 은표를 거절하며 겸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인 같은 하찮은 아랫사람이 전하의 큰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루 통정께서 가보시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표를 거두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길을 좀 안내해 주십시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오니 길 내관은 웃는 얼굴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설 상서는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내관 중에서 돈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그런 그들이 돈을 받으려 하지 않을 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설 상서는 자기도 모르게 루안을 불렀다. 

    “루안…….”

    루안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인사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길 내관을 따라 정양문을 나섰다.

    설 상서는 루안이 강왕부의 마차에 오르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그냥 형부 관아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루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강왕이 이렇게 그를 부르는 걸 내가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됐다. 됐어, 그 녀석 자신도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데, 내가 뭘 이리 조급해하고 있담, 아직 할 일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설 상서는 잠시 생각을 내려놓고 공무에 집중했다. 

    그는 공문서의 결재를 마친 뒤 퇴근할 때쯤 되어 곰곰이 생각해보다 심부름꾼을 불렀다.

    “통정사에 가서 루안이 통정사로 돌아왔는지 확인해보아라.”

    그는 대답하고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 보고했다.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설 상서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물었다. 

    “돌아왔다 다시 나간 게냐, 아니면 강왕부에 가고 나서 돌아오지 않은 게냐?”

    심부름꾼이 대답했다.

    “통정사 사람의 말로는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설 상서는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내려쳤다.

    “루안, 이 녀석!”

    ‘큰일 났구나, 틀림없이 강왕한테 구류됐을 거야!’

    하지만 자신이 뭘 어쩐단 말인가? 가서 사람을 내놓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안이 자신의 밑에서 3년 동안 낭중을 지냈기 때문에 설 상서는 상사로서 아랫사람에 대한 정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을 위해 무모하게 자신의 앞날을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 

    설 상서는 심란한 마음에 밖에서 서성였다. 그는 한림원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한 사람을 불러 세웠다.

    “여 대인!”

    여강은 걸음을 멈추고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 설 상서와 아무런 친분이 없었다.

    “설 대인이셨습니까.”

    여강이 몸을 굽혀 인사했다.

    설 상서는 안쪽으로 두 걸음 정도 물러나 인파를 피해 웃으며 말했다.

    “여 대인, 퇴근하고 집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설 상서는 그에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말했다.

    “루 통정이 대인과 친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여강이 미소를 지었다.

    “하관이 무애해각에서 공부한 적이 있으니, 말하자면 동문 간의 우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설 상서가 칭찬하며 말했다. 

    “루 통정이 어찌나 유능한지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강왕 전하께서도 그를 다 부르지 뭡니까.”

    여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설 상서는 계속 말했다. 

    “아침에 의정이 끝났을 때니까 아마 오시(午时)가 채 안 됐던 것 같군요? 오후 내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루 통정이 강왕 전하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여강은 설 상서의 두 눈을 보고 다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갑자기 집에 급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다음번에 설 대인께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설 상서는 만족한 듯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서 가보십시오, 본관이 대인의 시간을 뺐으면 되겠습니까.”

    여강은 다시 인사를 하고 쏜살같이 길모퉁이로 걸어갔다. 역시나 루안의 하인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 대인?”

    한등이 그를 보고 말했다. 

    여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희 집 공자가 강왕부에 간 걸 알고 있느냐?”

    한등의 안색이 변했다.

    “예?”

    “아침에 의정을 마치고 강왕에게 불려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더구나.”

    한등은 말고삐를 내던지고 발을 구르며 통정사 관아로 달려갔다. 얼마 안 있어 그는 고찬과 함께 돌아왔다. 

    한등은 황급히 여강에게 인사를 했다.

    “여 대인, 저는 먼저 돌아가서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등은 말에 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고찬은 따라가지 않고 거꾸로 여강에게 물었다.

    “여 대인, 궁에 들어가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강이 말했다. 

    “궁에 들어가는 것이야 문제가 될 게 없지만 이걸 폐하께 말씀드리는 것이 꼭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네.”

    고찬이 말했다.

    “우리 어르신께서 지금 아주 위험합니다. 지금은 목숨을 지키는 것이 시급하니 옳고 그름은 나중에 생각하시지요.”

    여강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조급해하지 말게. 내가 정세를 살펴보고 처리하겠네.”

    * * *

    루안은 마차에서 내려 길 내관을 따라 강왕부로 들어갔다.

    “루 통정,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가서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길 내관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가 많으시오.”

    그는 한참을 기다렸다. 

    강왕은 아마도 공무를 논의하고 있을 터였다. 때때로 루안의 근처를 참모들이 드나들었는데 루안이 관복을 입고 복도에 서 있으니 다들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이렇게 반 시진 정도를 루안이 기다리니 마침내 길 내관이 나와 안내했다.

    “루 통정, 이쪽으로 오십시오.”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강왕은 바둑판 앞에 앉아 문객 한 명과 대국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강왕은 헐렁헐렁한 도포를 입고 손에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꼭 평범한 부잣집 노인처럼 보였다.

    “하관, 강왕 전하를 뵙습니다.”

    루안이 몸을 낮추고 절을 했다. 

    강왕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예를 거두게.”

    “감사합니다. 전하.”

    루안은 꼿꼿하게 서서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강왕은 루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루안의 표정은 웃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루씨 집안은 역시 교육이 엄한가 보군. 이렇게 날이 더운데도 루 통정의 의관이 이리 단정한 것을 보면 말일세.” 

    강왕은 고개를 돌리고 문객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 시에서 뭐라고 그랬던가? 얼음 같은 피부와 옥 같은 몸매에 청량하고 땀을 흘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본왕은 과장인 줄 알았는데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맞은편의 문객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전하, 그건 소동파의 사(*词: 중국 고전 문학 중의 운문의 일종)에서 화예 부인(*花蕊夫人: 후촉 황제 맹창의 귀비, 5대 10국 시대의 여류 시인)을 묘사한 것입니다. 루 통정께서는 사내이시니 그런 표현은 별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강왕이 “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일리가 있군. 본왕이 실언을 했네. 루 통정이 나이가 어려도 관직이 4품인데 어찌 후궁의 부인과 비교할 수 있겠나?”

    루안은 반박하지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강왕이 천천히 부채를 부치며 점점 가라앉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 통정, 자네 정말 유능하더군. 본왕이 경성을 떠날 때 자네는 아직 북양에 있지 않았나? 4년 만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어. 듣자 하니 지금 정사당에서 공무를 처리할 때 전부 자네한테 물어본다던데 정말 대단하군그래!”

    루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두 폐하의 신임 덕분입니다.”

    강왕은 피식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내려놓았다. 바둑판을 덮는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문객은 상황을 보고 급히 일어나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폐하의 신임.”

    강왕이 한 글자 한 글자 읊었다. 

    “자네가 폐하의 신임이라는 것을 알긴 한단 말인가! 폐하께서 자네를 신임하고 중용하셨는데 이런 식으로 폐하께 보답하는 겐가?”

    루안이 고개를 들어 강왕을 보았다. 

    강왕이 길 내관을 힐끗 쳐다보자,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시위 두 명이 루안을 눌러 강제로 무릎을 꿇게 했다.

    강왕은 그를 내려다보며 계속 말했다.

    “자네 부인이 시집오기 전에 요의(姚谊)의 그 얼빠진 놈을 만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골탕을 먹였다더군. 나중에는 누군가한테 당해 얼떨결에 고자가 되어 지금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있지. 그리고 내 왕비는 아들을 대신해 나서서 한마디 했다가 오히려 명성을 잃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고 말일세.”

    그는 웃으며 바닥에 눌린 루안을 내려다보았다.

    “본왕이 귀경하여 조사해 보니 이렇게 재수 없는 일들이 모두 한 사람과 관련이 있던데 자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루안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분수를 모르는 놈.’

    강왕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그저 사소한 일에 불과하네. 하지만 소달의 죽음은 사소한 일이 아니지, 안 그런가?”

    루안이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왕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

    그는 조용히 길 내관에게 지시했다.

    “루 통정이 한동안 만사가 잘 풀려 의기양양해진 탓에 신하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 같으니 네가 좀 가르쳐주거라.”

    “예.”

    길 내관이 대답하며 품에서 도자기병을 꺼내 알약을 들고 루안에게 다가갔다.

    두 시위는 루안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루 통정.”

    길 내관이 빙그레 웃었다. 

    “저희도 통정이 무예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벗어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통정은 지금 가정이 있으니 댁에 계신 가족들 생각을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시위들의 손에서 느껴지던 저항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들은 순조롭게 루안의 턱을 틀어쥐었고 길 내관이 알약을 넣자 닫아서 삼키게 했다.

    알약이 배 속에 들어가자 마치 아픈 사람처럼 창백했던 루안의 얼굴에 붉게 홍조가 올라왔다. 그의 눈빛이 흐려지고 팔뚝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시위가 손을 놓자 루안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반은 앉고 반은 무릎을 꿇은 채 겨우 버텼다.

    귀 뒤의 붉은 점은 갈수록 선명해져서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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